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편
<-- Chapter 3 : 선율의 기사 -->
“지금 상황을 설명해봐. 내가 널 죽이기 전에.”
“…. 아야.”
“고작 그거 가지고 엄살이야? 네 앞에 누워있는 사람은 온몸의 뼈가 다 박살이 났는데?”
“하, 너나 타나 오빠나 둘 다 사람 뺨 때리는 걸 좋아하는 성격인지는 내가 잘 몰랐네.”
“이게 진…!”
“린슬렛.”
린슬렛이 다시금 허공에 손을 치켜들자, 나는 침착하게 목소리를 냈다. 한 번 멈칫하고 뒤를 돌아본 린슬렛이 이내 눈물을 글썽거리며 눈을 마주쳐왔다. 그리고 뒤에 있는 트리슈도 놀라 눈을 크게 뜬 상태였다.
“티, 티티이…!”
“아, 응….”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온몸에 감각이 사라져 마취제를 잔뜩 흡입한 듯했다. 나는 욕조 끝에 매달리듯 오는 린슬렛을 보며 대체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 고민에 빠져들었다. 궁금한 것투성이였지만 그보다 일단 참지 못하고 눈물을 뚝뚝 흘리는 린슬렛을 달래야겠지 싶었던 것이다.
“괜찮으니까.”
“흐에에엥! 이 바보 멍청아!”
“너 콧물 난다.”
“어…? 으, 저, 정말?!”
“거짓말이야.”
“왜, 왜 그런 장난을 치는 거야!”
네가 울고 있으니까.
그런 말을 하기는 좀 부끄러웠던 터라, 나는 입을 다문 채 손을 뻗어 녀석의 눈가에 맺힌 이슬을 닦아주었다. 그러자 이내 약간 진정한 건지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린슬렛이 입을 열었다.
“어, 어떻게 된 거야?”
“할 킬러즈의 습격이 있었어.”
“설마….”
한 남자의 이름을 머릿속에 떠올렸는지 린슬렛이 눈썹을 찌푸린 채 물었다. 하지만 뒤를 이어 다가온 트리슈가 욕조 끝에 앉으며 가볍게 웃어보였다.
“몸은 좀 괜찮은 것 같네, 오빠.”
“저리 꺼져. 주먹 날아가기 전에.”
“…. 린슬렛, 진정해.”
싸늘하게 쏘아붙이는 린슬렛의 모습에, 나는 애써 제지하고는 트리슈를 바라보았다. 이쪽의 몸이 잠긴 검은 액체를 가볍게 두드리던 그녀가 말을 이었다.
“오빠가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렇군.”
“진짜, 어쩜 사람이 그렇게 미련….”
말을 이어나가던 트리슈는 이내 일어서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팔짱을 낀 채 얼굴을 닦아내는 동작을 취해보였다. 미움을 받고 싶어 하면서도 이쪽을 걱정하는 마음을 이겨내지 못하는 모습에, 나는 슬쩍 움츠리고 있는 트리슈의 어깨가 안쓰럽다는 생각을 했다.
“넬, 내 몸의 상태는 어때?”
하지만 일단, 그런 감정을 지켜주기 위해 나는 화제를 분산시켰다. 허공에 떠서 우리의 모습을 지켜보던 넬이 이내 눈앞에 팝업창을 띄워 살펴보기 시작했다.
“70%정도 회복되셨어요. 약간의 내장 손상이 감지되어서 그 회복 과정이 방금 막 끝났어요.”
“기절하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데?”
“여섯 시간정도요.”
“….”
그 짧은 기간에 내장 손상을 회복시키다니. 대단하다 못해 어이가 없어질 정도의 기술력이었다. 마치 서기 3,000년대에 와있는 듯한 감각에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천천히 욕조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티, 티티? 좀 더….”
“아니, 이 정도면 괜찮아.”
다행히 청바지만큼은 입고 있었던 터라 나는 약간의 통증을 느끼면서도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상체에 동그란 구슬처럼 달라붙어있던 액체들이 욕조 속으로 빠져 들어가며 이내 몸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았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넬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왔으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의 상태를 확인했다. 어딘가 부러진 곳은 없는 것 같았으니 재킷을 입으면 자동으로 조금씩 치유가 되겠지 싶었다. 그러고 있자니 기가 차다는 듯 코웃음을 친 트리슈가 빈정거리는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그러다 또 쓰러지면 이번에는 안 업어올 거야.”
“너 무슨 애가 말을 그딴 식으로…!!”
“그 두 사람이 붙잡혀 간 거지?”
다시금 짜증을 내려는 린슬렛의 말을 가로챈 나는 진지한 얼굴로 트리슈의 안색을 살폈다. 그 말에 시선을 피한 녀석은 곧이어 문 쪽을 바라보았다.
“아니.”
“그럼 어떻게 된 건데?”
“…. 왜, 지금 당장이라도 구하러 가려고?”
“그래야만 한다면.”
“이유를 모르겠네. 뭐 그렇게까지 하는지.”
차갑게 쏘아붙이는 목소리의 뒤에서 어딘가 감정을 참으려는 기색이 느껴졌다. 트리슈는 가볍게 인상을 찌푸린 채 시선을 피했다. 침묵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타, 타나토스님.”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서있는 여자의 모습에 약간 안도감이 드는 걸 느꼈다. 발렌타인이 분홍색 머리를 귀 뒤쪽으로 넘기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발렌타인.”
“괜찮으세요? 벌써 움직이셔도….”
“준우는?”
문이 닫힌 걸 확인한 나는 곧바로 그런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발렌타인은 한순간 크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이내 고개를 떨구며 내 질문을 피했다.
“체포됐어.”
“…. 젠장.”
그리고 이어진 트리슈의 대답에 나는 주먹을 꽉 쥐며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이내 의문이 들었던 터라 고개를 갸웃거리며 질문을 던졌다.
“왜?”
라고.
◇
키는 180을 훌쩍 넘겼다.
탄탄하고 넓은 어깨, 보기 좋게 잡힌 근육에서는 힘이 느껴졌다. 팔뚝에는 핏줄이 꿈틀거렸고 복근은 선명하게 초콜릿의 형태를 그렸다. 그리고 트리슈는, 그런 부분을 보게 되는 자신이 무척이나 싫어지는 걸 느꼈다.
그리스 조각상도 아니고 말이지.
외모는 한 층 더 어이가 없어 옛날의 영화배우처럼 생겼다. 무표정할 때는 섹시했고 웃으면 순수하고도 반항아적인 매력이 흘러넘쳤다.
“왜?”
그리고 그런 그가 질문을 던졌다.
“뭐가?”
트리슈는 그 의중을 진작 알아챘지만 일부러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이렇게 완전한 사람이 눈앞에 있다는 걸 인정하기 싫어서일까? 아니면 그에게 큰 빚을 졌다는 감각이 있어서일까? 그리고 그가 그런 게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행동하기 때문일까?
세 가지 모두 맞았다. 그래서 트리슈는 그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는 것이었다. 망가진 자신은, 그런 사람을 참을 수 없이 화가 났기 때문에.
스스로가 비루해지는 걸 느꼈기에.
“왜 우아랑이 준우만 체포한 건데?”
“그건….”
옆에 서있던 발렌타인이 침울한 목소리를 냈다. 좀처럼 대답할 기색이 없어 트리슈는 한숨을 내쉬고는 삐딱하게 벽에 기대어 섰다.
“동정한 거겠지.”
아니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동정했다니?”
“쓰러진 타나 오빠를 힐끔 보고는, 한 사람만 있으면 상층부의 의도를 알기엔 충분하면서 오빠를 데려갔어. 그게 동정한 게 아니라면 뭘까?”
동정한 게 아니었다.
그건 순수하게 감탄을 한 모양새였다. 우아랑은 쓰러진 타나토스를 보고는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긴 모양새였다. 아마 그가 기절하기 직전 말했던, 이게 현실이라는 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한 거겠지.
그래, 눈앞의 남자는 사람을 비참하게 만든다.
항상 곧은 눈으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유를 모르기 때문일까? 그것은 무척이나 괴상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타나토스는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타인이 뭐라고 하건 자신의 생각을 관철했다. 어떤 완전한 룰을 가진 채였다.
트리슈는 한순간 도망치려고 했던, 그리고 우아랑의 힘을 알자 곧장 전의를 잃었던 자신이 참으로 한심하게 느껴진다는 생각을 했다.
거기에 정신을 차리자마자 바로 구하러 간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뭐가?”
“오빠는 이제 끝났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고. 재킷이 박살나 이쪽 세계에 대한 모든 기억을 잃겠지.”
트리슈의 말에 발렌타인이 가볍게 숨을 삼켰다. 그러자 린슬렛이 다가가 위로하듯 어깨를 감싸안는 모습에 트리슈는 기가 차 헛웃음을 내뱉었다.
“글쎄. 그건 아닐 거라고 보는데.”
하지만 타나토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는 또 다시, 신념으로 가득 찬 눈으로 트리슈를 바라보았다.
“뭐…?”
“설득하려고 들겠지. 준우는 지금 베디비어 퀘스트를 진행하는 중이니까. 너한테 그랬던 것처럼 가웨인이 회유를 하려고 들 거야.”
“….”
트리슈는 그 말을 부정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자신 역시 가웨인에게 그와 같은 종류의 권유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에픽 퀘스트’의 특성 상, 그들은 쉽사리 준우의 재킷을 박살내려들지는 않을 터였다.
“그럼 어쩌려고?”
“일단은 준우에게 시간을 끌라고 전해두고…. 우리는 퀘스트를 진행해야겠지.”
“뭐어?”
이런 때에 무슨 소리야?
“구출은 내가 잘 아는 사람이 도와줄 거야. 그게 게임 속에서 이루어지는 건지,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건지는 물어봐야겠지만.”
“…. 어디 든든한 백이라도 있는 모양이네.”
말에 거침이 없다.
순식간에 플랜을 세워, 그걸 토대로 움직인다. 중간에 틀어지더라도 눈을 돌리지 않고 달려든다.
그 스스로 상처투성이임에도.
“이상한 사람.”
트리슈는 입술을 질끈 물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녀는 스스로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이, 단순히 잘생긴 남자의 근육질 몸매를 눈앞에 두었기 때문이라고 애써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