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네크로맨서 재킷-106화 (106/321)

106편

<-- Chapter 3 : 선율의 기사 -->

머리가 찡, 하고 울리는가 싶더니.

“일어나.”

나는 뺨을 얻어맞고는 정신을 차렸다.

“윽….”

순간적으로 몸을 움직이려고 했으나 갑자기 팔이 조여 왔다. 사슬이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고개를 든 나는 양팔이 머리 위로 들려 묶여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어깨 관절이 비명을 질러댔다.

“물어볼게 몇 가지 있다.”

그리고 바로 앞에서 딱딱하게 굳어진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아랑. 그런 이름을 머릿속에 읊조린 나는 단정한 얼굴 사이의 눈을 빛내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쨌든 조금 상황을 파악한 필요는 있었으므로 나는 고통으로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애써 웃어보였다.

“이렇게 묶어두고서….”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뺨에서 격통이 일었다.

“네놈에게 발언권 따위는 없다.”

“너는 인권이란 말도…. 윽!”

또 얻어맞았다. 이번에는 복부를.

“흉악 범죄자 따위에게 인권을 보장해줄 정도로 녹록한 상황이 아닌 걸 기억해줬으면 하는군.”

“젠장…. 여기는 대체 어디야?”

나는 지지 않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우아랑의 너머에서 이쪽을 걱정스러운 얼굴로 보고 있는 넬과 눈을 마주쳤다.

“…. 말이 통하질 않는 녀석이군.”

“우, 우정현 회장님 댁이에요!”

정현 씨의?

그런 목소리에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렇게 생각하자니 바닥에 깔린 양탄자나 벽지, 창문의 재질이 고급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방안은 가구들이 모조리 박살난 채로 엉망이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우아랑을 바라보았다.

“이건, 네 짓인가?”

“뭘 그렇게 궁금한 게 많은 거냐.”

“네, 이곳에 오시자마자….”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우아랑은 더 이상 주먹을 들지는 않았다. 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 시선을 보내는 그녀의 뒤에 서있는 넬에게 질문을 계속했다.

“지금 시간은?”

“….”

“오전 9시에요.”

젠장, 트리슈가 일어나고도 남았을 시각이었다.

“집 주인하고 이야기를 좀 하고 싶은데.”

“지금 여기에는 나밖에 없다만.”

“연락을 드려볼게요!”

이정도면 됐나.

“그래서, 날 이곳으로 데려온 이유는 뭐지?”

넬과의 협의(?)가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되자 나는 우아랑에게 시선을 보냈다. 내가 시간을 끌지 않고 그런 식으로 그녀에게 어느 정도 협조적인 태도를 보인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가 나를 다른 장소가 아니라, 굳이 우정현 씨의 집으로 데려왔기 때문이었다.

이곳은 어떻게 보자면 이 대한민국에서 정부기관의 눈으로부터 가장 자유로운 장소. 말인즉슨 할 킬러즈의 눈에 띄지 않고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는 인상이었다. 다른 곳과는 달리 감청의 대비를 해두었을 터였기에.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거라면.”

“대답할 수 있냐 없냐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대답을 듣고 싶어 하냐 아니냐의 문제지.”

“막무가내로군.”

그러자 다음 순간, 목덜미에 칼이 드리워졌다. 검정색으로 된 날이 파르스름하게 빛을 받았다.

“알아두는 게 좋아. 내가 지금 당장 네놈의 재킷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수 있다는 걸.”

“그렇다면 난 모든 기억을 잃어버리겠지.”

“한 마디도 지려고 들질 않는군.”

“그렇게 느꼈다면 미안한데….”

나는 적당히 대답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슬슬 우아랑의 표정이 심할 정도로 굳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감정을 추스르듯 방을 맴돈 녀석은 다시금 무뚝뚝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가웨인을 모르지는 않겠지?”

“….”

기분 나쁜 이름에 나는 입을 여는 대신 녀석을 강하게 노려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원래는 너희 기사단 소속이었으니.”

“이제는 아니야.”

“그렇…. 지. 녀석은 이제 할 킬러즈 소속이 되었으니.”

약간 의아함을 감추지 못한 채 중얼거린 우아랑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듯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나는 확실히 정정할 건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나 또한 기사단 소속이 아니란 말이었다.”

“…? 그렇군.”

“그걸 묻고 싶어서 부른 거냐?”

“기다려라. 지금 질문할 사항을 정리 중이니.”

“하아, 할 킬러즈의 대위라는 놈이….”

약간 흥분해 중얼거리자니 검이 날아들었다. 얼굴 끝을 스친 그것이 반대편 벽에 꽂힌 듯 강철이 우는 소리가 났다. 나는 우아랑이 지금껏 본 적이 없던 사나운 얼굴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나를 능멸하는 거냐?”

“할 말이 있다면 확실히 하란 말이다. 이것저것 재면서 사람 시간 낭비하게 하지 말고.”

“스컬…!”

“아니면 당장 내 재킷을 박살내고 범죄자로서 감옥에 처박던가. 그게 너희 할 킬러즈의 일이잖아?”

나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독설을 내뱉었으나 우아랑은 그다지 강하게 나오질 못했다. 잠깐 입술을 짓누르듯 물던 녀석은, 길게 숨을 몰아쉬며 팝업창을 띄워 무언가를 조작했다.

그리고 녀석은 코트를 벗었다. 민소매로 된 셔츠가 드러나며 녀석은 긴 코트를 내게 내밀어 보이고는 기둥의 잔해처럼 보이는 나뭇조각에 걸어두었다.

“이걸로 됐나?”

그건 할 킬러즈의 우아랑 대위가 아닌,

“지금 여기에 있는 건, 현재의 아서리안 사태를 심각하게 지켜보고 있는 한 개인이다.”

“…. 그럼 이건 좀 풀어주시는 게?”

“그럴 수는 없지. 흉악 범죄자인 네놈을 풀어주었다가는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으므로.”

“사람을 대체 뭐라고….”

“물론, 강력한 살상 무기를 가지고 있는 범죄자다.”

반박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먼저, ‘랜슬롯 퀘스트’가 있던 날 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 수 있나.”

“….”

설마 이 녀석, 아무것도 모르고 있나?

“스컬?”

“할 킬러즈에서 대규모 소탕 작전을 벌였지. 그리고 난 가웨인과 결투를 벌여서 승리했어.”

“가웨인과…?”

“그렇다만, 뭔가 문제라도?”

“하지만 내부에서는, 네가 뭔가 비겁한 수를 썼다고만….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계속하도록.”

순간적으로 당황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우아랑은 이내 고개를 내저으며 손을 내밀었다. 할 킬러즈 쪽에는 가웨인과 나의 전투가 그런 식으로 알려져 있는 걸까. 잠시 그렇게 이것저것 생각을 해보던 나는, 이내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게 전부야.”

“뭐?”

“그게 전부라고.”

“…. 정말이냐?”

나는 그런 물음에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우아랑은 인상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고, 나 역시 머릿속을 정리할 약간의 유예를 받았다.

그러니까 이 녀석은….

아예 모르고 있는 건가?

“내 쪽에서도 한 가지 물어도 될까?”

“아니.”

“….”

말이 통하질 않는 녀석이군.

의문은 깊어가는 듯, 우아랑은 턱을 괸 채 계속해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녀석이 이렇게 고민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얼마나 궁지에 몰려있기에 스스로 무척이나 혐오하는 부류에 속하는 흉악 범죄자의 이야기라도 듣자는 결심을 했던 것일까.

잠깐 거기에 대해 생각을 해보던 나는, 이내 한 가지 희미한 냄새를 맡고는 그걸 따라가 보자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요새 할 킬러즈의 활동이 뜸하던데.”

“…? 네놈 역시 느끼고 있었단 말인가?”

우아랑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날 바라보았다.

“내부에 무슨 문제라도?”

“대답해줄 의무는 없다.”

하지만 조금 더 파고들려하자 녀석은 다시금 마음의 문을 쓱 닫아버렸다. 나는 단정하고 여유라고는 없어 보이는 그 옆모습을 보며 그 희미한 예감을 생각했다.

녀석은 나와 같은 목적을 지니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어쩌면 모든 할 킬러즈가 ‘본디’ 지니고 있어야할, 이 게임이라는 이름의 광기를 멈추고 말겠다는 의지.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아서리안 사태를 유지한다는 생각을 지닌 할 킬러즈 내부에서 자연스럽게 도태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거기에 의문을 지니게 되어 나름대로의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는 걸까.

“….”

잠깐 솔직하게 터놓고 이야기를 해볼까 했지만, 나는 이내 통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순순히 믿어줄 것 같지도 않았고, 애초에 녀석은 그 진실을 가장 잘 아는 어머니와도 척을 진듯했으니.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그렇게 있자니 우아랑이 다시 날 바라보았다.

“가웨인과는 어째서 싸우게 된 거지?”

“….”

무척이나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곤란해져 시선을 피하니 우아랑은 망설이다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이건 대답하지 않아도 좋다.”

“기만했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런 답을 내렸다.

“…? 뭐?”

“그 개자식이 현실을 기만했기 때문이다.”

가상을 통해. 좀 더 쉽고, 뭐든지 간단해져버리는 이 세계를 이용해. 현실을 엿 먹이려고 했다.

“그래서 그런 거야.”

“마치 네놈은 그렇지 않다는 듯한 말투로군.”

“…. 그래서 나는 내가 싫은 거다.”

나는 씁쓸하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어 우아랑과 시선을 마주했다. 잠깐 그런 내 얼굴을 살피

던 녀석의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피어올랐다.

“너…. 혹시….”

녀석이 뭔가 물으려는 듯 가까이 다가왔다.

하지만 다음 순간 닫혀져 있던 문이 벌컥 열렸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이 아파왔다.

“…. 내가 다시 술을 마시면 개야. 개.”

하고 트리슈는 멍멍, 소리를 냈다. 말은 이렇게 해도 다시 마실 것을 알았기에. 트리슈는 입안 가득한 역겨운 기운에 침대 위를 뒹굴다 바닥으로 떨어졌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는 비릿한 신음을 흘렸다.

죽을 것 같다.

머리는 욱신거리고, 어지러워 속은 메슥거리고 몸에는 힘이 없었다. 어제의 단편적인 기억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끼워 맞춰지며 죽고 싶은 기분이었다.

죽고 싶은 기분과 죽을 것 같은 감각이 합쳐졌으나 죽지 못했다. 트리슈는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다 이내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헝클어진 진녹색의 머리카락이 얼굴을 감싼 채였다. 거기에 알몸.

설마 한 건 아니겠지.

온몸이 새빨갛게 물들어, 트리슈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거기에 대해서 생각했다. 하지만 머릿속에 뒤를 이어, 남자의 근육질이었던 알몸이 떠올랐다.

한, 건가…?

처음? 인데?

술을 먹고?

“….”

빨래대 마냥 넓었던 어깨, 깊게 형태를 갖춘 쇄골. 형태를 완연하게 갖추고 있는 복근과 흉근. 그리고…. 우수에 젖은 엄청나게 잘생긴 얼굴까지.

아니, 그러니까.

왜 그게 머릿속에…?

알몸이 되었던 순간 이후로는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그가 자신을 들어 올려서 침대에 내던졌던 것 정도만. 뭐 그렇게 힘이 좋을까…. 하고 눈을 뜨니 지금이었다.

“…. 했나?”

그렇게 중얼거리며, 수치심에 몸을 파르르 떤 트리슈는 반쯤 침대에 걸쳐져 있는 이불을 당겨 몸을 휘감았다. 그리고 침대 밑으로 몸을 구겨 넣으려고 했지만 가슴이 걸려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떻게 하지.

“해버렸어.”

해버렸다.

“….”

그것도 최악의 형태로.

“우, 우으으….”

훌쩍, 훌쩍.

트리슈는 침대 위로 올라가 무릎에 코를 박은 채 어깨를 떨었다. 잔뜩 겁에 질려서 온갖 나쁜 상상을 다하며 그녀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 넓은 어깨나 조각 같았던 얼굴이 머릿속을 스칠 때면, 멋있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래서 역시나 더더욱….

“이렇게 처음인 건 싫어어어어….”

그렇게, 오해에 오해를 거듭한 트리슈가 땅을 파고 내려가다 못해 내핵 부분까지 닿았을 무렵,

“준? 안에서 웬 여자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닫혀져 있던 문이 열렸다.

“훌쩍, 훌쩍…?”

“…. 어머?”

그리고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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