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편
<-- Chapter 3 : 선율의 기사 -->
◇
- 가상 세계 초대를 취소하였습니다.
“…. 하아.”
뭘 하는 건지.
눈앞에 떠오른 팝업창이 사라지는 걸 눈으로 확인한 다연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물러섰다. 어둠에 잠긴 거실, 그녀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안 그래도 오늘은 피곤할 텐데.
너무 어리광을 부리는 거겠지.
오늘 같은 날에는 트리슈 역시도 피곤해서 그냥 잘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헤어지고 몇 시간 되지도 않아 이렇게 가상 세계로 초대를 하는 건, 그의 눈으로 보았을 때는 왠지 엉겨 붙는 여자애처럼 보이진 않을까.
으음….
“다연아, 안 자니?”
“아, 엄마.”
그리고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다연은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잠옷 차림을 한 어머니가 방으로 가는 복도 끝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아.”
“왜, 뭐 고민 있니?”
“남자 문제.”
이제는 편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해 다연은 아무렇지도 않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녀는 서울 도심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창문 앞으로 갔다.
“그런 애는 휘어잡아야 한다니까.”
딸아이의 이런 고민은 처음이었던 터라, 어머니는 새롭다는 감정을 느끼며 가까이 다가갔다. 기껏 예쁘게 낳아줬더니, 그에 뒤지지 않는 잘생긴 남자를 만나서….
“음?”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어머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너희 사귀고 있는 거 아니니?”
“….”
“그럼 바람이잖아.”
“아, 음. 그게.”
다연은 무어라 설명해야할지 복잡해지는 걸 느꼈다. 친구 이상 연인 미만의 관계에 대해서.
“…. 엄마 잠깐 나갔다 올게.”
“어, 어디를 가려고?!”
“아는 사람 좀 만나려고.”
“누….”
“있어. 사람을 바다에 넣어 헤엄치게 하는 사람.”
“아, 아니라고오오오오!!”
“괜찮아. 발을 시멘트 담긴 통에 넣는 정도야.”
“아니 그것 때문에…!!”
당황해 바깥으로 나가려는 어머니를 붙잡은 다연은, 곧이어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차갑게 얼굴이 굳어져 있던 어머니가 갸웃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하하하…. 아, 진짜 엄마. 딸도 이제 다 컸다고요.”
약간 기분이 풀렸다.
엄마의 냄새는 좋았다.
“우으으~. 웃었더니 좀 풀리네.”
고민해봤자 별 수 없는 거겠지.
“아직 대학생이면서 다 컸다고 하는 거 아니야.”
“뭐래~ 나 배고파. 뭐 좀 먹자.”
다연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어머니의 손을 잡아끌었다. 괜찮은 제안이라고 생각해 그 뒤를 순순히 따르면서도 어머니는 요새 들어 부쩍 자란 듯한 딸아이의 모습에 어쩐지 조금은 아쉬움이 드는 걸 느꼈다.
◇
“왔어?”
가상 세계로 들어가자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린슬렛의 초대가 중간에 취소되어 내심 안심하고 있던 나는 길게 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해변이었다.
끼엑, 끼엑, 하고 갈매기가 우는 소리. 두 개의 비치 의자에 파라솔. 그 사이에는 화려하게 우산과 빨대가 두 개 꽂힌 칵테일이 보였다.
“…. 이건 또 뭐야?”
“이런저런 설정이 가능하더라고♡”
가까이 다가가자 역시나 파라솔 뒤쪽에 트리슈의 모습이 보였다. 에메랄드빛을 띤 비키니 수영복. 다리를 꼰 채 선글라스와 길게 묶은 머리까지. 거기에 골반 위쪽으로 나비가 나는 듯한 문신이 보였다.
“너 문신도 있….”
“헤나야. 헤나.”
“….”
“아니 그보다 실제로는 없거든?”
“그렇군.”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비치 의자에 걸터앉았다. 드로워즈를 입은 차림새 그대로였지만 가볍게 팝업창을 꺼내 두드리자 트렁크 수영복으로 뒤바뀌었다.
“오빠, 문신한 여자는 싫어?”
“그냥 문신이 싫어.”
“왜?”
“딱히 이유는 없는데.”
“헤에, 그렇구나.”
선글라스 너머로 트리슈의 흥미에 젖은 눈이 보였다. 선홍빛 입술이 부드럽게 호를 그리며 그녀는 이내 팔을 쭈욱 들어 기지개를 폈다.
“우~읏. 근데 진짜 해변에 있는 것 같네.”
“뇌가 착각하고 있는 거야.”
“…. 굳이 그렇게 말해야 돼?”
“아니 사실을 말한 것뿐인데.”
“그럼 가짜야?”
“….”
의자 끝에 턱을 괸 그녀가 나를 바라보았다. 슬슬 내 성격에 대해서 파악을 당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귀엽게 고개를 갸웃거리는 트리슈를 바라보았다.
“아니야. 절대.”
“헤에, 그럼 우리 한 거네?”
“….”
“오~ 오빠 얼굴 빨개졌어.”
“그럴 리가 있나.”
나는 한숨을 내쉬며 칵테일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시원한 맛에 저도 모르게 조금 많이.
“만약에 애기 생기면 어쩌지?”
그리고 뿜어냈다.
푸웁, 하고.
“너, 너는 무슨 못하는 말이…!”
“아잉, 진지하게 미래를 생각하는 거잖아?”
그냥 장난이 치고 싶은 것뿐이면서.
말하는 것과 생각하는 게 전혀 맞질 않는 청개구리 같은 녀석이라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니 트리슈는 가볍게 콧노래를 부르며 웃었다.
“마음의 준비는 된 거야?”
그렇기에 나는 진지한 질문을 던졌다.
녀석의 마음에 아직 불안한 기색이 남아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더욱이 장난을 치며, 그런 불안감을 숨기려고 드는 거겠지.
“…. 가, 갑자기 이러기 있어?”
“넌 진지하게 대하면 맥을 못 추잖아.”
“쳇, 또 야한 거나 하려고 했더니.”
볼멘소리를 내며 트리슈가 시선을 피했다.
“집인 거 아냐?”
“응, 소파에서 접속했어. 엄마랑 아빠랑 앞에서 같이 과일 먹고 있는데. 몰래 잠든 척 했지.”
“….”
“왜?”
“음…. 그거 잘못해서 감각이 심하게 이어져 있는데 다른 사람이 깨우거나 하면 버그가 생길 수 있거든.”
“어떤 식으로?”
“현실과 이쪽 세계가 연결이 된다거나….”
린슬렛과도 그랬던 적이 있었지.
나는 그때의 아찔했던 순간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린슬렛은 감각이 남겨진 채였고 나는 그 장소가 연결이 되면서 곤란했었지.
“뭐야, 그거….”
그렇게 설명을 마친 순간, 트리슈는 씨익 웃으며 내 위에 올라탔다. 볼이 살짝 상기되어, 긴 머리칼이 내 얼굴 근처로 흘러내렸다.
“되게 재밌겠는데?”
그리고 그녀는 미친 소리를 했다. 선글라스 너머의 눈이 음란하게 빛났으나, 나는 도리어 그것이 연기라는 생각을 해 설마 싶은 눈으로 트리슈를 바라보았다.
“쳇, 알았어.”
잠시 후, 트리슈는 새침하게 혀를 차고는 내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부드러운 살결이 서로 맞닿고 나는 그녀가 눕기 편하도록 자리를 내어주었다.
“저기, 타나 오빠.”
“….”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그리고 트리슈는 눈을 감았다.
“모르겠어. 어떻게 해야 할지.”
내 가슴에 귀를 댄 채, 트리슈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이내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녀의 마음이 편해지도록 천천히 머리를 쓰다듬었다.
“근데 좋다. 사람의 품이라는 건.”
“그래?”
“응, 이렇게 따뜻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어.”
후우, 하고 가볍게 숨을 내쉬는 트리슈. 어리광을 부리는 그녀를 나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빠도 엄마도, 오빠랑 무슨 일 있냐고 물어보지만…. 그런 거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래서 역시 좀 다른 거 같아. 타나 오빠의 품은.”
그런 건가.
역시 이쪽 세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수 없는 만큼 그녀는 더욱이 외로움을 느꼈던 걸지도 모른다.
“내일 결혼하자. 트리슈가 평생 집안일 해줄게.”
“….”
이런 건 좀 아니지만.
“트리슈.”
“왜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응?”
“화해를 하던, 사과를 하던, 아니면 그 외에…. 과정은 상관없어. 네가 만족한다면 난 그걸로 충분해.”
“….”
트리슈가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그녀를 꾹 끌어안았다.
“내가 네 뒤에 있을 테니까.”
“바, 바보…. 매번 진지하기만 하고….”
“네가 경박한 거야.”
방금 전도, 내가 결혼하자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면 또 그거대로 당황했을 거면서 말이지. 하지만 나는 이런 녀석의 태도가 어쩐지 귀엽다는 생각을 했다.
크게 데인 상처 이후로 남게 된 흉터 같은 걸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었다.
“…. 나는.”
그리고 트리슈는 얼굴을 붉힌 채 말을 이었다.
◇
그리고 며칠 뒤 이른 새벽,
“네크로맨서 재킷 기동.”
차가운 한기를 느끼며 나는 품안에서 튀어나오는 마스크를 잡아 얼굴에 썼다.
[밴이 습격 지점에 도달할 때까지 30초.]
모드레드의 목소리가 귀 부근에서 울려 퍼졌다. 나는 풀숲에 낮게 몸을 숙인 상태에서 주변을 살폈다. 머리 위에서 넬이 허공에 떠오른 채 주변을 살피는 게 보였다.
[준비 됐어.]
[트리슈도.]
[…. 타나토스님.]
나를 제외한 린슬렛, 트리슈, 발렌타인 역시 밴을 포위하는 형태로 제각기 풀숲에 숨은 상태였다. 나는 신호가 떨어질 때까지 눈을 감고서는 기다렸다.
내가 할 일은 무척이나 간단했다.
트리슈를 위해 시간을 버는 것.
[지금.]
뒤를 이어 모드레드의 명령이 떨어지자, 나는 정신을 집중하며 앞으로 뛰쳐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