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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크로맨서 재킷-124화 (124/321)

124편

<-- Chapter 3 : 선율의 기사 -->

“으음…. 음….”

버스가 종착지에 도착하자, 어깨에 기대어 있던 트리슈가 신음과 함께 천천히 눈을 떴다. 멍하니 그녀가 이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어라아? 왜….”

어쩐지 약에 취한 듯한 목소리였다. 나는 가만히 그녀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입을 다물고 기다렸다. 정차 중인 버스 기사는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는 듯했지만.

“오, 빠?”

“잘 자던데.”

“이상하네. 어제 많이 잤는데, 응? 무슨 일 있었어?”

“….”

나는 그 말에 대답 대신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니 트리슈는 아직까지도 졸린 얼굴인 채 내 뺨을 쿡쿡 찔러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그 얼굴이 흥미로 덮였다.

“헤에~ 뭔가 있었던 것 같은데?”

“아무 일도 없었다니까.”

“주, 주인니임….”

넬이 당황스럽다는 듯이 보았으나, 나는 무시하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두 시간 전까지만 해도 완전히 영화에나 나올 법한 상황 속에 있었지만, 굳이 설명할 필요를 느끼진 못했다.

당분간 재난 영화는 못 보겠군.

“자, 가자.”

버스 기사가 노골적으로 이쪽을 노려보는 게 느껴져, 나는 칼 같이 말을 끊어내며 트리슈의 팔을 잡았다. 녀석은 약간 의아한 얼굴로 나를 따라 일어섰다.

딱히 짐은 없었으므로.

가볍게 내리자 버스는 내부의 장치가 우는 듯한 소리를 내며 이내 멀어져갔다. 약간 지친 채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2시.

배가 고팠고 지쳤다. 두 번 말할 정도로 심하게.

“흐음~ 날씨 좋네!”

그런 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트리슈는 길게 기지개를 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해발 800미터 지점. 저 멀리 푸르게 뻗은 능선이 눈에 들어왔다. 5월의 날씨기 때문인지 적당히 춥다 싶은 정도였다.

여기서부터는 걸어서 올라가야만 했다.

“와아, 여기도 정말 멋지네요!”

“헤헤, 넬도 풍취를 아는구나?”

“놀러왔냐.”

나는 완전히 기뻐서는 눈을 반짝이는 넬과 트리슈를 슥 바라보고는 앞장서 나아가기 시작했다. 지도에 따르면 이쪽 방향으로 쭈욱 올라가면 나오는 듯한데.

“으음….”

잠깐 멈춰서 생각을.

오늘 안에 내려올 수 있으려나?

설마 조난 같은 걸 당하지는 않겠지. 재킷의 능력을 활용한다면 만에 하나 그런 상황이 오더라도 타계할 수 있을 테니까. 경찰 병력이 가끔씩 상주한다고 듣기는 했는데 그쪽도 걱정이 되기는 하군.

“아, 타나 오빠.”

“?”

약간 고민에 빠져 있던 나는, 트리슈가 부르는 소리에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뒷짐을 진 채 웃으며 서있던 녀석이 이윽고 말을 이었다.

“바로 올라가려고?”

“그럼?”

“뭐 먹을 거라도 사가는 게 낫지 않겠어?”

“….”

그럴 거였으면 여기서 내리는 게 아니었지.

애초에 하루에 두 번 다니는 버스인데 말이다. 나는 뭐랄까.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는 건지 단순히 여유를 부리는 건지 모를 트리슈를 짜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런가?”

“뭘 그렇게 즐거운 건지….”

“글쎄에.”

아니면 일부러 즐거운 척을 하는 건지.

“넬.”

나는 그런 녀석을 무시하고는 뒤쪽에 서있던 넬을 불렀다. 어쨌든 이런 때에 아서리안에 대해 나보다 지식이 많은 녀석의 의견은 들어둘 가치가 충분했으니까.

“왜 그러세요? 주인님.”

“굳이 이런 장소에 퀘스트를 배치해둔 이유가 뭐야?”

“고, 고객님. 저도 윗선의 생각은 잘….”

어색하게 웃은 넬이 타이트한 스커트 정장으로 휙 갈아입으며 내게 연신 사과를 했다. 머리까지 핀을 꽂아 딱딱하게 묶은 모습에 나는 무시하고 생각에 잠겼다.

“와아! 넬 너무 예쁘다!”

트리슈는 그렇지 않아보였지만.

“헤, 헤헤…. 감사합니다!”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달려든 트리슈의 모습에, 넬이 살짝 당황해 물러섰다. 활달하고 살가운 척을 하고 있음에도 나름대로 사람을 가린다는 걸까. 녀석은 내 등 뒤로 슬쩍 숨어서는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아니, 아니지.

퀘스트에 대해 생각을….

“다른 옷은? 다른 옷은 뭐 없어?”

“으음~ 이, 이런 거?”

뿅, 하는 효과음이 들리더니 넬이 너스 캡도 충실하게 갖춘 간호사 옷을 입었다. 트리슈는 눈을 반짝거리며 그녀의 손을(실제로 잡지는 못했지만.) 잡아보였다.

“와아, 역시 넬은 피부도 하얗고 머리 색이 예뻐서 그런지 무슨 옷이든 잘 어울린다니까!”

“그, 그런가요?”

“응! 정말로!”

“….”

그러니까, 음. 어디까지 생각했더라.

“혹시 좀 더 야한 옷은 없어?”

“네넬?!”

“에헤이, 대중이 원하는 건 섹스라고?”

“….”

분명 퀘스트의 위치가 왜 저기인지가 좀.

“음후후, 어디 한 번 볼까?”

“하, 하지 말아주세요! 트리슈님! 꺄아아?!”

“호오, 호오. 의외로 가슴이….”

“적당히 해.”

“아얏!”

나는 참지 못하고 트리슈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한창 넬을 희롱하던 녀석은 한 차례 소리를 내더니 이내 원망스러운 얼굴로 날 돌아보았다.

하지만 거기에 다시 미소가.

“뭐.”

“헤헤.”

“뭐?”

약간 불길한데.

“이제야 겨우 말렸구나 싶어서.”

“말려?”

“응, 오늘 아침에는 안 그랬잖아.”

“….”

역시 눈치를 채고 있었나.

“무슨 일 있었던 거야?”

하지만 거기에 대해 명확히 예상은 하지 못하는 걸까. 트리슈는 빙긋 웃은 채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물론, 나는 거기에 대답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과거의 일을 들었다고, 말할 수 있을 리가.

“아무것도 아니야.”

“아까 그 린슬렛 씨랑 어땠는데에?”

“…. 가기나 하자.”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넬을 돌아보았다. 녀석은 수치심을 느끼는 건지 얼굴이 빨갛게 물든 채였다.

“넬, 위쪽에서 주변 감시 좀 해줄 수 있겠어?”

“가, 감사합니다! 주인님!”

감사할 것까지야.

내 말에 연신 고개를 숙인 넬이 이내 하늘로 도망쳤다. 거의 점이 될 정도로 높이 올라간 그녀를 보며 나는 이내 트리슈와 함께 걷기 시작했다.

“둘이 뽀뽀라도 한 거야?”

다시금 짓궂은 질문이.

“아, 아니거든.”

나는 얼굴이 빨개지는 걸 느끼면서도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더 놀림을 당할 걸 알면서도 한 대답이었지만, 뜻밖에도 녀석은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

“? 트리슈?”

“어…. 응?”

뭔가 이상한데.

“왜 그래?”

“아, 아무것도 아니야!”

뭔가 충격을 받았다 회복한 사람처럼 트리슈는 고개를 휘휘 내저으며 소리쳤다. 하지만 이내 입을 다물고는 조용해져 뭔가 풀이 죽은 사람처럼 내 뒤를 졸졸 쫓아오기 시작했다.

좋아, 이제 좀 생각할 시간이….

“젠장.”

하지만 신경이 쓰인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녀석의 조그마한 손을 덥썩 잡았다. 평소에 보여주는 모습과는 달리 트리슈의 손은 살짝 차갑게 식은 상태였고 부드러웠다.

“어…?”

“계약이잖아.”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커다랗게 된 눈동자, 그 밑의 볼이 붉게 물들었다.

“으, 으응!”

그러더니 내 손을 마찬가지로 꾹 쥐었다.

“저기, 저기 오빠!”

“왜.”

“트리슈를 어떻게 프로듀스해준다는 거야?”

“…. 돌아가서 이야기하자.”

“지금! 지금!”

“하아.”

좀 생각을 해보려고 했더니.

그렇게 나는, 신이 나서 잡은 손을 붕붕 휘두르는 트리슈에게 반쯤 이끌려 높은 산악을 걷기 시작했다.

이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가끔씩 생각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이 아서리안이 유저를 놀리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었다. 의도된 사항이라면 무척이나 분통이 터지겠다 싶을 정도로.

지난 번, 랜슬롯 퀘스트 때도 그랬다. 그때는 너구리가 주된 NPC 캐릭터로 등장해 아이젠하워니 뭐니 하면서 진지한 얼굴로 퀘스트를 주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린슬렛을 포함한 에스콰이어들은 그걸 신경 쓰지 않았다.

뭔가 이유가 있는 것일까.

“라쿤 군락이라고 했던가….”

“응? 그게 뭐야?”

내게서 한참동안 설명을 듣고 만족하는 모습을 보이던 트리슈가 물었다. 꽤나 오랫동안 걸었으나 지치는 기색은 없어 피크닉이라도 나온 분위기였다.

“지난번 퀘스트 로그가 그런 식이어서.”

“으엑…. 재미없어.”

“내가 말한 게 아니야.”

“이 게임 로그가 좀 이상하긴 해.”

쓸데없이 말장난을 하거나 뭔가 헛소리에 가까운 질문을 던지거나. 나는 그게 어쩌면 ‘그레일’이라는 남자의 의식이 반영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재미있잖아?”

“….”

“왜?”

“아니 넌, 재미있어서 하는 건가 해서.”

“으음, 예전에는 그랬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트리슈는 그렇게 이야기하고는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이용하는 거지. 이게 내 삶에 도움이 되도록.”

“그건 참….”

“실제로 좋은 인맥을 만날 수 있었잖아? 그건 트리슈가 트리스탄이기 때문에 그런 거고.”

아무렇지도 않게 중얼거린 녀석은 이내 기대에 찬 눈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의 일을 겪은 이후, 트리슈는 이 게임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게 된 것일까.

“김서연 씨라면 유명한 패션 잡지 편집국장이잖아! 젊었을 때는 해외 컨퍼런스에 초청 받을 정도의 슈퍼 모델이었고! 역시 기업 회장이라서 그런가? 인맥 최고네!”

“그, 러냐?”

전혀 들은 적이 없는 이름이다.

“응! 오빠도 알지? 아름다워지고 싶은 20대 여성들에게는 교양서적과도 같은 잡지! 레드 립스!”

“….”

아니 그러니까 들어본 적 없다고.

“에엑? 정말? 레드 립스. 여자를 위한 색. 몰라?”

“응.”

“…. 유하 언니도 볼 텐데?”

“안 볼 걸.”

“으엑, 그런데도 피부가 그렇게 탱탱해?! 몇 살인데?!”

“스물다섯.”

“나, 나보다 세 살이나 많은데도?!”

“나보다는 두 살.”

“하아….”

트리슈는 어째선지 풀이 죽었다.

“뭐, 그런 사람이 어떻게 널 성공적인 아이돌로서 데뷔시킨다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방송 관계자한테 소개시켜준다고 하는 게?”

“그러려나.”

그쪽은 전혀 모르니.

나와 트리슈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마찬가지로 계속 피크닉이라도 온 듯한 분위기인 채. 시야 구석에 표시되는 위치는 벌써 해발 1,000미터를 넘어섰다.

“슬슬 보일 때가 됐는데….”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지도가 가리키는 위치를 눈살을 찌푸린 채 살펴보았다. 3킬로미터 정도 거리가 남은 상태라 분명 육안으로 식별이….

“어?”

옆에 있던 트리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뒤를 이어 나 역시. 갑작스럽게 시야 너머로 눈발이 세차게 불기 시작하더니 무언가 모습을 드러냈다.

방대한 벽에 둘러싸인 왕국이.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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