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편
<-- Chapter 3 : 선율의 기사 -->
“….”
아니, 모습을 드러냈다는 모습은 이상하려나.
‘만들어지고’ 있었다.
톱니바퀴가 돌아가며 거대한 왕궁이 지하로부터 솟아올랐다. 그리고 뒤를 이어 잘 포장된 도로와 첨탑, 조그마한 집들 같은 게 모습을 드러냈다. 영화 촬영 따위에 쓰이는 세트장이 만들어지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분명 옛날 드라마에서 이런 걸 봤는데….
“주인님!”
그렇게 생각하며 당황하고 있자니 위쪽에서 주변을 감시하던 넬이 다급히 내 앞으로 내려왔다. 그녀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왕국의 모습을 본 걸까.
“저기, 이상한 게!”
“나도 봤어.”
“네, 넬은 한 눈 팔고 있지 않았다고요?!”
“…?”
“그다지 풍경에 심취해서 못 본 건 아니니까요!”
심취해 있었구나.
“뭐, 방금 만들어진 거니까.”
마치 지하에 잠들어 있던 고대 왕국이 모습을 드러낸 것처럼 말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넬, 저건 ‘실체’하는 거냐?”
“음…. 잠시만요!”
내 물음에 넬은 잠시 고민을 하더니 이내 왕국 쪽으로 휙 날아가 버렸다. 저럴 거면 굳이 먼저 날아갈 이유가 없지 않았나 싶던 나는 이내 잡고 있는 팔이 꾹꾹 당겨지는 감각에 트리슈를 돌아보았다.
“실체한다니?”
“아…. 뭐 합금으로 만들어진 건가 했지.”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간단한 대답이었지만 트리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그런 말이다.
기본적으로 이 게임은 가상에서 만들어지고 있지만 동시에 현실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정보량 송신 합금’이라는 오버테크놀로지의 부산물 덕이었다. 신호를 받으면 내부의 원자 구조가 뒤바뀌는…. 말도 안 되는 금속.
마치 신이 세상을 창조한 것처럼, 말이지.
“실체했다면 먹을 만한 게 있으려나?”
“넌 참 팔자도 좋다….”
나는 어이가 없어지는 걸 느끼며 중얼거렸다.
“왜애?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식사는 중요하다고?”
“그러시겠지.”
“흐규흐규…. 오빠 만약에 정해진 시간을 넘기면 귀엽고 예쁜 트리슈를 먹으려고 들 거잖아.”
“….”
“와, 요새 반응이 되게 싸늘해진 거 알아?”
“그러시겠지.”
“하지만 역시 얼굴이 되니까, 그 부분도 멋지네♡”
“그럴 리가 있냐.”
나는 얼굴이 빨개지는 걸 느끼며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니 쿡쿡 웃은 트리슈는 이내 내 팔을 당기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팔짱을 꼈다.
“타나 오빠, 부끄러워하니까 귀여워!”
“그럴 리가 있냐.”
“헤헤, 역시 오빠 놀리는 게 제일 재미있다니까?”
그만둬줬으면 좋겠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트리슈로부터 팔을 쓰윽 빼냈다. 부드러운 무언가에 끼어서(?) 평정심을 유지하기 힘들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여간 진짜….
“여기 놀러온 거냐.”
“그럼 놀러온 거지.”
“네 오빠가 지금 붙잡혀 있다고?”
“….”
그런 내 말에 트리슈가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그녀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날 바라보았다.
“만약 트리슈가 그걸 전혀 신경 안 쓴다면?”
“뭐?”
“왜? 이상한 걸까?”
“…. 트리슈.”
어쩐지 분위기가 차갑게 변했다.
그리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그런 트리슈의 반응을 어쩐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녀는 그런 식으로 일부러 자신이 나쁜 사람임을 어필함으로서, 내게 무언가 반응을 기대하고 있는 것일 터였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다.
그 이유를 들어버린 이상.
“가자.”
“…. 그래.”
내가 대답을 미루고 팔을 끌자, 트리슈는 조용해져서는 따라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은 채, 하지만 마음은 맞잡지 못하고 계속해서 걸었다.
그리고 도착했다.
“…. 후우.”
거대한 왕국의 앞에.
“주, 주인님!”
그 앞에 서있던 넬이 나를 발견하고는 스윽 날아들었다. 돌을 쌓아서 만든 벽과 나무로 된 성문을 바라보며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들어갈 수 있어?”
“으, 으음…. 잠시 기다리라던데요?”
“누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닫혀져 있던 성문에 구멍이 생기며 무언가 그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잠시 기다리라니까!”
“….”
다람쥐였다.
머리에 군모를 쓴.
“와아! 귀엽다아!”
“윽?! 으음…. 호오….”
그리고 뒤쪽에 서있던 트리슈가 휙 달려들어 다람쥐의 턱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순간 당황하는 듯 보였던 다람쥐가 이내 목 아래에서 골골대는 소리를 냈고, 나는 그런 모습을 약간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아니 근데, 분명 엄청난 위용의 성인데.
성벽의 크기는 10미터 즈음, 고원이라고는 해도 산악 지형에 지어져 제일 위에 있는 왕궁에 이르기 위해서는 다시금 산을 타야하는 구조의 성이었다.
그런데 이게, 다람쥐들의 왕국이라고?
“넬.”
“네넬!”
“혹시 엘레노어는….”
하지만 제대로 된 질문이 생각나질 않았다.
“위, 윗선의 생각은 넬도 잘….”
“너 그거 새 컨셉으로 밀기 시작한 거냐.”
나는 슬쩍 짜게 식은 얼굴로 넬을 노려보았다. 다시금 타이트스커트 정장에 안경까지 추가가 되어 커리어 우먼의 분위기를 늘씬 풍기고 있는 넬을.
“네, 넬 역시 일개 공무원에 불과하다고요?”
“월급도 받는 거냐.”
“네넬! 물론이죠!”
“….”
말을 말자.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성문 앞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제는 아예 바깥으로 빠져나온 다람쥐 병사는 트리슈의 어깨를 타고 오르며 즐거운 듯이 놀고 있었다.
“꺄하하?! 귀여워어!”
“호오, 호오. 여기 뭔가 부드럽고 따뜻한 곳이….”
“귀여워어!”
그 부드럽고 따뜻한 곳이 어딘가는 딱히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성큼성큼 다가간 나는, 트리슈의 그 부드럽고 따뜻한 곳에서 다람쥐의 꼬리를 붙잡고 떼어냈다.
“뭐, 뭐냐! 인간!”
“안에서 뭘 하고 있는 건데?”
“환영식의 준비다!”
“환영식…?”
나는 어이가 없어지는 걸 느끼며 물었다. 아까 기차에서는 왕국군인지 뭔지를 보내 실컷 사람을 고생하게 만들더니 이제는 환영식을 준비하고 있다고?
대체 뭐하는 놈들이야?
“헤에, 역시 이 세기의 아이돌이 되실 트리슈님을….”
“혁명가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혁명가라니?”
“그래! 저 부드럽고 따뜻한 혁명가를!”
“….”
그러니까, 이 녀석들은, 트리슈의 퀘스트를 혁명이라고 받아들이는 걸까. 열쇠를 망치로 벼려냄으로서.
“완전히 공산….”
“흐음, 그러면 멋진 환영회 같은 것도 해주는 거야?”
내 말을 툭 끊어내며 트리슈는 조심스럽게 다람쥐를 안아 어깨에 올려놓았다. 꼬리의 털을 고르는 동작을 취해보이던 다람쥐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왕께서 기다리고 계시지.”
“와아, 기대할게?”
트리슈가 웃으며 이야기하자, 고개를 끄덕인 다람쥐가 가볍게 어깨에서 뛰어올랐다. 그리고 다시금 성문 안쪽으로 모습을 감추는 녀석을 보던 나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는 퀘스트의 방향에 한숨을 내쉬었다.
“왜애? 재미없어?”
하지만 트리슈는 즐거운 눈치였다.
“받아들이기 힘들어서.”
“자기가 제안한 계약이면서.”
“그거랑 다른 문제잖아.”
“그런가?”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바로 그 순간, 지면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커다란 성문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트리슈에게 다시금 말을 걸려던 나는 이내 성문이 열리는 걸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안에서 팡파르가 들려왔다.
“….”
“와아! 역시 왕국답네!”
트리슈는 감탄했지만 나는 그 괴리감에 치를 떨었다.
수십, 수백만은 되어 보이는 다람쥐들이 길 양옆에 늘어선 상태였다. 그리고 웅장한 환영 음악 같은 게 들려오며 우리의 앞에 빨간 양탄자가 펼쳐졌다. 거기에 꽃가루가 흩날려 어서 들어오라는 분위기가.
“왕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문 앞에 서있던 다람쥐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외눈 안경을 쓴 박식해 보이는 이미지였다.
“넬은 이렇게 누군가에게 환영을 받으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어요!”
“흐응, 트리슈는 이런 거 익숙한데?”
“오오, 역시 트리슈님.”
앞장서 나아간 트리슈와 넬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안으로 들어섰다. 안에도 마찬가지로 평범하게 사람이 살 수 있을 법한 크기의 집들이 늘어선 상태였다.
사람이 있다는 건가?
아니면 그냥 단순히 게임의 연출 같은?
“어느 쪽도 마음에 들진 않지만….”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왕궁까지 길게 이어진 길을 두 사람을 앞장세운 채 걸었다. 옆을 열심히 달려서 쫓아오던 외눈 안경의 다람쥐가 말을 걸어왔다.
“그…! 왕의 앞에서는…! 케헥!”
“….”
좀 천천히 걸어줄까.
“이쪽으로.”
“아, 감사합니다.”
보다 못한 나는 다람쥐의 꼬리를 잡고 들어 올려 어깨에 태웠다. 길게 심호흡을 한 녀석은 이내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거, 늙으니 역시 체력이….”
“….”
“어, 어쨌든 왕의 앞에서는 경건하게. 이 점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러지.”
나는 적당히 대답했다.
그렇게 10분 정도 길을 걸어, 가파른 언덕을 오른 끝에 우리는 왕궁 앞에 도달했다. 비교적 모던한 느낌의…. 대항해시대의 영국 왕실 같은 느낌이었다.
“도무지 북쪽의 왕국은 아닌데.”
“응?”
“아니, 아무것도….”
트리슈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돌격소총을 무기로 쓰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크기라던가. 아니면 이 모던한 스타일의 왕궁까지. 컨셉 자체가 이어지질 않고 중구난방이라 괴상했다.
“왕께서 들라 하십니다.”
문지기가 이야기를 하고, 동시에 문이 열렸다.
어쩐지 이런 알현실은 전에도 본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며 붉은 양탄자 위를 걸어 안으로 들어가던 나는, 라쿠스 기사단에 대한 걸 떠올리고 입술을 가볍게 핥았다. 비슷한 느낌이긴 했다. 대리석으로 된 기둥이며, 안쪽에 있는 왕좌 같은 것들이.
“오, 이 자들이?”
문제는 그 안에는 다람쥐가 있다는 것이었지만.
“네, 폐하.”
“무릎을 꿇어라!”
“아니다, 되었다. 괘념치 말거라.”
무척이나 중후한 목소리였다.
수염을 길게 기르고 있는 다람쥐는, 조그마한 왕관과 망토로 몸을 두른 채였다. 종족(?)만 달랐더라면 기품이 묻어나오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굳이 사람이 아니더라도 사자나 호랑이…. 북극곰에 이르기까지.
왜 하필 다람쥐냐고.
========== 작품 후기 ==========
...
챕터 3의 히로인은 준우가 맞습니다.
후.. 브로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