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편
<-- Chapter 3 : 선율의 기사 -->
◇
꿈을 꾸었다.
무척이나 오랜만에.
불타는 가게 앞에 갤러해드가 서있었다.
그는 나의 우상이었으며 동경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무너져 내렸다.
버텨내지 못하고, 쓰러졌다.
“허억…!!”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꿈속에 있던 뇌가 현실로 돌아오며, 먼저 확인한 것은 몸의 상태였다. 양손을 들어 바라보고는, 몸을 더듬어 괜찮은지 확인했다. 그리고 이내 복부에 붕대가 감겨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어나셨어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어두컴컴한 와중 넬의 모습이 보였다. 둥그런 창문에 기댄 채 녀석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나를 돌아보았다.
“넬, 여기는…?”
“왕궁 내부의 지하수로에요.”
그리고 창문 바깥으로 두터운 발 소리가 들리더니 공룡들이 연이어 지나갔다. 좀 더 주변을 살펴본 나는, 넬가 내 사이에 형성된 도랑을 발견했다. 그 개울은 빛이 들어서지 않는 지점까지 이어진 상태였다.
“트리슈는?”
“어디까지 기억하세요?”
“라이오넬이….”
“네, 그 말대로.”
부웅 떠올라 내게 다가온 넬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복부에 감긴 붕대를 매만져 풀기 시작했다.
“감염의 위험이 있으니 다른 걸로 바꿀게요.”
붕대를 풀어낸 녀석이 쓰게 웃었다.
“가짜지만.”
“….”
“주인님 여기까지 모셔오는 것도 큰일이었다고요? 제가 재킷을 조종하긴 했는데, 움직일 때마다 기절하신 와중에도 고통스러워하는 게 빤히 보여서….”
그 눈가에 슬퍼하는 기색이 보였다. 나는 침을 삼키며 복부를 내려다보았다. 얼기설기 꿰매어진 상처는 엉망진창으로 내 근육 위를 뒤덮고 있었다.
“가짜가 아니야.”
그리고 나는 사과를 했다.
“너는 가짜가 아니야. 넬.”
그렇게.
스스로를 다잡듯이.
“고마워.”
“…. 이런 때만 친절하다니까.”
훌쩍 거리며 눈가를 훔친 넬이 이윽고 새로운 붕대를 꺼내 상처를 감아주었다. 나는 팔을
들거니 하며 묵묵히 녀석의 간호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점차 라이오넬에 대한 걸 떠올렸다.
“넬,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뭔가요?”
“이 게임에서 무적 같은 게 있어?”
“…. 그럴 리가요.”
녀석이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어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그 녀석은 뭐지?”
“라이오넬님이요?”
“그래, 그건 말도 안 되잖아?”
상처를 입어도 쓰러지지 않는다. 벌떡 일어나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행동한다. 그런 상황을 나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저도, 모든 걸 아는 건 아니지만….”
그리고 넬은 인상을 찌푸린 채 말을 이었다.
“그래서 가끔, 너무….”
주먹을 꽉 쥔 채 고개를 떨어뜨린 녀석이,
“비참한 기분이, 들 때가 있어서.”
“넬….”
“죄송해요. 주인님.”
“아니, 괜찮아.”
걱정을 해주고 있다.
이 녀석은 날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이건 확실해요.”
“응.”
“이 게임에 무적은 없어요. 무언가 스킬이 있으면 대가로 항상 무언가를 받아가요. 엘레노어께서 어떤 기준을 가지고 계신지 넬은 잘 모르지만….”
그래도 무적은 없다.
완벽한 스킬은 없다.
넬은 그렇게 이야기했다.
“그럼, 방법을 찾아야겠군.”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린 나는 자리에서 조심스럽게 일어섰다. 레벨을 올리던, 그를 통해 새로운 스킬을 만들어내던 뭔가 수단을 강구해야할 것 같았다.
“주인님!”
“난 괜찮아.”
“항상 그런 말씀만!”
“어쩔 수 없잖아.”
트리슈가 라이오넬에게 붙잡혔다. 퀘스트는 이걸로 실패. 다시 서울로 돌아가 린슬렛과 발렌타인에게 연락을 취해 그쪽도 생각을 해두어야만 했다.
“일단 이곳에서 탈출을….”
“아니, 그건 아니에요.”
“뭐?”
중얼거리자니 넬이 내게 뭔가를 내밀었다. 돌돌 말려서 접힌 양피지였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것을 받아든 나는 그대로 슬쩍 펼쳐들었다.
양피지가 허공에 부웅 떠오르며 그 위로 영상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어딘가의 방인 듯한 장소,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짙은 녹색을 띈 머리칼.
“트리슈…!!”
나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침대 위에 눕혀진 채, 그녀는 기절한 상태로 움직이질 않았다. 장소는 어디인 걸까. 나는 인상을 찌푸린 채 영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크윽!”
바이크 헬멧을 쓴 거구의 사내.
[….]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화면 쪽이었지만.
대체 어디인 거야?!
[호오, 이 자가 열쇠를 지니고 있는…?]
바로 그 순간, 다른 목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라이오넬의 어깨를 타고 모습을 드러냈다. 왕관을 쓰고 있는 다람쥐의 모습에 나는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왕궁 안이라고…?
[….]
[열쇠를 빼앗아라. 혁명은 저지되어야 한다.]
왕이 명령을 내리자 화면 뒤쪽에서 다람쥐들이 제각기 모습을 드러내 린슬렛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라이오넬은 어깨에 있던 왕을 낚아채 손에 쥐었다.
[뭣?! 무, 무슨 짓이냐!]
[….]
그리고 손으로 쥐어짜냈다.
퍽석, 하는 소리와 함께 화면으로 혈액이 튀었다.
“…!”
“꺄악!”
잔혹한 광경에 넬이 비명과 함께 시선을 피했다. 나 역시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그로테스크한 광경에 몸이 굳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화면에서 핏자국이 닦여지고 붉은 육편을 손에 들고 있던 라이오넬이 그것을 귀찮다는 듯 바닥에 털어냈다.
[폐, 폐하아아아!!]
외눈안경을 쓴 다람쥐가 비명을 지르며 고깃덩어리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라이오넬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고 고기를 발로 짓이겼다.
[명령하다. 너희에게.]
그리고 공포로 몸이 굳어진 다람쥐들을 싸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헬멧을 벗어, 어깨에 걸친 그는 침대에 누운 트리슈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곳에 적을 들이지 말라.]
[네, 넵!]
잔뜩 굳어져 있던 외눈안경이 고개를 조아리며 몸을 벌벌 떨었다. 그런 모습에 라이오넬은 고개를 내저으며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검은 사자다.
눈앞에 있는 건, 존재할리 없는 검은 사자였다.
[우스운 게임. 말도 안 되는 장난으로 가득 찬 게임.]
사자가 중얼거렸다. 검은 눈동자로 나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분명히 실존하는 게임.]
무뚝뚝하게 중얼거린 그는 손바닥을 카메라의 앞에 대고 펼쳤다. 그러자 장갑에 감싸인 손바닥 위에 픽셀 조각들이 모이며 무언가 만들어졌다. 그걸 본 나는 순간적으로 심장이 멎는 것을 느꼈다.
[적수도, 살아 있는.]
검은 보석.
다시 말해 모르가나.
[기다림을 즐거이 하다. 넘어서는 시련의 순간까지.]
“….”
이쪽을 똑바로 바라보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검은 사자가 모르가나를 꾹 쥐었다. 뒤를 이어 나는 트리슈의 모자와 가면, 머플러가 사라지는 걸 발견했다.
즉 그녀는 현실로 돌아왔다.
밤에는 최대 영하 50도까지 떨어지는 개마고원에.
“크윽?!”
하지만 라이오넬의 행동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뚜벅뚜벅 걸어간 그가 창문을 모조리 박살내기 시작했다. 나는 그 저급한 의도를 이해하고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박살난 창문을 통해 바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많지 않다. 너의 시간. 싸워라. 사자라면.]
그리고 영상은 거기에서 끝.
“빌어, 처먹을…!!”
나는 참기 힘든 분노를 느끼며 벽을 후려쳤다. 와르르 무너지는 벽, 흥분해 창문 쪽을 돌아본 나는 영상과는 달리 해가 떠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트리슈는 왕궁에 있다.
완전히 맨몸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 크윽!!”
무력감과 절망이 분노로 뒤바뀌어 나는 인상을 찌푸린 채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뒤를 이어 넬이 심각한 얼굴을 한 채 팔을 펼쳐 내 앞을 가로막았다.
“넬….”
“주인, 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일까. 녀석의 눈은 걱정하는 기색으로 가득했다.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으며 그 옆으로 슬쩍 빠져나가려 했다. 하지만 넬은 몸을 옆으로 빼내며 다시금 나를 가로막았다.
“넬!”
“반대쪽이에요.”
“뭐?”
“저쪽으로 가는 게 더 안전해요.”
“…. 넬.”
그 눈에서는 의지가 엿보였다.
걱정하는 기색으로 가득 찬,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행동을 존중하겠다는 의지가. 잠시 그런 그녀의 눈을 바라보던 나는, 이내 반대편으로 돌아섰다.
넬이 안내할게요.”
뒤로 따라붙은 넬이 중얼거렸다. 어둠에 잠긴 긴 하수도를 달리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복부에 아련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하려고 했다.
“….”
이 게임은 이상하다.
분명이 말해, 사람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랜덤으로 섞어서 만들어낸 짬뽕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다람쥐, 공룡, 사로잡힌 인간들, 거대한 북쪽의 왕국. 혁명이라는 말. 기타 등등.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결국에 아무것도 상관이 없어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라이오넬에게 분노를 느꼈다.
트리슈에게 그딴 짓을 한 그에게, 더할 나위 없이 큰 분노를 느끼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물론, 트리슈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영상의 촬영 시간으로부터 얼마나 지났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현재 얼어 죽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나로 인해.
내가 좀 더 강했더라면!
“빌어먹을….”
그녀는 그런 걱정을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이제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나는 트리슈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한 채 좁은 길을 달려 나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