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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크로맨서 재킷-126화 (126/321)

126편

<-- Chapter 3 : 선율의 기사 -->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왕의 앞에 섰다. 역시나 이쯤 되니 트리슈도 적응을 할 수가 없는 건지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조그마한 코를 벌름거리며 우리를 바라본 왕의 눈에 호기심이 깃들었다.

“오느라 고생이 많았구나.”

“감사합니다! 폐하!”

아, 이럴 때는 넬이 있지.

“먼 산과! 땅과! 들과! 하늘과! 강과! 바다를 건너! 저희는 이곳에 혁명을 전하기 위해 왔습니다!”

앞으로 나선 넬이 고개를 조아리며 신나게 포장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와 거의 엇비슷한 고생을 하기는 했지만…. 나는 거기에 대해서 생각하며 완전히 자신들만의 세계에 빠져든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타나 오빠.”

그리고 돌연 트리슈가 말을 걸어왔다.

얼굴에 흥미가 가득한 채.

“이럴 때 정말 재미있지 않아?”

“뭐가.”

“우리는 ‘퀘스트’를 하러온 건데 말이지.”

“….”

게임 상의 주민들에게는 이게 삶이라는 건가.

“그래서 싫은 거야.”

“으엑, 진지하네. 오빠.”

내 대답에 트리슈는 인상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내 생각은 변화하지 않았다. 이곳이, 현실에는 존재할 수가 없는 우스꽝스러운 다람쥐들의 왕국이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더라면 무척 이상한 기분이었을 거다.

“오, 그래.”

바로 그 순간, 왕이 우리 쪽을 돌아보았다.

“환영회를 하기 전에, 혁명의 불씨를 건네주지 않겠느냐? 대장장이들이 주조를 해야 하니.”

“그럴까?”

그 말에 트리슈는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앞에 팝업창이 떠오르고 이내 열쇠를 빼내려는 듯 품안으로 슥 손을 집어넣었다.

“잠깐만.”

하지만 나는 그걸 제지했다.

“응?”

“….”

굳이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슬쩍 앞으로 나서 열쇠를 꺼내려는 트리슈를 제지했다. 그리고는 까만 눈을 반짝이고 있는 국왕을 진지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 전에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무엇인가? 윤허한다.”

“아까 당신네들 군인들이 우리를 습격했단 말이지.”

“….”

국왕의 꼬리가 굳어졌다.

“무슨 일인지 설명을 해줬으면 좋겠는데.”

“뭐? 언제 그런 일이….”

“네가 잠들었을 때.”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트리슈에게 일단 나중에 이야기하자는 눈빛을 보냈다. 무언가 반박하려던 그녀가 이내 못내 아쉬운 듯이 입을 다물었다.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인가?”

그리고 왕은 가볍게 탄식을 했다.

“행정관, 이게 어찌된 일인가.”

“어, 얼마 전에 추방한 과격파의 짓이 아닐 런지.”

왕이 슬쩍 분노를 내보이자 옆에 서있던 외눈 안경이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그러자 왕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향해 고개를 숙여보였다.

“폐, 폐하!”

그 말에, 주변에 있던 근위병을 비롯해 모두가 놀랐다. 하지만 국왕은 그러거나 말거나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미안하네, 이런 말로는 신뢰할 수 없겠지만.”

“…. 애초에 너희들이 말하는 그 혁명이 뭔데?”

나는 의심을 거두지 않은 채 재차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왕은 자신이 계속해서 앉아있던 거대한 인간이 앉을 사이즈의 의자를 돌아보았다.

“인간이 되기 위한 혁명일세.”

“인간…?”

“그래, 예언의 일종이지.”

그리고 국왕은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듣지는 않았지만.

“하아….”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털썩 드러누웠다. 피로감이 몰려들어 머릿속이 복잡한 와중, 나는 눈앞에 즐거운 듯이 떠올라있는 넬을 바라보았다.

“재미있었죠! 환영회!”

“….”

녀석은 다람쥐의 귀와 꼬리를 달고 있는 채였다.

“마지막에 그 불꽃을 내뿜는 쇼는 정말이지!”

“넌 생각 없이 살아서 좋겠다.”

“너, 너무해요! 주인님!”

실제로 그렇잖아.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리를 꼰 채 생각에 잠겼다. 그 실제와 같은 감촉에 감탄하면서.

일단 열쇠는 내일 넘기기로 했다. 우리가 옆에서 주조의 과정을 면밀하게 살펴보는 걸 조건으로 내걸고.

왕은 다람쥐들이 이런 커다란 왕국을 만든 것부터 시작해, 뭔가 방대한 설정을 이야기했지만 난 무시하고 듣지 않았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으니까.

“중요한 건, 이놈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단 거지.”

근거가 전혀 없다.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손을 뻗어 앞머리를 매만졌다. 아마 그걸 생각해서 녀석들 역시 이렇게 성대한 환영회를 열어준 걸까 싶었다. 확인을 해봐야겠지만.

그래서 이렇게 방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늦은 시간을 기다리기 위해.

“하아~ 물 따뜻하고 좋았어!”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니 방구석에 있던 욕실 문이 벌컥 열리며 트리슈가 걸어 나왔다. 문 아래쪽으로 자욱하게 수증기가 빠져나오고 나는 누운 상태 그대로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 팔자도 좋다.”

“오빠도 하지? 샤워.”

“됐어.”

“에엑, 안 씻은 남자랑 그러긴 싫은데.”

“….”

“물론! 섹(삐이-)를 말하는 거야♡”

이럴 때 비속어 필터가.

“아하하, 농담이야. 농담. 그게 아니면….”

요염하게 웃은 트리슈가, 나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재킷은 속이 다 비치는 연녹색의 네글리제로 형태가 바뀌었던 터라, 나는 그대로 돌아누웠다.

“왜애, 기대했어?”

“잠이나 자자.”

이런 곳에서 자도 괜찮을 런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볼을 쿡쿡 찔러대는 트리슈를 무시한 채 생각에 잠겼다. 지금 이 장소는, 내 눈에는 왕궁 안에 있는 방 중 하나로 보였지만 아서리안을 깔지 않은 사람의 눈에는 어떤 눈으로 보일지 알 수가 없었다. 단순히 무채색의 철판으로 된 방안일지, 아니면 우리가 걷는 장소마다 발밑에 무언가가 생기는 건지.

디멘션 커넥터로 확인해보니 시간은 벌써 10시를 넘겨, 온도는 영하 20도까지 떨어진 상태였다. 아마 이곳에서 저런 옷을 입고 있었다면 당장에 얼어죽어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트리슈 네글리제 예쁘지 않아?”

“…. 아니.”

“좀 더 봐도 좋다고? 흔치 않은 기횐데.”

“고맙지만 됐어.”

“진짜 가슴, 만져보고 싶지 않아?”

“잠이나 자자.”

“…. 하아, 재미없어.”

계속된 거절에 지쳤는지 트리슈는 핏, 하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뒤쪽에 이불이 뒤척여지는 듯한 감각이 느껴져 나는 뒤를 힐끔 봐 트리슈가 누운 걸 확인했다.

눈짓으로 넬을 부른다.

- 3시에 좀 깨워줄 수 있어? 주변 감시도 좀.

가까이 다가온 그녀에게 메시지로 의사를 전달. 넬은 그걸 주욱 읽더니 이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믿고 맡기자고 생각한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을 떴다.

“….”

방은 완연히 어둠에 잠긴 채였다.

머리가…. 띵해.

나는 약간 멍한 채 천천히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팔다리에 제대로 혈액 순환이 되질 않는 걸 느끼며 나는 가볍게 기침을 했다.

푹 자다 못해 아예 뻗었었군.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약간 당황한 듯, 내게 손을 뻗은 자세 그대로 굳어져 있는 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넬….”

약간 쉰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니,

“아주 잘 주무시던데요.”

넬은 짓궂게 웃으며 나와 눈을 마주쳤다.

“몇 시지?”

“새벽 2시 55분이요.”

단숨에 대답한 그녀가 이내 시선 한쪽에 떠올라있던 2:55라는 숫자를 가져와 내게 보여주었다. 가끔이지만 이 녀석은 내 디멘션 커넥터를 제멋대로 다룰 때가 있다.

밖은 완연히 어둠에 잠긴 채였다.

“….”

잠시 심호흡을 통해 뇌를 되살려냈다. 아까 전의 전투가 신체에 대미지를 남긴 걸까. 허리 뒤쪽이 욱신거리며 아파왔다. 하지만 나는 일어서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되새기며 천천히 침대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트리슈는, 아직 잠들어 있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재킷의 기동 상태를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그리고는 내가 누워있던 자리 바로 앞에 있는 창문으로 가 조심스럽게 잠금장치를 풀었다.

“어디 가?”

바로 그 순간,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깜짝 놀란 뒤, 슬그머니 뒤를 돌아보자 자리에 누워있는 트리슈의 모습이 보였다. 여성스러운 굴곡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네글리제와 정돈된 머리카락이 보였다.

설마, 안 잔건가.

“잠깐 화장실….”

“거짓말.”

“그냥 자고 있어.”

“안타깝게도 아까 전에 실컷 자둬서 말이야.”

내가 약간 만류하듯 말했으나 트리슈는 고개를 내저으며 일어서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는차가운 얼굴로 날 바라보며 다리를 꼬았다.

“어디 가는 거야?”

“…. 뭐어.”

왜 말이 잘 나오질 않는 걸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트리슈의 안색을 살폈다. 무슨 이유에선지는 모르겠지만 불쾌하다는 듯 굳어진 얼굴을 한 채 나를 응시하는 트리슈.

“의심하고 있었던 거지?”

하지만 이내 요염하게 미소를 지었다.

괜찮은, 걸까?

“아, 응.”

“그래서 조사를 하러 가겠다. 그런 거잖아?”

“뭐 그렇지.”

나는 뭔가 흥미롭다는 듯한 기색을 띄는 그녀의 눈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의, 살기에 가까웠던 표정이나 태도는 단순히 놀리기 위한 것이었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니,

“저기, 오빠….”

트리슈는 고개를 푹 숙였다.

“아니, 이준 씨.”

“…?”

“나랑 지금 장난하자는 거야?”

분위기가 다시금 차갑게 굳어졌다.

뒤를 이어, 겁을 먹은 듯 굳어져 있던 넬이 디멘션 커넥터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난 이레 그녀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던 트리슈는 이내 다시금 독기를 담은 눈으로 날 노려보았다.

“아침에, 왜 안 깨웠던 거야?”

“뭐?”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주 화려하게 싸우셨던데.”

“아니 그건….”

갑작스레 나온 이야기에, 나는 차이나칼라가 당기는 걸 느꼈다. 하지만 뒤를 이어, 자리에서 일어선 트리슈가 나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기차역에서도 그렇고, 뭔가 이상한데.”

“신경과민이야.”

“아쉽게도 이런 쪽으로의 감은 틀린 적이 없어서.”

“아니라니까.”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으면서도 나는 식은땀 흐르는 걸 느꼈다. 하지만 트리슈는 의심하는 눈초리를 거두지 않은 채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트리슈는 지금…. 안 좋은 생각이 드는 걸?”

“그건, 오해야.”

나는 애써 진지한 얼굴을 한 채 중얼거렸다. 하지만 트리슈는 거기에 반응을 하는 대신 가까이 다가와 내 멱살을 움켜쥐었다. 더없이 날을 세운 채로.

“들었지?”

“뭘….”

“시치미 떼지 마!”

버럭 소리를 지르는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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