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편
<-- Chapter 3 : 선율의 기사 -->
그렇게 말한 그녀가 팝업창을 하나 띄워서 내게 보여주었다. 점성술과 신화에 관련된 서적인 듯했다.
“나는 씻고 자려고.”
그럴 수는 없겠지만, 나는 유하가 걱정이라도 할까 싶어 적당히 거짓말을 했다.
“후후,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그런, 가?”
“넬이 잘 도와줘요.”
“네넬!”
넬 역시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도와주어, 유하는 가볍게 인사를 하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몸을 돌리던 그녀는 이내 바닥에 개어두었던 셔츠와 재킷을 발견하고는 다가가 주웠다.
“준, 이건…?”
“그, 그건!”
“어머나…. 혹시 술 마셨어요?”
냄새를 맡아본 그녀가 눈썹을 찌푸리며 셔츠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그나마 그때 편의점에서 안주를 시키지 않았던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셔츠를 빼앗듯이 유하의 손으로부터 가져왔다.
“아, 아니…. 내가 마신 게 아니라 친구가.”
“으음, 혹시 안에도 뭐 묻은 거 있어요?”
“내가 알아서할게…!”
“후후, 누나가 해줄게요. 잘못 빨면 냄새가 나니까.”
웃으며 중얼거린 유하는 당황해 내민 내 손길을 피해 문고리를 쥐었다. 이대로라면 그녀가 안에 있는 트리슈와 마주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제멋대로 손이 움직이는 걸 느꼈다.
“유하…!”
“꺅?!”
나는 유하의 어깨를 쥐고는 문고리로부터 돌려세워 벽에 밀어붙였다. 당황한 그녀가 얼굴이 빨개져서는 나를 바라보았다.
“주, 준?”
“괜찮아…. 안 그래도 혼자서 가게 보느라 피곤할 텐데, 이런 건 내가 알아서 할게.”
“우, 우으읏.”
“? 유하?”
“구, 굳이 그렇게 진지하게 이야기하지 않아도오….”
다리 앞에서 모은 손가락 끝을 매만지며 중얼거린 그녀는 이내 약간 분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잠시 당황하고 있자니 이내 유하는 가볍게 발꿈치를 들었다. 볼에 부드러운 감각이 닿았다 떨어졌다.
“준, 점점 멋있어지는 거 알아요?”
“으, 으음.”
나는 얼굴이 빨개져서는 볼을 쥐었다. 가볍게 웃은 그녀가 이내 천천히 옆으로 빠져나갔다.
“누나로서는 도와주고 싶지만, 준이 그런다면.”
“고마워.”
“고마울 게 뭐 있어요.”
웃으며 중얼거린 유하가 다시 인사를 건네고는 방안으로 들어갔다. 남겨져 있던 나는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재킷을 집어 들었다. 직격(?)을 맞은 셔츠는 갈아입는 걸로 하자. 그렇게 생각한 나는 다시금 나갈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우리 집으로 와.]
린슬렛으로부터 그런 메시지가 도착해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
정문으로 올라오라고 해서 그렇게 하기는 했는데.
“자, 마셔.”
아무래도 어머님은 야근 중이시라는 모양이었다.
“고마, 워.”
나는 적당히 린슬렛의 눈치를 살피며 그녀가 건넨 탄산음료를 들고 한 모금 마셨다. 피로로 지친 몸에 당분과 탄산이 감돌며 약간 정신이 드는 기분이었다. 어쨌든 단 둘이 있고 싶었으므로 넬은 디멘션 커넥터 안에.
집은 어마어마하게 으리으리했다. 그런 싸구려 저질 표현으로 밖에 쓰지 못하는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로. 내 방은 한 100개쯤 들어가겠다 싶은 거실. 길게 뻗은 복도는 세련된 외국의 펜트하우스를 연상시켰다.
아니 펜트하우스 맞지, 여기.
한쪽 벽면이 유리로 되어있어 소파에서 엉덩이를 털고 일어서면 곧바로 도심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의식한 김에 말하자면 지금 앉아 있는 소파 역시 내 침대보다도 푹신푹신했다.
“으음.”
“….”
너무 두리번대는 것도 실례라고 생각해 탄산의 거품이 올라오는 걸 보고 있었지만, 린슬렛은 말이 없었다. 내 옆에 있는 1인용 소파에 앉아 긴 다리를 팔걸이에 올려두고 있을 뿐. 짧은 운동용 팬츠와 가벼운 후드티라는 차림이었으나 그녀는 그런 활달해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내가 시선을 보낼 때마다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저어.”
그래서 결국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린슬렛?”
하지만 역시나 대답은 없었다.
화가 난 걸까.
그렇게 막무가내로 돌려보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지만. 나는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고 다리를 움츠린 채 녀석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꾸 시선을 보내자 린슬렛은 후드를 뒤집어써 얼굴을 가리고는 아예 아르마딜로처럼 몸을 둥글게 말았다.
“…. 해.”
그러더니 이내 그 안(?)에서 목소리가 나왔다.
“뭐라고 했어?”
“안, 하다고.”
“…?”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린슬렛의 옆으로 엉덩이를 당기며 다가갔다. 아르마딜로가 된 린슬렛이 뒹굴 거리다가 소파 밑으로 떨어지려고 해 받쳐주었다.
‘미, 미안하다고!“
그리고 그녀는 돌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 뭐가?”
갑작스럽게 사과를 받아 당황한 내가 묻자, 린슬렛은 그 안에서 스윽 고개를 내밀었다.
“그, 멋대로 찾아가서….”
그러더니 그녀는 이내 다시금 자세를 바로 하여 소파에 등을 꼿꼿이 세운 채 앉았다. 나는 도무지 상황이 이해가 되질 않는 걸 느끼며 눈을 껌뻑거렸다.
“화 많이 났어?”
“아, 아니.”
“미, 미안해…. 그렇게 화내지 마….”
아니 화 안 났다니까.
“그, 그으. 내가 잘못했으니까.”
“….”
이럴 땐 어떻게 반응을 하면 좋은 걸까.
나는 약간 당황스러운 기색을 느끼며 린슬렛을 바라보았다. 좀처럼 진정하지 못하고 손가락을 꼼지락 대는 녀석의 모습에 나는 어째서 화가 났다고 느끼는 걸까. 고민에 빠져들었다.
말하는 태도가 문제였나.
“린슬렛.”
최대한, 그리고 최선을 다해 부드러운 톤을 내자 녀석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주눅이 든 표정, 단정한 눈썹이 겁을 먹고 찌푸려진 모습에 나는 약간 얼굴이 빨개지는 걸 느꼈다.
젠장, 귀엽잖아.
“으, 으응.”
아니, 아니 이럴 때가 아니긴 한데.
“왜애…?”
저렇게 약간 혼나는 걸 재촉하듯이 물으면 어쩐지 약간 괴롭히고 싶은 마음이….
나는 쓰레기인가.
“티, 티?”
“이쪽으로 와.”
“으, 으응.”
나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자리를 터 그녀가 와서 앉도록 했다. 조심스럽게 다가온 린슬렛은, 내가 터준 자리에 무릎을 올리더니 그대로 내 허벅지 위에 엎드렸다.
“…?”
“자, 자아.”
아니 뭐가 자아. 라는 거죠.
“그, 그으…. 그래도 너무 세게 하면 안 돼?”
뭘 세게 한다는 거죠.
“그, 그럼. 나는 눈 감고 있을 테니까….”
그러더니 린슬렛은 내 한쪽 팔을 꾹 끌어안고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가볍게 호흡을 하는 기색이 느껴지고, 나는 어쩐지 이성이 반쯤 마비되는 걸 느꼈다.
PINK라고 엉덩이에 레터링이 된 짧은 트레이닝 팬츠.
그 아래로 길게 뻗은 새하얀 허벅지, 긴 다리. 새하얀 양말까지의 라인에서 도무지 눈을 떼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슬쩍 긴장된 엉덩이가 파르르 떨려 나는 저도 모르게 거기에 손을….
“아, 아니!”
그럴 수는 없다.
“히꺅?!”
필사적으로 그 유혹(?)을 이겨낸 나는, 린슬렛을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그녀의 조그마한 몸은, 빙그르르 돌아 내 무릎 위에 절묘하게 앉았다.
“아….”
그리고 시선이 마주쳤다.
물론 린슬렛이 작은 건 아니었다. 아니, 가슴이 아니라 체구 자체가…. 내가 큰 편이기도 하니까. 186이면 외국에서도 나보다 큰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었고. 린슬렛은 160정도 되려나? 귀엽고, 자그맣고. 약간 활달한 부분 자체도 사랑스럽고오….
입술도 부드럽고.
“웃? 우웁….”
나는 스스로를 절제하지 못하고 린슬렛의 입술에 입술을 겹쳤다. 그녀는 처음에는 당황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으나 이내 내 가슴에 한쪽 손을 얹었다. 나 역시 살짝 힘이 느껴지는 허리 뒤쪽을…. 그리고 점점 위로 올라와 그녀의 귀여운 금발을 헝클듯 손에 쥐었다.
다른 손은 서로 움켜쥔 상태였으나, 이내 나는 욕망을 이겨내지 못하고 린슬렛의 가슴에….
“아야얏?!”
손등을 꼬집혔다.
“바보.”
나는 당황해 린슬렛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입술을 다문 채 살짝 나무라듯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 이상은 넘으면 안 돼.”
“그, 그으….”
“안 돼.”
단호하게 중얼거리는 모습에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잠시 후, 린슬렛은 머뭇거리다 내 손을 잡았다. 고개를 든 나는, 붉어진 얼굴을 한 채 시선을 피하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발견했다.
“화났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네가 화났을 거라고 생각했어.”
“내, 내가?”
린슬렛이 당황해 되묻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앞머리를 매만지며 고민을 하는가 싶던 그녀는 이내 볼을 살짝 부풀린 채 내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조, 조금 그럴지도….”
“미안.”
“나랑은 처음 만났을 때 차가웠으면서.”
“그, 그건….”
확실히 그렇긴 했지.
그때의 나는 약간 그런 느낌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 해외에서의 생활 이후에 한국으로 돌아와, 어떻게 해서든 갤러해드가 되기 위한 방법을 찾으려고 했으니까. 넬이나 유하 이외에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없이 막무가내로 게임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우정현 씨나.”
“회, 회장님 이야기가 여기서 왜 나와…?”
“주다연 양이나.”
“…. 가, 갑자기 본명을 부르면 부끄럽다고?”
“그것도 그렇군.”
나는 무뚝뚝하게 중얼거리며 좋은 냄새가 나는 린슬렛의 머리를 가볍게 감싸 안았다. 그래, 지금 품에 안겨 있는 여자는 나에게 있어서 린슬렛이다.
그렇게 보자면 ‘준우’는 어떤 건지 잘 모르겠지만.
왜일까. 나는 왜 그 녀석을 빼빼로가 아닌 준우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일까. 머릿속이 복잡한 와중 나는 슬며시 린슬렛이 턱을 어루만지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내리자 쪽, 입술이 닿고 그녀가 불만이 섞인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다른 여자 생각했지.”
“남잔데.”
“…! 너, 너너, 설마 그런 쪽으로도?!”
“무슨 소리야?”
내가 의아해하자 린슬렛은 얼굴을 붉혔다.
“화, 확실히 나랑 발렌타인도 지난번에 너와 빼빼로를 가지고 그런 상상을 좀 하기는 했지만….”
“? 무슨 상상.”
“아,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닙니다아?!”
이상한 녀석이다.
“그, 그러고 보니…. 아까 봤을 때 발렌타인 교복 입고 있던데….”
“응?”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니 린슬렛이 말을 꺼냈다.
“혹시 그거 페티시즘?”
“어….”
이 녀석은 정확히 그 녀석이 몇 살인지 모르지.
“아무리 그래도 발렌타인이 학생은 아니…. 지? 빼빼로가 우리랑 동갑이라는 건 알고 있는데. 둘이 사귀잖아.”
“사, 사귀는 거였냐?”
“응, 그 둘은 현실에서도.”
“….”
“음, 왜?”
“아, 아니 아무것도.”
나는 적당히 이야기를 회피하며 딴청을 피우기 시작했다. 고개를 갸웃거린 린슬렛은 무릎을 모으며 내 위에 햄스터처럼 둥글게 몸을 말았다.
“그래서, 정말 화 안 난 거 맞지?”
========== 작품 후기 ==========
PINK는 그 시대에도 유행한다는 설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