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편
<-- Chapter 3 : 선율의 기사 -->
◇
저택을 빠져나온 후 최대한 속도를 높여 가게로 돌아왔지만, 역시나 이미 한참 늦은 뒤였다.
“제기랄….”
나는 길게 욕지기를 내뱉으며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유하와 트리슈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카페 테이블에 마주 앉은 채였다. 선량한 유하가 아침에 트리슈가 일어나 나오자 자연스럽게 북엇국 같은 걸 끓여주는 광경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식사를 마친 지금은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도란도란 자매처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었으나, 유하에게서 알 수 없는 분노가 느껴졌다. 나는 어쩐지 등줄기를 통해 소름이 끼쳐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이내 마음의 결심을 마쳤다.
어쨌든 피할 수는 없기 때문에.
“넬, 만약 유하가 날 샷건 같은 걸로 쏜다면 그녀에게는 죄가 없다고 네가 경찰에 증언해줘.”
“…. 네?”
“부탁한다.”
“아니 그? 으? 그대로 들어가시게요?!”
“남자는 정면 돌파야.”
“으, 으음….”
뒤쪽의 넬이 머뭇거렸으나 나는 무시한 채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문을 벌컥 열고는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이 소리를 듣고는 내 쪽을 돌아보았다.
“아, 돌아왔…. 준?!”
“오, 오빠 얼굴이 그게 뭐야?!”
“뭐?”
나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뒤를 이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선 유하가 안색이 창백해져 내게 달려왔다. 그러더니 앞치마 끝을 붙잡고는 얼굴 쪽으로 가져다 댔다. 하지만 괴로운 얼굴로 머뭇거렸다.
“아, 아아…. 무, 무슨 일이….”
“왜 그래?”
나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리에서 일어서 부엌 쪽으로 간 트리슈가 얼마 지나지 않아 물에 적신 수건을 가지고 돌아왔다. 하지만 내 앞에 서서 마찬가지로 머뭇거리던 그녀는 앞치마를 붙잡고 있던 유하에게 수건을 건넸다.
“대체…. 어딜 다녀온 거야?”
“주운…. 왜, 왜 얼굴이 피로….”
“윽?!”
젠장, 피를 덜 닦아낸 모양이로군.
나는 코끝에서 느껴지는 알싸한 통증에 인상을 찌푸리며 유하가 얼굴을 닦아내주는 걸 가만히 기다렸다. 그리고 이내 그녀는 응고된 피가 묻은 수건을 내 얼굴로부터 떼어냈다.
“아니 그, 잠깐 계단에서 굴렀어.”
“….”
트리슈는 그게 말이 되는 거짓말이냐는 표정이었으나,
“조, 조심하지 그랬어요!”
유하는 살짝 나무라면서도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얼굴을 깨끗이 닦아주었다. 그리고 붉게 물든 수건을 주방 쪽으로 가지고 들어갔다.
“…. 누구랑 싸우고 왔어?”
대충 상황을 눈치 챈 트리슈가 가까이 다가와 내 코를 아무렇지도 않게 움켜쥐었다. 맹렬한 통증에 인상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서자니 그녀는 안심한 듯 말을 이었다.
“코는 부러지지 않은 것 같네.”
“너….”
“분위기 다 깨고 이게 뭐야?”
“뭐?”
“유하 언니, 많이 화났었는데. 이대로라면 그럴 타이밍도, 분위기도 다 놓쳤잖아?”
“마치…. 넌 아무 상관없다는 듯이 말하는구나.”
“익?! 트, 트리슈가 뭘 어쨌다고…!!”
“어제 필름 끊겼던 거냐?”
내가 약간 진지한 얼굴로 묻자 거세게 반박하던 트리슈의 몸이 쩌적 굳어졌다. 그리고 이내 녀석은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어서는 뒤로 물러났다.
“그, 그건 나중에…! 아, 아니. 음….”
그러고서는 머뭇거리며 당황하더니,
“미, 미안합니다아….”
옆머리를 손가락으로 베베 꼬며 사과를 했다. 슬쩍 뒷짐을 진 채, 말 안 듣는 어린애처럼 엉덩이를 흔들며 건들대는 모습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정말로 반성하고 있는 거겠지.”
“그, 그렇거든! 정말이거든!”
“그럼 사과하러 가자.”
“누, 누구한테?”
“준우랑 발렌타인.”
“으겍, 싫은데에….”
“린슬렛도 부를 거야.”
“그 어제의 납작한?”
“….”
나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손을 들어 트리슈의 볼을 꼬집었다. 약간 힘을 주어서, 말랑말랑한 걸 꾸욱.
“자, 잠깐! 아파파파파팟?!”
“사람을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
“아, 알았어! 알았다고!”
“좋아.”
나는 무뚝뚝하게 중얼거리며 손을 놓았다. 마시멜로처럼 부드럽게 원래 자리로 돌아간 볼을 쓰다듬으며 녀석은 눈물이 고인 눈으로 날 원망스러운 듯 바라보았다.
“폭력배!”
“…?”
초등학교 2학년도 그렇게 욕하진 않겠다. 야.
“불한당! 악당!”
“뭐라는 거야.”
“사과해! 어제 때린 거!”
“….”
그건 확실히 잘못하기는 했군.
“미안하다.”
나는 솔직하게 사과를 하며 손을 들어 트리슈의 뺨을 가볍게 매만졌다.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고는 했으나 상대방에게 폭력을 휘두른 건 잘못된 행동이었다.
“내가 잘못했어.”
그렇게 사과를 하자 트리슈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뒤를 이어, 그녀는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내 손을 날카롭게 쳐냈다.
“가, 갑자기 또 사과하지 말라고!”
“…. 그럼 어쩌라는 거야?”
“우으으….”
내 물음에, 녀석은 대답을 하는 대신 고개를 푹 숙인 채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는 다시금 몸을 베베 꼬며 머뭇거리다 이내 입을 열었다.
“저, 저기….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또 뭔데.”
“어, 어제 혹시 무슨 일 있었나 해서….”
“네 기억 속에 있는 그대로의 일이 있었는데.”
“?! 여, 역시 했구나!”
“뭘 해?”
나는 눈썹을 찌푸린 채 되물었다.
“아, 알몸으로 하는 그거!”
“…? 아 그거?”
샤워를 말하는 건가.
“그, 그거라니! 뭘 그렇게 별 것도 아닌 것처럼!”
“아니 사람이라면 다들 하는 거고….”
“으으으으으으?! 그, 그건 그렇지만! 그게 없으면 아기가 태어나질 않지만!!”
“…?”
이건 뭔가 이상한데.
“아무리 그래도 술에 취한 상태에서 하는 건 아니잖아! 너무하잖아! 처음이었는데!”
“잠시만.”
나는 약간 어이가 없어지는 걸 느끼며 트리슈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감정이 복받쳤는지 녀석은 갑작스레 눈물이 터져서는 울기 시작했다.
아니, 잠깐만요.
“…. 트, 트리슈?”
“바, 바보! 바보 멍청이!”
“아니 뭔가 오해가….”
“준?”
바로 그 순간 차갑게 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 하?”
“으아앙! 언니이!”
약간 정신이 아득해지는 걸 느끼며 고개를 돌린 나는, 부엌 앞에 멍하니 서있는 유하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품으로 달려든 트리슈가 코를 훌쩍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흐엥!”
“울지 말아요, 누가 나쁜 짓을 했나요?”
“흐에에에엥!”
그렇게 울면서도 트리슈의 손가락이 이쪽을 가리켰다. 뚜두둑, 하며 무슨 기계인형처럼 미소를 지은 유하가 곧이어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 준.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어요?”
그 미소가 더욱이 무서워 나는 다리에 힘이 풀리는 걸 느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지난번의 그 거대 타란튤라를 상대했을 때 이상의 압박감이 느껴졌다.
“왜, 왜?”
“걱정 마세요. 저도 곧 뒤를 따라갈 테니까.”
“어디를 가는….”
“명예를 지키기 위한 곳이죠. 잠시만 기다려요!”
“….”
방긋 웃은 유하가 한 차례 트리슈를 진정시키듯 머리를 쓰다듬고는 부엌으로 향했다. 머릿속에 아무것도 떠오르질 않아 멍하니 손을 뻗자니 이내 불길한 소리가 들려왹 시작했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악, 사악. 하고 칼을 가는 소리가….
“도, 도망치자.”
나는 유하가 머리를 쓰다듬어 약간 진정한 트리슈의 손을 잡고 바깥으로 빠져나가려 했다. 하지만 녀석은 다리에 힘을 주어 내가 당기는 걸 버텨냈다.
“나한테 또 무슨 짓을 할 셈이야!”
“아무 짓도 안 해! 이 멍청아!”
“히끅!”
버럭 소리를 지르자 당황해 딸꾹질을 하는 녀석의 팔을 질질 끌며 나는 다시금 가게를 빠져나왔다.
◇
오해는 생각보다 쉽게 풀렸다.
“그, 그런 거였구나? 아하하하….”
지하철 안, 내 설명을 듣고 어색하게 웃어 보인 트리슈는 내가 지그시 노려보는 걸 피해 고개를 돌렸다. 본의 아니게 다시금 유하와 오해가 생겨버린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젠장.”
“미, 미안해. 오빠~ 화 많이 났어?”
머뭇거리다 가까이 다가온 트리슈가 팔짱을 꼈다. 낮 시간 대였기에 지하철에는 사람이 없었으나 나는 가볍게 녀석을 옆으로 밀어내며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는 귀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녀석을 내려다보았다.
조금 진지하게.
“쥬브나일 포르노로 갈 거야.”
“윽….”
“계약을 다시금 정립하지. 트리슈.”
나는 무뚝뚝하게 중얼거리며 녀석을 바라보았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있던 트리슈는 이내 애교스러운 눈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에이~ 뭘 그렇게 딱딱….”
“준우가 베디비어가 되는 걸 돕도록 해.”
“…. 그건 계약 조건이 아니지 않아?”
“정정하자는 거다.”
그렇게 중얼거린 나는 녀석의 앞에 검지와 중지를 펼쳐서 들어보였다. 그리고 곧장 하나를 돕는다.
“이게 하나.”
그리고,
“트리스탄으로서 이후에 날 도와줬으면 해.”
“…. 기사들이 다 모였을 때?”
역시 알고 있는 모양이군.
“그래, 그때를 대비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 그래서 더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거 알아? 오빠.”
“장난치지 말고.”
나는 살짝 낮게 목소리를 깔았다. 그러자 트리슈는 잠깐 무어라 반박하려는 듯 입을 크게 뜨더니, 이내 그만두고는 어깨를 움츠리며 시선을 피했다.
“자, 장난치는 거 아니거든….”
“…?”
평소와는 다른 반응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전 같았으면 여유롭게 그런 날 비웃었을 녀석인데. 잠깐 멍해져 있자니 이내 트리슈는 볼멘소리를 내듯 볼을 부풀린 채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그래서 내가 받을 수 있는 건 뭔데?”
“음.”
그쪽은 사실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그건 네가 정하는 걸로.”
“정말? 뭐든지 트리슈가 말하는 대로 해줄 거야?”
“그건 아니고.”
“체엣…. 구두쇠.”
트리슈는 삐쳐선 고개를 돌렸다. 잠깐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그래도 계약 조건을 명확히 해두어야겠다 싶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하철이 답지 않게 한강 대교를 통과해 가는 걸 보며 나는 아직까지도 코가 욱신거린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해서 떠올렸다.
“이렇게 하지.”
“응?”
그 사람이라면 분명히 다양한 방법으로 트리슈가 원하는 바를 이루어줄 수 있으리라. 그런 생각에 나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트리슈를 내려다 보았다.
========== 작품 후기 ==========
그렇게.. 이준(23세, 잘생김)은 오늘도 집에서 엄마와 같은 누나가 마음 아파하는 걸 무시한 채 게임을 하러 갑니다... 집안의 폭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