141편
<-- Chapter 3 : 선율의 기사 -->
◇
검의 합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라이오넬은 2미터가 넘는 엄청난 거구였으나 그 뒤에는 노련한 기술이 숨겨진 채였다. 뭉툭한 쇳덩어리 같은 대검을 자유자재로 휘두르며 타나토스를 압박해나갔다.
하지만 린슬렛이 놀란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실력이 늘었다.
여기서 말하는 실력이란 레벨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전반적인 재킷의 능력에 대한 이해도를 뜻했다. 수치로는 표현되지 않는, 순수한 전투 능력.
뇌가 능력의 활용 방도를 얼마나 잘 이해하는가.
“….”
보면 볼수록 놀라운 마음 밖에 들지 않았다. 린슬렛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벌려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눈앞의 타나토스는 정말로 강한 에스콰이어였다.
문제는 상대가 라이오넬이라는 것이었지만.
“주인님…!”
옆에서 함께 전투를 지켜보고 있는 넬의 얼굴에는 걱정하는 기색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린슬렛은 레벨의 차이를, 그리고 쌓아져 올린 게임에 대한 이해도를 생각한다면 충분히 선전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말로 스스로를 억눌렀다.
금방이라도 뛰쳐나가 타나토스를 돕고 싶은 마음을.
왜냐하면 라이오넬은 이 게임에서 1위의 자리를 확고부동하게 지키고 있는 최강의 기사였기에.
“큭!”
바닥에 꽂힌 대검이 콘크리트 덩어리를 긁어 내던졌다. 어깨의 방패로 그걸 막아낸 타나토스가 뒤로 발을 끌며 밀려났다. 뒤를 이어 한 걸음 크게 내딛은 라이오넬이 긴 거리에서 원을 그리며 검을 휘둘렀다.
바로 다음 순간, 뼈로 이루어진 짐승이 날아올라 대검을 막아내려 들었다. 그리고 대검이 망자의 허리를 가르는 아주 짧은 틈을 타 타나토스는 앞으로 굴렀다.
“…!”
그리고는 스파다로 팔목을 찔렀다. 푸욱, 하는 소리와 함께 척추 뼈의 모양을 한 검이 휘감겼다. 하지만 라이오넬은 아무렇지도 않게 팔을 비틀어 검을 빼냈다. 상처가 벌어지며 그 틈으로 피가 솟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이오넬은 멈추지 않았다.
“역시 실력이 늘었군.”
“크헉!”
여유롭게, 마치 스승이 제자를 상대하는 것처럼 타나토스를 밀어붙였다. 분명히 대검은, 저 정도로 자유자재로 휘두를 수 있으면 이 게임에서만큼은 강한 무기였다. 유리한 거리를 선점하는 것이 속결되어야 하지만.
그래도 약점은 있다.
근접 거리의 전투에서 위력을 발휘하기 힘들다는.
하지만 라이오넬은 완벽했다.
약점이 없는, 그야말로 최강의 기사였다.
타나토스가 접근전을 위해 파고들 때면 그는 대검을 방패처럼 세운 채 그 뒤로 숨었다. 그리고는 틈을 내주지 않고 거리를 벌리거나 쳐낼 타이밍을 기다렸다.
그렇다면 남는 방법은 단 하나. 검이 휘둘러지는 타이밍에 맞춰 파고들어 상처를 입히는 것. 위험성이 높았으나 라이오넬을 직접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방금 전의 일격도 통하지 않았다.
분명히 상처를 입혔는데도.
피가 나왔는데도.
라이오넬은 전혀 전투에 지장을 받지 않았다.
‘대체 무슨 능력이기에…!’
린슬렛은 어이가 없어지는 걸 느끼며 생각했다. 이 게임에 무적은 없다. 사기라 일컬어지는 타나토스의 망령 신체도 고작해야 1분 남짓 피해를 없애는 것에 불과했다. 지금까지 그는 그 스킬로 난관을 헤쳐 나왔다.
그리고 그게 전혀 통하지 않는 상대가 나타났다.
더욱이 압도적인 신체 능력을 지닌.
바로 그 순간, 검이 날아들었다.
“윽…?!”
손에 쥐고 있던 방패로 그걸 막아낸 린슬렛은 한 바퀴 뒤로 돌며 착지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자 그녀는 튕겨져 날아간 검이 한 여성의 뒤에 머무르는 걸 발견했다.
입고 있는 코트가 펄럭거렸다. 하나로 묶은 긴 머리, 고압적인 시선이 이쪽을 환멸 하듯이 바라보았다. 급히 달려온 것일까. 우아랑은 숨을 몰아쉬며 검을 들었다.
“얌전히 체포되어라. 랜슬롯.”
“저기, 나 지금 좀 화가 난 상태거든…?”
이야기는 대충 친구인 발렌타인에게서 들었던 터라 린슬렛은 어이가 없어지는 걸 느꼈다. 지금 당장이라도 전투에 끼어들고 싶은 욕망을 꾸욱 억누르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아주 타이밍이 좋다고 해야 할까.
“네가 티티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다 들었는데.”
“라이오넬 대위님, 왜 혼자…?!”
안 듣고 있잖아?
“이 쌍년이…?”
“리, 린슬렛님?”
“말리지 마. 넬.”
“아니, 그….”
눈이 완전히 돌아간 린슬렛의 모습에 넬은 겁을 먹고 뒤로 물러섰다. 라이오넬로부터 연락을 받고 온 것일까. 우아랑은 타나토스와 라이오넬의 전투를 어이가 없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아론다이트.”
그리고 린슬렛은 검을 뽑아들었다. 재킷 안쪽에서 둥그런 모양의 ‘검’이 나왔다. 린슬렛은 그것을 들어 팔에 끼워맞췄다. 랜슬롯이라는 이름의, 가장 동경하는 기사가 되며 받은 방패와 같은 모양을 한 검을.
아론다이트가 푸르게 빛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라이오넬 역시 자신의 검을 뽑은 적이 없다는 것을.
◇
“트리슈….”
“안 돼, 오빠. 베디비어 같은 게 되어서는.”
트리슈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의지를 담아 바라보았다. 이제 와서, 그것도 자신이 이런 소리를 하는 게 말도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진심이었다.
진심으로 오빠가 베디비어가 되지 말았으면 했다.
“이 퀘스트는 결국에 오빠를 농락했잖아! 팔을 나무토막에 비유하고 깎아내리게 만들고!
고통을 느끼게 하고! 결국에 그 끝에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한 번 터져 나온 감정은 봇물처럼 밀어닥쳤다. 트리슈는 이를 악 물고 울음을 참으려 애쓰며 소리쳤다.
“결국에 외팔이인 거잖아!”
외팔이 기사 베디비어.
그 이후의 삶이 과연 괜찮을까?
아니 애초에 오빠의 팔은 정말로 고칠 수 없었던 걸까? 내장이 손상이 되어도 몇 시간 만에 원래대로 되돌리는, 이 현대의 상식을 넘어선 게임에서?
애초에 오빠는 베디비어가 되기 위해 그런 결과를 맞이하도록…. 엘레노어에게 선택된 것이 아니었을까?
“싫어…. 나, 시우는…. 오빠가 너무 싫어!”
그동안 참아왔던 감정이 제멋대로 뒤엉키며 트리슈는 끝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쏟았다. 얼굴을 움켜쥔 채 그녀는 하고 싶은 말을 정리하지 못했다.
게임으로 인해 망쳐진 세 사람의 관계.
아무 말도 안하는 오빠를 원망하면서도, 돌아봐주었으면 했다. 차라리 미워하고 혐오했으면 했다.
발렌타인에게 배신감을 느끼면서도, 그녀가 솔직하게 미안하다며 사과해주길 바랬다. 하지만 그럴 순 없다. 관계는 이미 파탄이 나버리고 난 뒤였다. 어떻게 보면 그냥 웃으면서 넘어갈 수도 있었을 텐데.
오빠의 꿈이 부서지면서 모든 건 망가졌던 것이다.
“…. 당신이.”
그리고 발렌타인은 비참한 기분 속에서 입을 열었다. 몇 년 만에 겨우 진심을 이야기하는 트리슈의 모습에 그녀는 애써 외면했던 죄책감이 몰려드는 것을 느꼈다.
“저는, 당신이 절 미워한다고 생각했어요….”
“….”
그런 이야기에 트리슈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스스로 원하지 않는 상황 속에서 준우의 옆에 남는 선택밖에 할 수 없었던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도리어, 그런 선택을 할 정도로 오빠를 진심으로 좋아해주었던 발렌타인이….
“미워.”
정말로 미웠다.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지며, 관계가 그렇게 비틀린 이후 발렌타인은 결국 아무 것도 하지 않았기에. 괴로워하는 준우의 옆에 그저 가만히 있었을 뿐.
“하지만 이대로 계속 미워하고 싶지 않아…!”
그렇기 때문에 트리슈는 마음에 담아두었던 걸 여과없이 토해냈다.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의 상황에서 오빠를 설득하기 위해 양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 남자가 그렇게 하라고 했기 때문에.
이, 어떻게 보면 어리광에 가까운 짓을 용서했기에.
“미안, 트리…. 아니, 시우야.”
준우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약속했어.”
“뭐…?!”
트리슈는 어이가 없어져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함께 싸우기로.”
“읏….”
의지를 담아 이야기하는 준우의 목소리에, 트리슈는 이를 악물며 물러섰다. 그녀로서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이 너무 늦었다는 것은. 오빠 또한 같은 고민과 생각 끝에 이와 같은 결론을 내렸다는 것을….
“왜, 안 들어주는 거야?”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눈물이 흘렀다.
“왜 트리슈의 말은 들어주지 않는 거야?”
눈앞에서, 다시금 남을 위해 희생하려는 오빠가 너무 야속했기 때문에.
“…. 미안, 해.”
물론 준우 역시 그런 트리슈의 마음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 여동생에게 다가가 천천히 어깨를 감싸 안고 끌어안았다.
“오빠가 좀 더 신경을 썼어야 하는 건데.”
그리고 그는, 천천히 자신의 감정을 말하기 시작했다.
나무토막으로 된 오른팔에서는 계속해서 통증이 느껴졌다. 오래 전의 사고 이후로 아릿하기만 했던 그것은, 충치라도 되는 것처럼 통증을 계속해서 발생시켰다.
마치 시우의 마음처럼.
“어떻게 널 대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어. 발렌타인…. 도. 너희를 어떤 얼굴로 봐야할지 정하지 못했던 거야.”
“화를, 내면 되잖아! 다 내 잘못….”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엣….”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준우가 소리를 지르자 트리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를 뿌득 간 그는 감정을 애써 정돈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네가 더 울고 있는데!”
하지만 목소리는 계속해서 감정을 담아냈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애써 감춰둔 감정을 내보인 준우는 고개를 휙 돌려 뒤쪽의 발렌타인을 바라보았다.
“너도, 마찬가지야!”
“읏…?”
“너희가 더 슬퍼하고 아파하는데…! 내가 어떻게!”
화를 낼 수가 있겠냔 말이다!
아프다.
팔의 그것이 아파서 죽을 것 같았다. 이 통증이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 듯한 기분이었다. 농락당하는 듯한 고통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무력하게 있을 수는 없다.
혼자 싸우고 있을 그 남자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낸 준우는, 어쩐지 심장이 세차게 뛰는 걸 느꼈다. 자신의 품에 안겨 울고 있는 여동생을 보며 그는 순수하게 감사한 마음을 가졌다.
“시우야. 그리고….”
준우는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채영아.”
뒤를 돌아보며, 눈을 마주보았다.
“나는 그 남자를 돕고 싶어.”
“난 몰라…. 정말로 불행해져도….”
“그래도 지금은 응어리가 풀려서 기뻐.”
“저, 저는!”
준우가 침착하게 웃어 보이고 다음 순간, 뒤쪽에 있던 발렌타인이 용기를 내 그의 옷소매를 움켜쥐었다. 펑펑 울고 있는 그녀를 본 준우는 심장이 두근거리며 돌아서 눈을 마주쳤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당신 곁에서.”
많은 의미를 내포한 말이었다.
짐짓 어른스러운 채를 하고 있는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준우는 그녀를 꽉 안아주고 싶은 마음을 뒤로 한 채 뒤로 돌아섰다.
“…. 왜 항상, 희생하는 건데.”
트리슈가 낫을 내밀었다.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아무나를 위해서는 아니야.”
그 남자이기 때문이다.
준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낫을 받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