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편
<-- Chapter 3 : 선율의 기사 -->
◇
“…. 거기서 오른쪽으로 돌아!”
트리슈는 달리는 걸 멈추지 않은 채 눈앞에 떠오른 지도 화면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그러자 지도 위에 떠오른 두 개의 점이 오른쪽으로 돌아섰다. 카메라가 준우와 발렌타인의 뒤를 따르며 위치를 잡아 지도에 간략하게 표시를 해주고 있는 것이었다.
“하아….”
그녀는 길게 숨을 내뱉으며, 준우와 발렌타인을 추적하고 있는 두 개 점을 확인했다. 우아랑과 할 킬러즈의 요원 또한 마찬가지로 카메라가 뒤를 따르며 위치를 잡아주고 있는 것이었었다.
“칫!”
타나 오빠를 구하러 가야하는데…!
“멈추지 말고 계속 달려! 거리를 벌려야 돼!”
인상을 찌푸리며 소리친 트리슈는, 점들과 멀어지는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넬인지 뭔지 모를 네비게이터의 말대로, 그녀는 타나토스를 구하기 위해 배가 있던 공간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역시, 탈출은 요원하지 않아보였다. 일단 거리를 벌려야 하는 기본적인 조건조차 성립하지 않았기에.
기본적으로 할 킬러즈는, 국내에 있는 모든 네트워크망을 통해 디멘션 커넥터를 추적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디멘션 커넥터 자체가 본디 20년 전의 스마트폰으로부터 진화된 것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아서리안 또한 거기에 대비해, 에스콰이어가 게임을 실행할 때마다 방벽 프로그램을 함께 기동시키기는 했지만. 어쨌든 지금의 상황에서는 달리 그걸 통해서 헤쳐 나갈 길은 보이지 않았다. 그건 현실 속에서 에스콰이어를 숨기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었으므로.
“좀 더 빨리!”
트리슈는 그렇게 외치고는 눈앞에 펼쳐진 지도에 손을 올리고 양옆으로 쭈욱 잡아 늘렸다. 반짝이는 이펙트와 함께 반경 10km의 하수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빠, 속도를 더 낼 수는 없어?!”
[이게…. 한계야.]
준우의 목소리에서는 명백히 지친 기색이 느껴졌다. 도망치는 두 점과 그걸 뒤쫓는 두 점의 거리는 무척이나 가까웠으므로 육안으로도 충분히 보일 터였다. 트리슈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녀는 이성의 끈을 놓지 않은 채 귓속말을 해제하고는 감정을 터뜨렸다.
“붙잡혀가게 두지!”
저런 여자 따위, 그냥…!
트리슈는 그렇게 폭언을 내뱉고는 인상을 찌푸린 채 도망치는 점들을 바라보았다. 베디비어 퀘스트에 대해서 밝히며 도리어 문제가 커지고 말았다. 이제 우아랑은 두 사람 모두를 체포하러들 터였다.
“어째서…!”
트리슈는 배의 위치로 돌아가며 계속해서 짜증을 부렸다. 사람이 좋은 것도 정도가 있지…! 이제는 제대로 사귀는 사이조차 아니게 되었으면서! 그저 이 게임이라는 공간 안에서 서로의 존재를 용납하고 있을 뿐이면서!
차라리 도망칠까?
그리고 자리에 우뚝 멈춰선 트리슈는 상황이 복잡해지는 것에 그런 선택지를 떠올렸다. 뭐든지 퍼줄려고만 하는 바보 같은 친오빠와 거기에 빈대처럼 달라붙은 인생 최악의 여자. 그들을 이렇게 머리 아픈 걸 감수해가면서 지킬 필요가 있는 걸까?
“….”
하지만 다음 순간, 한 남자의 얼굴이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망설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역시, 할 킬러즈의 심기를 거스르는 짓을 하고 싶지 않아 점점 마음의 추가 기울어갔다.
“트, 트리슈님!”
바로 그 순간, 여자아이의 목소리와 함께 눈앞에 픽셀 조각이 뭉쳐지며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정색의 천 조각을 국부에 덧댄 복장, 하나로 땋아 묶은 흰색의 머리카락. 넬이라는 이름의 네비게이터였다.
“왜…?!”
트리슈는 짜증스러운 상태에서 갑자기 넬이 등장하자 살짝 날카롭게 물었다. 그리고 넬은 눈앞에 창을 하나 띄우고 트리슈에게 보여주었다.
“타나 오빠…?!”
화면 안에서 두 사람이 오수 위에 대치해선 상태였다. 해골 마스크를 쓴 잘생긴 남자와, 키가 2미터는 되어 보이는 바이크 헬멧을 쓴 대검의 사내.
타나토스와 라이오넬이었다.
“주인님께서 자기는 됐으니 빼빼로님과 발렌타인님을 도와 이곳을 빠져나가시라고…!”
“뭐?”
약간 어이가 없어지는 걸 느끼며 되묻자, 화면 안의 두 사람이 충돌했다. 뭉툭한 대검과 척추를 뽑아낸 듯한 검이 부딪치며 불꽃이 튀었다.
“어떻게든 한 방 먹여줘야겠다고 하시는데요….”
“이 바보가?! 상대는 공권력이라고!”
“그, 그게…. 주인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거라서….”
“공권력이?!”
“네넬….”
바보도 이런 바보가 없다.
트리슈는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이마를 짚었다. 지금까지 드문드문 이야기한 걸로 종합해보자면, 화면 속의 무모한 바보는 아서리안과 할 킬러즈의 관계에 대해서 알고 있다. 할 킬러즈가 어느 정도 일부러 에스콰이어들을 방치하고 있다는 걸.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심기를 거스르는 짓을 해봤자 좋을 게 없는데…!
“그, 그리고 방금 주인님이….”
“뭐래? 아니, 이거 당장 말려야 하는 거 아니야?!”
“트리슈님을 ‘믿겠다.’라고….”
넬이 불안한 기운을 애써 감춘 채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트리슈는 어쩐지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감각에 다시금 이마를 짚었다.
“계약 때문이라고 하던가, 정말!”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드는 걸 느끼며, 트리슈는 반대편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넬에게 가볍게 눈길을 보내자 따라붙어 그녀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타나 오빠에 대해서 계속 보고해줘!”
“네넬!”
“그리고…! 너, 네비게이터면 혹시 주변의 신호국의 전파 거리를 탐지할 수 있어?!”
“아, 네넬! 가능해요!”
“하고서 바로 내 쪽으로 전송해!”
반쯤 명령조로 소리친 트리슈는 점을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곧장 창을 몇 가지 소환, 허공에 피아노라도 치는 것처럼 한 손으로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
녀석은 내 조커에 대해서 알고 있다.
“크윽?!”
검의 풍압을 이겨내지 못하고 뒤로 물러서자 라이오넬이 그대로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능숙하게 검을 뒤로 당겨, 마치 성문을 부수는데 쓰는 충차라도 되는 것처럼 휘둘렀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었다.
나는 성문이 아니라고…!!
튕겨져 날아간 나는 필사적으로 중심을 잡아 반대편의 벽에 착지했다. 단 한 번 충돌했으나 팔이 저릿저릿해 제대로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어떻게 하지?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이었다.
조커를 알려져 버렸다는 것. 내가 지니고 있는 가장 심플하면서도 방도가 다양한 능력이라고 할 수 있는 망령 신체에 대해 녀석이 이해하고 있다는 것.
그렇지 않았다면 칼을 꽂고 두었을 리가 없으니…!
“너, 라이오넬이라고 했던가?”
“….”
내 물음에 녀석은 수면에 우뚝 멈춰 서서는 대검을 등 뒤로 꽂아 넣었다. 그리고 이내 천천히 손을 들어 헬멧의 입 부분을 두드리고는 손가락을 좌우로 내저었다.
말을 할 수 없다는 건가?
“재킷을 입고 있는데도 말이냐?”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다시금 검을 쥐고는 나를 향해 겨누었다. 2미터가 조금 안 되는, 폭과 두께조차 무시무시한 검이 허공을 갈랐다.
대충 이해했다.
“네가 무슨 저열한 이유로 가웨인, 더불어 할 킬러즈에 붙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알고 싶지도 않고,
“한 판 붙어보자.”
나는 그렇게 뇌까린 후 앞으로 튀어나갔다.
벽을 박차고, 순식간에 녀석이 가까워졌다. 어깨의 방패를 세운 나는 곧장 라이오넬의 복부를 들이받았다. 녀석이 거기에 얻어맞고는 뒤쪽으로 나가떨어졌다.
하지만 수면에 검을 박아, 녀석은 지익 끌리며 자리에 멈춰 섰다. 물리 법칙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듯한 장면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다시금 파고들었다.
아니, 이곳은 오수처리장이 아니었다.
용암이 들끓는, 산 위였다.
“큭…!”
갑작스레 열기가 몰려들었다. 바위가 갈라져, 그 사이로 용암이 분수처럼 치솟았다. 멀리서 화산이 치솟으며 용암으로 된 강이 흐르는 게 보였다.
- 스테이지 출현 : 활화산
그런 메시지와 함께 나는 다시금 녀석과 부딪쳤다. 검은 용암에 그을려 벌겋게 달아오른 상태로 가까이 닿기만 해도 뜨거웠다. 녀석이 자세를 바로 하기 전에 달려들어서 망정이었지, 만약 서로가 온 힘을 다해 부딪쳤다면 당연히 내가 튕겨져 나갔을 터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자식!!”
나는 거리를 계속 좁혀 인파이트를 시도했다. 붉은색으로 타오르는 ‘대지’에 발을 디딘 채, 자세를 바로하려는 라이오넬에게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이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자각이 들었다.
능숙하다…. 이 자식!
드는 것만으로도 벅차 보이는 대검을, 아무렇지도 않게 다루고 있다. 방벽처럼, 바닥에 댄 채 각도를 비틀어 들어오는 이쪽의 검을 아무렇지도 않게 막아냈다.
“큭…!”
단순히 그 거대한 힘을 휘두르는 게 아닌, 테크니컬하게 상황에 맞춰 변주하는 능력. 스킬이 아니라 단순한 신체 능력과 솜씨만으로 내게 맞서고 있다.
“…!”
그리고 다음 순간, 녀석은 박자를 맞춰 대검의 넓은 부분을 밀어냈다. 스파다가 튕겨져 팔이 들리는 걸 느낀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고,
“크헉!”
다음 순간, 밑으로부터 휘둘러진 대검에 겨드랑이 밑의 갈비뼈를 얻어맞았다. 방탄복을 입고 샷건에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뒤쪽으로 날아간 나는 곧바로 눈앞에 쇄도하는 라이오넬을 발견했다.
“빌어, 먹을…!”
나는 어깻죽지에 솟아오른 린슬렛의 방패로 녀석의 대검을 막아냈다. 바람이 우는 소리를 내며 라이오넬은 거대한 몸집에 어울리는 힘으로 날 몰아붙였다.
숨을 돌릴 시간을 벌어야…!
허공에 떠오른 채 몇 번이고 검을 막아낸 나는, 그런 생각을 통해 곧바로 망자를 소환했다. 뼈로 된 새가 비명을 내지르며 라이오넬을 향해 날아들었다. 라이오넬이 거기에 반응해 검을 뒤쪽으로 휘둘렀고,
“지금이다!!”
나는 녀석의 복부 깊숙한 곳까지 스파다를 찔러 넣었다. 팔에 확실하게 감각이 느껴지며, 나는 인상을 찌푸린 채 녀석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
라이오넬은 복부에 파고든 검을 바라보고는 이내 나와 시선을 마주치며 고개를 내저었다.
“뭐…?”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대검에 얻어맞고 뒤로 나가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