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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크로맨서 재킷-120화 (120/321)

120편

<-- Chapter 3 : 선율의 기사 -->

준우는 인상을 찌푸린 채 독방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차가운 공기에 몸을 떨며 그는 고개를 들었다.

창살 반대편에 남자가 손을 내밀고 있었다.

“….”

디멘션 커넥터를 종료, 이후 종료 과정이 끝나기 전에 뽑아 건네주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그마한 장치를 주머니에 넣고는 돌아섰다.

맨눈으로 세상을 보며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좁은 독방은 몸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침대가 전부인 심플한 구조였다. 바깥에서 안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어 별다른 수상한 일을 하기도 어려운 곳.

즉, 상념이 계속해서 떠오른다는 것이었다.

준우는 천천히 손을 들여 오른손을 들여다보았다. 손가락을 미세하게 움직이려고 할 때마다 무언가 걸린 것처럼 삐걱거리며 마비 증상이 찾아들었다.

치료할 수 없지는 않을 터였다.

애초에 내장 손상도 몇 시간 만에 복구가 가능한 것이 아서리안의 기술력이었다. 신경 세포의 복원 또한 어렵지 않게 이루어낼 수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왜, 무슨 이유로 아서리안은 이 손이 치료될 수 없다고 이야기를 했는가.

거기에서 준우는 무언가 거대한 흐름을 예감했다.

트리스탄, 랜슬롯, 가웨인.

마지막으로 외팔의 기사, 베디비어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단순한, 그리고 더없이 편협한 정보를 기초만으로 퀘스트가 만들어져, 게임 상에 있는 자신들이 ‘선택되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그래서 망설였다.

트리스탄이 망가진 것처럼,

랜슬롯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모든 걸 버린 것처럼.

자신 역시, 그렇게 된 게 아닐까 싶어서.

외팔이었기에, 베디비어로 선택된 게 아닐까 싶어서.

“후우….”

그렇다면 그는 어떤 기사인 걸까.

무모하고, 저돌적이며…. 사실은 그 누구보다도 상냥한, 스스로를 ‘망자’라고 칭하는 남자는.

머릿속이 복잡한 건 사라지지 않고, 준우는 한동안 벽에 기대어 앉은 채 움직이질 못했다.

가웨인은 아마 섣불리 준우를 건들진 못할 터였다.

녀석이 재킷을 제거당해 기억을 잃는다면 베디비어라는 기사의 존재나 퀘스트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최악의 경우에는 베디비어라는 기사 자체가 사라지며 성배의 존재 자체도 말소될 수 있다.

물론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최악의 경우였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가웨인이 그걸 피하리라는 생각을 했다. 할 킬러즈가 단순히 게임을 유지하려는 것과는 달리, 녀석에게는 목적이 있었기에.

나와 결판을 내겠다는.

“…. 빌어먹을 자식.”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지하철에서 내렸다.

“주인님, 잠을 못 자면 흉폭 해지시는군요.”

“아니거든.”

가볍게 쏘아붙이자 옆에 있던 넬이 가볍게 어깨를 떨었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상으로 올라갔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건 사실이었지만 어쨌든 그것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넬, 북쪽으로는 가보는 게 처음이라 신기해요!”

“항상 눈이 쌓여있는 곳이라고 하던데….”

신나 보이는 넬의 모습에 개마고원이라는 목적지를 되새긴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재킷은 방한 기능이 좋다 못해 완벽했으므로 얼어 죽지는 않겠지만,

“가서 따뜻한 국물 요리가 먹고 싶어요!”

“자고 오게 되려나.”

넬의 이야기에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물론 퀘스트가 길어진다면 자고 올 수밖에 없겠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이른 시간에 약속을 잡은 것이었다. 하지만 역시, 지리적 환경을 생각하자면 어쩔 수 없으려나.

모드레드가 준우를 구출할 준비를 하는 동안 퀘스트를 진행해두는 것이 좋겠다는 결정이었으니, 지금 와서 이것저것 생각해봤자 별 수 없었지만.

일찍 도착해 새벽에 가까운 시간이었고, 사람들이 무척이나 많았다. 사람이 많은 곳이기 때문일까. 곳곳에서 형식상의 경비를 서는 할 킬러즈의 요원들이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발견했다.

“린슬렛.”

깃 부분에 털이 달린 재킷을 입은 귀여운 외모의 소녀. 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티티! 일찍 왔네? 넬도.”

“린슬렛님! 일찍 오셨네요!”

“음~ 나는 엄마가 데려다주셨거든.”

“어머님이?”

내가 묻자 린슬렛은 짓궂게 웃었다.

“응, 친구하고 여행 간다고 거짓말했지.”

“그, 그렇구나.”

“사실 적당히 알아차렸겠지만.”

그렇게 중얼거린 그녀는 볼을 붉게 물들인 채로 웃었다. 이쪽을 올려다보며 염색한 금발을 가볍게 매만진 린슬렛은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 있어?”

역시 들켰나.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니 린슬렛은 눈썹을 찌푸린 채 날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뭔가 있는데?”

“배고파. 밥이나 먹자.”

“그럴까?”

발렌타인과 트리슈가 언제 도착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약속 시간까지는 30분 이상이 남은 상황이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손을 잡는 린슬렛과 함께 몸을 돌렸다.

“…. 일찍 도착했네?”

그리고 트리슈와 마주쳤다.

나는 순간적으로 어제의 일을 기억해내고는, 숨이 멎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아, 응.”

저도 모르게 어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몸의 굴곡을 그대로 드러내는 원피스에 스타킹. 머플러를 두르고 있는 모습이었다. 진한 녹색에 가까운, 약간 펌을 한 헤어가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그쪽이야말로”

린슬렛이 싸늘한 목소리를 내며 내 손을 꾹 잡았다. 슬쩍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트리슈의 시선이 맞잡은 손 쪽으로 향했다. 그녀는 순간 눈살을 찌푸렸으나,

“그럼 밥이나 먹을까아~?”

이내 반대편에 달라붙어 내 팔짱을 꼈다. 린슬렛의 얼굴이 분노로 새빨갛게 물들었다.

“다, 당장 안 떨어지지 못해?!”

“왜애? 오빠랑 나랑 친한데. 그치이?”

“하아….”

“아 맞다! 넬도 안녕?”

“아, 안녕하세요오….”

“?! 너, 너어 이 여자한테 우리 넬까지…!”

“아니.”

우리 넬이라니 무슨 자식 말하는 것도 아니고.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는데에~.”

“네, 넬! 정말이야?!”

“정말이지? 넬~. 우리 그 날 되게 케미 좋았잖아.”

“정말이야?! 대답해, 넬! 날 놔두고!”

“넬은 잠시 들어가 있겠지 말입니다….”

두 사람의 등쌀을 이겨내지 못한 넬의 모습이 사라졌다. 혼자 두고 도망치는 녀석의 모습에 살짝 원망스러운 기분이 들었으나, 이내 양쪽에서 팔이 당겨졌다.

“놔! 이거!”

오른쪽의 린슬렛.

“왜애? 둘이 사귀는 거야?”

왼쪽의 트리슈.

“그, 그건 아니지만!”

“어머나, 그러면 왜 질투하는지 모르겠는데에.”

“그으으으으으으읏….”

“오빠, 트리슈는 햄버거 먹고 싶은데.”

“아침에는 국밥이지!”

의외로 아저씨 같은 입맛이군요. 린슬렛님.

“뭐 먹을 거야, 티티!”

“그래~ 오빠가 선택해. 물론, 햄버거겠지만.”

“….”

두 사람이 고개를 휙 돌려 선택을 종용하자, 나는 순간 국밥에 햄버거를 말아먹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결국 협상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멀리 있는 푸드코트에 가서 각자 먹고 싶은 걸 먹었다. 하지만 결국 내가 뭘 먹겠느냐며 다시금 두 사람 사이에 싸움이 붙어서….

“속이 니글거려.”

나는 별로 먹고 싶지도 않던 돈가스를 먹어야만 했다. 탁한 기름에 튀겨서 최악의 맛이었다.

“아~ 역시 아침은 햄버거지!”

한껏 패스트푸드를 즐긴 트리슈가 기지개를 펴며 기뻐했다. 잠시 그 모습을 어이가 없다는 듯이

“그런 걸 먹고 힘이 나겠어? 사람이.”

“흐음, 트리슈는 누구와는 달리 서구형 몸매기 때문에, 그런 식단이 비교적 더 잘 맞는데?”

“여, 여기서 그게 왜 나와!”

“글쎄에?”

앞으로 슬쩍 나아간 트리슈가 한 바퀴 몸을 돌린 후 모델처럼 멋진 자세를 취해보였다. 분한 듯 주먹을 파르르 떨고 있던 린슬렛이 이윽고 울먹이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뭐, 뭐라고 좀 해줘! 티티!”

“….”

뭐라고 하면 될까.

“타나 오빠도 서구형이니까 이해하지?”

“트, 트리슈….”

요염하게 웃으며 가까이 다가온 트리슈가 슬며시 내 가슴에 손을 올렸다. 평소라면 단박에 쳐냈겠지만, 나는 어쩐지 몸이 굳어지는 걸 느꼈다.

트리슈에게 화를 낼 수가 없었다.

“…? 오빠?”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다물고 있자니, 트리슈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장난기가 가득하던 얼굴에 약간 의혹이라는 분노가 감돌 무렵, 우리 사이로 린슬렛이 손을 쓱 내밀었다.

“잠깐, 여기서 기다려.”

그리고 린슬렛은 내 손을 잡았다. 반대편에서 멍하니 있던 트리슈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 뭐?”

“화장실 가자. 티티.”

“뭐?”

나 역시 비슷한 반응을.

그러거나 말거나 진지한 얼굴로 날 쓰윽 바라본 린슬렛은, 이내 손을 잡고 어디론가 끌고 가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려 멀어져가는 트리슈와 린슬렛을 번갈아 바라보던 나는, 이내 가볍게 숨을 삼켰다.

“아니 너, 잠…!”

성큼성큼 걸어, 당당하게 나를 끌고 간 린슬렛이 곧바로 남자 화장실로 들어섰던 것이다. 안에는 남자들로 가득했고 나는 당황해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조용히 해. 들키잖아.”

하지만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게 중얼거리고는 나를 끌고 칸막이 안으로 들어섰다. 이미 모든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던 터라 철커덕, 하고 잠금 쇠가 걸리는 소리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드는 걸 느꼈다.

“왜 그래?”

그리고 그녀는 물었다.

거리가 가까워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서는 린슬렛을 내려다보았다. 분명히 눈앞의 여자와는 키 차이가 20센티미터도 더 넘게 났지만, 나는 왠지 모를 압박감에 뒤로 물러섰다. 종아리 중간쯤이 변기에 닿았다.

“오늘 아침의 티티는, 명백히 어딘가 이상해.”

“아무것도….”

“나한테도 말 못하는 거야?”

약간 슬픈 기색이 느껴지는 목소리.

걱정을 끼쳤다는 자각이 들어, 나는 멍하니 린슬렛과 눈을 마주쳤다. 슬쩍 어깨를 잡히고 자리에 앉자니, 린슬렛은 부드럽게 웃으며 얼굴을 가까이 해왔다.

“….”

입술이 맞닿았다. 혀가 감겨들어, 나도 어느덧 린슬렛의 허리에 손을 올린 채 자연스럽게 키스를 했다. 좁은 칸막이 사이에서 그녀가 어느덧 내 위로 올라탔다.

“키스할 기운은 또 있네?”

그리고 약간 아쉽다는 생각이 들 때쯤 씨익 웃은 린슬렛이 떨어졌다. 그녀는 여전히 내 위에 올라탄 채 짓궂은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으음….”

“역시 티티도 남자라는 건가?”

“여, 여기서 그게 무슨…!”

“응? 기분 안 좋았어? 난 좋았는데.”

“모, 몰라 인마….”

약간 부끄러워 시선을 피하자니 린슬렛이 이내 나를 훅 끌어안았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들려, 나는 그녀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듯했다.

“괜찮아, 잘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그녀는 상냥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

“트리슈를 도와주고 싶은 거잖아. 맞지?”

“그걸, 어떻게….”

“하아, 저기요. 아저씨. 제가 발렌타인하고 친하다고 예전에 말하지 않았던가요?”

“그, 그랬지.”

나는 속을 훤히 꿰뚫는 듯한 그녀의 말에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발렌타인과 친한 사이인 만큼 그녀는 어림짐작을 할 만한 이야기는 들었던 것일까.

“그리고 티티라면, 분명히 도와주고 싶어하겠지.”

“내가?”

“응, 겉으로는 무뚝뚝한 척, 온갖 귀찮은 척은 다하는 주제에, 사실은 누구보다….”

얼굴이 붉어진 채 말을 이어나가던 린슬렛이 이내 입을 다물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니 이내 눈을 가늘게 뜬 린슬렛이 불만이 섞인 얼굴로 내 뺨을 꼬집었다.

“아야야얏?!”

“아니 그러고 보니까 내가 왜 트리슈 좋은 일을….”

“뭐, 뭐어?!”

“몰라, 티티 잘못이야.”

나는 영문을 모른 채 계속해서 볼을 꼬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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