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편
<-- Chapter 3 : 선율의 기사 -->
◇
어둠에 잠긴 학교는 인적이 없이 조용했다.
준우를 부축해 근처의 벤치에 앉도록 한 나는, 인상을 찌푸린 채 녀석의 팔을 바라보았다. 크기도 크기거나와 재킷의 보정이 먹히질 않는 건지 엄청나게 무거웠다.
“재킷을 벗을 수는….”
“불가능, 하더군요.”
내 조심스러운 물음에 준우는 쓴웃음과 함께 고개를 내저으며 벤치에 무게를 싣지 않도록 나무토막을 옆으로 빼냈다. 바닥이 움푹 파일 정도의 무게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실제로도 엄청나게 무거운 건가.
“아~ 나만 또 나쁜 년 만들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니 뒤늦게 다가온 트리슈가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준우의 옆에 계속 붙어있던 발렌타인이 이를 빠드득, 가는 소리에 나는 인상을 찌푸린 채 비틀거리고 있는 트리슈의 팔을 잡았다.
“어서, 열쇠를.”
“…. 이 손 치워.”
하지만 녀석은 차갑게 중얼거리며 내 팔을 쳐냈다. 그리고는 얼굴이 취기로 인해 붉게 물든 상태에서 길게 한숨을 내쉬며 준우를 바라보았다.
“오빠, 힘들지?”
“…. 트, 트리슈.”
“나도 해봐서 아는데. ‘에픽 퀘스트’는 사람이 할 게 못되는 것 같아. 그치?”
비아냥대는 것처럼 중얼거린 트리슈가 이내, 가볍게 손을 들었다. 그러자 동그랗게 말려서 잠을 자고 있는 고르바초프가 그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필요하지?”
“장난치지 말아요!”
참다못한 발렌타인이 나서 그 손에서 고르바초프를 낚아채려고 했다. 하지만 트리슈는 가볍게 몸을 틀어 그것을 피하며 고르바초프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트리, 슈….”
“왜? 지금도 똑같네. 결국 이렇게 아무 말도 안하고 있다가 나만 나쁜 년 만드는 수법.”
“그럴, 의도가….”
준우의 목소리에 점점 힘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어깻죽지에 매달린 나무토막이 우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부풀어 올랐다. 작은 나뭇가지가 마치 손가락처럼 뻗어 녀석의 볼에 달라붙었다.
“트리슈…. 빨리!”
“타나토스 오빠는 빠져!”
조급해진 내가 재촉했지만 트리슈는 다시금 차가운 목소리를 냈다.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는 행동에 나는 짜증이 치솟는 걸 느끼며 손을 뻗었고….
“뭐하는 거야, 티티?”
다음 순간 방패가 날아들어 트리슈의 손을 쳐냈다.
“…!”
튕겨져 날아간 고르바초프를 발렌타인이 캐치했다. 허공을 빙그르 돌며 돌아가는 방패의 모습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뒤를 돌아보았다.
“린슬렛!”
그리고 넬까지.
“주정뱅이 한 사람한테 정신이 팔려서는.”
“…. 티티?”
발렌타인의 눈동자가 가볍게 떨리며 의아한 듯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나는 세 그룹을 돌아보며 머리가 아파오는 걸 느꼈다. 하지만 일단 준우는 발렌타인에게 맡겨두고….
“주인니임! 보고 싶었어요!”
“넬….”
돌아선 순간, 린슬렛의 옆에 있던 넬이 부웅 내 쪽으로 날아들었다. 하나로 땋은 새하얀 머리가 기분 좋게 찰랑거렸으나 나는 짜게 식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네가 데려온 거야?”
“…. 네넬?”
“대체 무슨 이야기를 했기에….”
린슬렛은 이렇게 화가 나있는 거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이쪽에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지나치는 린슬렛을 멍하니 돌아보았다. 방패를 다시금 재킷 안으로 집어넣은 그녀는 트리슈의 앞에 서서 가볍게 고양이가 짜증을 부리는 듯한 소리를 냈다.
“너는…. 누구니?”
트리슈는 한껏 여유로운 목소리를 냈으나 오히려 그런 태도가 분노를 짐작케 했다. 약간 키 차이가 있어 고개를 들어 트리슈를 노려본 린슬렛이 입을 열었다.
“트리스탄, 이지?”
“그런데? 너는 누구?”
“랜슬롯. 덧붙이자면 네가 오늘 한껏 데리고 다니면서 희롱한 바보 같은 남자의….”
“여자 친구?”
“그, 그건 아니지만.”
“그럼 아무 사이도 아니네.”
“그, 그, 그런 건 아니거든.”
갑작스러운 결론에 린슬렛은 순간적으로 당황했는지 뒤로 물러섰다.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은 트리슈는 이내 한 차례 린슬렛의 몸을 위아래로 훑었다.
“하긴~ 이런 어린애하고 그럴 리가 없지.”
“어, 어린애라고…?!”
“그래~ 뭐 가릴 가슴이나 있나 싶은데?”
여유로운 트리슈의 도발에, 린슬렛은 얼굴을 붉히며 이를 바득바득 갈기 시작했다. 이 이상 둘을 좌시할 수 없다는 생각에 나는 한숨을 내쉬며 다가갔다.
“둘 다 지금 이럴 때가….”
“내가 빠지라고 했지!”
린슬렛이 버럭 소리를 질렀고 나는 당황스러운 기색으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뒤를 이어 옆에 서있던 트리슈가 비틀거리며 내게 팔짱을 껴왔다.
“하우…. 오빠, 나 좀 취기가….”
“너, 너너너, 너! 당장 떨어지지 못해!”
반대편에 선 린슬렛이 마찬가지로 지지 않겠다는 듯 팔짱을 끼고 당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트리슈는 요염하게 피식 웃었다.
“어머, 아프겠는데?”
“네, 네가 팔을 놓으면 되잖아!”
“아~아니, 팔이 ‘딱딱한 것’에 닿아서 아프겠다고.”
그리고 뒤를 이어 뭉클 거리는 감각이 전해져왔다. 가볍게 윙크를 한 트리슈가 내 허리를 안듯이 당기며 가슴 사이에 더 깊숙이 팔을 감싼 것이었다.
“어머나♡ 굉장한 근육….”
그리고 다음 순간, 휙 하고 린슬렛이 던진 방패가 내 얼굴 옆을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이미 눈치를 챈 트리슈는 요염한 미소를 머금으며 간단하게 피했다.
“너, 말로는 안 되겠구나?”
린슬렛의 분노는 거의 절정에 달했다. 머리카락이 곤두 설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를 낸 그녀가 방패를 붙잡았다. 끄트머리에서 희미하게 빛이 뿜어져 나오는 원형에 나는 아론다이트라는 이름을 기억해냈다.
“그거, 성희롱이야.”
“뭐 어때. 남자는 모두 트리슈처럼 예쁜 여자한테 성희롱을 당하고 싶어 한다고?“
“…. 정말이야?”
그리고 화살이 내게로 돌아왔다.
“아, 아니.”
“왜 말을 더듬어? 이준.”
아니 거기서 왜 본명으로 부르십니까.
“후후, 오빠도 트리슈가 더 좋은 거지?”
“오빠라고 부르지 마. 네가 왜 얘를 그렇게 부르는데?”
“왜냐니, 트리슈가 그렇게 부르고 싶으니까.”
약간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린 트리슈가 가까이 다가와 내 셔츠 밑으로 손을 넣었다. 그리고는 거침없이 복근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타나토스 오빠는, 트리슈가 원하는 대로 해준다고?”
슬쩍 얼굴을 붉힌 그녀가 다시금 린슬렛을 도발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나는 약간 정신이 아득해지는 걸 느끼며 뒤로 물러섰다.
“어라아? 필요없어? 이 ‘트리스탄’님이.”
“트리슈….”
“가웨인 오빠한테 가버릴 지도 모른다고?”
역시 영악한 여자다.
나는 약간 뇌가 침착해지는 걸 느끼며 트리슈를 바라보았다. 술에 잔뜩 취해버린 상황이긴 했지만, 녀석은 지금도 상황을 냉정하게 이용한다는 느낌이었다. 충동적이고 음탕한 그 모습은 가면으로 사용하고 있는.
물론 반대로, 린슬렛은 감정적인 쪽이다.
복근을 만지는 행동이 트리거를 당긴 것일까. 트리슈가 가볍게 뒤로 물러섰고 그것을 추적하듯 린슬렛이 달려들었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감정을 벼려낸 무기를 부딪치는 두 사람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너 같은 거 필요 없어. 티티는 내가 지킬 테니까.”
“그 지킨다는 말, 설마 방패를 들고 있어서 하는 소리야? 되게 유치한데. 티티라는 별명도.”
“네 오빠라는 호칭보다는 덜?”
상황이 심각하군.
린슬렛의 방패가 철커덕하는 소리와 함께 형태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나사가 빠져나와 돌아가며 증기를 뱉어내고 그것은 마치 호수의 안개처럼 그녀를 감쌌다.
“나도 기사와 싸워보는 건 처음이지만…. 그게 네 무기라는 거야? 참으로 장난감 같은데.”
트리슈의 도발에도 린슬렛은 괘념치 않고 안개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나는 다음 순간 이어진 린슬렛…. 아니, 랜슬롯의 말을 똑똑히 들었다.
“아론다이트.”
번쩍이며 안개 속에서 푸른빛이 일어났다. 대지에 안개가 짙게 깔리며 스산한 한기가 감도는 착각마저 느껴졌다. 그걸 비웃듯 바라보던 트리슈 역시 스스로의 오른팔에 녹색의 빛을 휘감았다.
“하, 이거 뭐 무대 연출로는 적합하지만….”
그리고 그것은 이내 빛나는 활의 형태로 뒤바뀌어 그녀의 팔꿈치까지를 휘감았다. 절대로 빗나가지 않는 활, 그 이름을 기억해낸 나는 다음 순간 선언이라도 하듯 외치는 트리스탄을 바라보았다.
“페일노트.”
“타나토스님!”
뒤를 이어 뒤쪽에서 발렌타인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냉정하게 몸을 돌린 나는 팔을 움켜쥐고 있는 준우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어때?”
“보, 보시는 대로….”
“으음, 최상급의 나무로구먼.”
그 나무 위에 선 고르바초프가 흥미로운 듯 중얼거렸다. 준우의 팔 주변에는 나무를 파내고 남은 것처럼 보이는 잔해들이 가득 쌓인 채였다. 그리고 녀석의 팔은 의수처럼 변한 상태였다.
“한 번 움직여보겠나. 소년.”
고르바초프의 말에 드물게 인상을 찌푸린 준우는, 삐걱거리며 팔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손가락 하나하나까지 세심하게 움직이는 팔에 녀석은 약간 떨떠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잘, 움직이는군요.”
“그렇지? 열쇠를 아주 잘 돌렸으니까 말이야.”
“어떻게 된 거야?”
나는 발렌타인을 바라보았다.
“그, 제 열쇠랑 함께 나무에 꽂아 넣고 돌리니까…. 퍽, 하고 터지면서 이런 형태가….”
“팔은 괜찮아?”
“예에, 통증도 많이 가신 상태입니다.”
그건 참으로 다행이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팔의 상태가 계속 이런 식인지, 이게 현실에 영향을 끼치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 급한 불은 끈 셈이었다.
“그러면, 일단 돌아가서 쉬어.”
무뚝뚝하게 중얼거린 나는 급하게 판단을 내렸다. 준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날 바라보았다.
“타나토스님…?”
“나중에 이야기하자. 난 저걸 진정시킬 테니까.”
나는 뒤쪽에서 한창 전투를 벌이고 있는 린슬렛과 트리슈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야기할 것이 무척이나 많은 상황이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 알겠습니다. 트리슈를 잘 부탁드립니다.”
“뭐어, 네가 화가 날만한 짓을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내가 나중에 너한테 한 대 맞는 걸로.”
“네?”
준우가 되물었지만, 적당히 시선을 피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폭음이 일어나며 녹색의 빛이 화살처럼 땅에 꽂혔다.
“이 주정뱅이가…!!”
“하, 그런 주정뱅이 하나 간단히 쓰러뜨리지 못하고 이게 무슨 꼴이람? 선머슴!”
전투 자체는…. 간단하게 말하자면 거북이와 토끼의 싸움이라고 볼 수 있을 터였다. 린슬렛이 방패를 들고 접근할 때마다 트리슈는 화살을 쏘며 깡총 깡총 뛰어 뒤로 물러섰다. 그 성격과 별반 다르지 않은 식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