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편
<-- Chapter 3 : 선율의 기사 -->
◇
머리가 아팠다.
더욱이 어제의 기억도 희미했다.
“….”
뭐지.
나는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다 이내 삐걱거리는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머리가 지끈거렸고, 목이 무척이나 말랐다. 나는 멍하니 침대 위에 앉아서는 고민에 빠져들었다. 분명 정현 씨에게서 술을 건네받았던 것까지는 기억이 났는데 정신을 차리니 이곳이었다.
“넬.”
“네넬~ 주인님. 일어나셨어요?”
쉰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자 허공에서 넬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가 계속 지끈거려 나는 인상을 찌푸린 채 녀석을 바라보았다.
“어제, 무슨 일 있었냐?”
“….”
넬은 대답하는 대신 시선을 피했다.
“?”
“넬도 술에 취해있어서 잘 모르겠는데요오….”
“무슨 소리야. 너 술 못 먹잖아.”
“데이터로 된 술이 있거든요.”
“뭐든 데이터만 붙이면 다 되는 줄 아냐.”
“그럼 인터넷 술.”
“….”
“네트워크 술?”
포기하자.
나는 끙끙 앓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궁금증이 커져 일단은 유하에게 상황을 더 물어보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워 바깥으로 나갔다.
그리고 1층으로.
아니 으, 맞다. 쓰레기를 치워야….
눈앞에 표시되는 시간은 아직 새벽 여섯 시였다. 일어나는 시간이 길들여졌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서둘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가파른 계단을 타고.
“일어나셨어요. 준?”
그리고 유하가 있었다.
“….”
엄청나게 호화로운 밥상을 차려둔 채.
“유, 유하?”
“말씀하신대로 식사는 준비해뒀어요.”
“말씀하신대로…?”
“네, 준께서 여섯 시에 일어나겠다고.”
내가 그랬단 말인가.
아니 술에 취했던 난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어젯밤의 준이 너무나도 격렬해서…. 하마터면 시간에 맞추지 못했을 것 같았어요. 아아….”
내가 스스로의 하이드와 같은 일면에 당황하고 있자니 유하는 얼굴을 붉힌 채 볼을 감쌌다. 나는 약간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어제 뭘?”
“괘, 괜찮아요! 분명히 그, 정신적으로만 통했으니까.”
“….”
아니 어쨌든 했다는 거잖아.
“내가, 뭘 했어?”
“구, 굳이 그걸 제 입으로 설명 드려야하나요…?”
“미안, 부탁해.”
어쩐지 마주해야할 것 같았다.
내가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하자 유하는 잠시 머뭇거리며 망설였다. 긴 치마 위로 슬쩍 손을 포개, 어쩐지 요염하게 몸을 흔들던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 제 옷을 모두 벗긴 후에 몸 앞쪽에는 꿀을, 뒤쪽에는 크림을 바른 후 3일 굶은 곰처럼….”
“미안 거기까지 해줘.”
아무래도 자살을 해야 할 것 같다.
“그, 그럴까요? 일단 식사하세요. 전 쓰레기를….”
“아니, 아니 됐어.”
“준?”
“미안, 어제 좀 많이 취한 것 같아.”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유하의 팔을 잡고 당겨 함께 식탁 앞의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눈을 마주보며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음, 그…. 차려준 건 정말 고마워. 맛있게 먹을게. 하지만 쓰레기나 오전에 가게는 내가 볼 테니까. 유하는 올라가서 좀 쉬어.”
“…. 준.”
“알았지?”
내가 애써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했지만,
“피이.”
유하는 볼을 부풀리며 시선을 피했다.
“유, 유하?”
“어제의 단호한 준도 멋있었는데….”
“그, 그러니까 그건….”
“하지만 괜찮아요. 지금의 준도 멋있으니까.”
그 말에 나는 얼굴이 빨개지는 걸 느꼈다.
“후후, 배려는 감사히 받을게요.”
평소라면 그러지 않겠지만, 유하는 내 죄책감으로 얼룩진 얼굴에 쉽사리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는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서 2층 쪽으로 향했다.
“하아….”
어제의 난 대체 무슨 짓을.
그렇게 생각하며, 유하가 차려준 식탁을 보았다. 내가 좋아하는 각종 반찬을 비롯해, 해장에 좋다는 콩나물 북엇국까지. 솔직히 말해 이걸 제대로 차리려면 한두 시간으로는 부족했을 텐데.
어쨌든 감사히 먹는 게 최선이겠지.
“아, 준?”
그렇게 생각하며 숟가락을 들자니, 뒤쪽에서 유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고 2층으로 가는 길목에 서있던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저, 혹시….”
“응.”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이자니,
“다음에는, 술 언제 마셔요…?”
그녀는 그런 이야기를 내게 건넸다.
“…. 올라가서 자.”
“네, 네에…♡”
내 이야기에 유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총총걸음으로 계단을 올라 사라졌다. 그 모습을 걱정이 되어 바라보던 나는, 이내 식사를 시작했다.
그야말로 환상적인 맛이었다.
◇
멍하니 손님이 오지 않는 카페를 지키던 중, 모드레드로부터 연락이 왔다. 나는 카운터에 앉아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는 그녀로부터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일단 접촉 루트는 확보해둔 상태입니다.]
“어떻게?”
[가상현실 공간을 통해서입니다.]
“….”
유능하군.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상을 통해서라면 딱히 정체가 드러나는 일도 없을 테고, 할 킬러즈의 눈을 속이기도 쉽겠지.
“그럼 어떻게?”
[1분 뒤에 그쪽으로 요청이 갈 것입니다. 그대로 승인해주시면 됩니다.]
“고마워.”
[일이니까 괜찮습니다.]
무뚝뚝한 목소리에 나는 쓰게 웃었다.
[혹시 모르니 대화는 되도록 10분 안에 끝내주셨으면 합니다. 현재 빼빼로 씨는 독실에 갇혀있는 상태기는 하지만, 주기적으로 간수들이 순찰을 돌 테니까.]
“알았어.”
[네, 기다려주십시오.]
그리고 전화는 끊어졌다.
길게 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선 나는, 카페를 관리하는 어플을 실행시켜 영업 상태를 ‘잠시 외출 중’으로 바꿨다. 그리고는 문을 잠근 뒤 바깥의 사람 눈에 띄지 않도록 안쪽의 소파 자리로 가서 누웠다.
그리고 잠시 기다리자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 빼빼로님의 가상공간에 접속하시겠습니까?
YES
승인을 한 나는 곧바로 의식이 멀어지는 걸 느꼈다.
그리고 눈을 뜨자 그곳은….
“사우, 나?”
사우나였다.
누런 나무로 된 벽. 내부는 수증기로 가득했다. 당황해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나는, 이내 천천히 걸음을 옮겨 문을 열고 다음 방으로 들어섰다.
“아, 타나토스님.”
그리고 한참 땀을 흘리고 있는 준우의 모습이 보였다.
“이거 네 취향이냐?”
내가 어이가 없어 묻자 녀석은 씁쓸하게 웃었다.
“좀 봐주세요. 계속 씻지도 못하고 묶여 있어서 온몸이 만신창이인데 이렇게라도 좀 벗어나고 싶다고요?”
“….”
뭔가 분위기가 묘한데.
녀석과 나, 둘 다 알몸으로 하반신에 흰색 타월 한 장만 달랑 걸친 채였다. 나는 어색한 분위기를 느끼며 녀석의 맞은편에 앉았다. 가상의 세계이건만, 텁텁한 감각에 숨을 쉬기가 불편하다는 게 느껴졌다.
“몸은 좀 어떠냐.”
내가 묻자 준우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나쁘지 않습니다. 가웨인님이 배려를 해주셔서.”
“….”
듣기만 해도 불쾌해지는 이름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반응을 본 준우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역시 가웨인님이 말한 대로군요.”
“그 녀석이 뭐라고 이야기했는데?”
“타나토스님과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정도만.”
“녀석과 내가 단순히 사이가 안 좋은 거라면, 발렌타인과 트리슈는 사이가 좋다고 말해도 되겠는걸.”
“그 정도인가요.”
“생리적으로 안 맞는 사이야.”
서로 양극단에 있는 사이다. 나는 그렇게 가웨인과 나의 사이에 대해서 생각했다. 가상과 현실과 그 경계를 대하는 태도가 내가 가장 싫어하는 쪽이었던 것이다.
마치 아서리안과 같은 녀석이다.
가상을 매개체로 현실을 농락하려는….
“뭔가 들은 모양인데.”
내가 그렇게 묻자 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부.”
그렇다면 녀석은 어떨까.
나는 잠시 눈앞에 앉아있는 준우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평소에 부드럽게 호를 그리는 눈, 덩치는 나보다 훨씬 컸다. 186인 이쪽이 왜소하게 느껴질 정도의 거구라고 해야 할까.
분명 좋은 녀석이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 이야기해본 적은 없다. 그리고 들어본 적도 없다.
김준우이자 빼빼로인 자가 왜 이 게임의 유저가 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어쩔 생각이냐?”
“글쎄요. 모르겠습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서.”
그도 그렇겠지.
“할 킬러즈에서 저에게 그런 제안을 해오다니.”
“뭐?”
좀 다른 쪽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러자 준우는, 가볍게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말을 이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거든요. 그들이 현 사태의 해결에 적극적이지는 않을 거라고.”
“이유는…?”
내가 묻자 준우는 잠시 생각을 하다 입을 다물었다. 어쩐지 심각한 기색이어 나는 침착하게 대답을 기다렸다.
“긴 이야기지만, 짧게 이야기하겠습니다.”
“내가 들어도 될까 싶군.”
“괜찮습니다. 트리슈를….”
그리고 입을 다문 녀석은,
“아니, 시우와도 관련이 있는 이야기니까요.”
역시 그쪽인가.
들어도 될까 싶었던 터라 나는 입을 다물었다. 트리슈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계속 궁금했다.
세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이 일은, 저희 남매가 발렌타인님을 만난 날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그리고 준우는 천천히 과거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