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편
<-- Chapter 3 : 선율의 기사 -->
“왜 그래?”
“매번 도망치기나 하고…. 대체 왜….”
“타나토스님!”
바로 그 순간,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나는, 숨을 헐떡거리며 서있는 교복 차림의 소녀를 발견했다. 발렌타인. 순간적으로 트리슈가 빠드득, 하고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상황이 다급하다는 생각에 그녀에게 다가갔다.
“발렌타인.”
“죄송합니다. 여, 열쇠를….”
“괜찮아?”
“아, 으…. 으읏….”
내가 묻자 거의 새하얗게 질려 있던 발렌타인이 무너지듯 어깨를 기대왔다. 여기까지 전력으로 달려온 것일까. 온몸이 땀으로 범벅에 숨이 거칠었다.
“제, 제가 괜한 고집만 안 부렸어도….”
퀘스트의 수행에 차질이 생기자 준우에게 뭔가 일이 발생한 걸까. 잠깐 고민에 빠져 있던 나는 아이템창을 열어 곧장 고르바초프를 꺼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다시 넣었다.
“…. 넌 여기에서 쉬고 있어.”
“네?”
“내가 가져다줄게.”
체력적인 부분을 생각해 한 말이었지만 발렌타인은 완강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어차피 저도 가야 해서.”
발렌타인도 베디비어 퀘스트와 관련되어 무언가 연관이 되어 있다는 건가?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 전후 관계를 따질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나는 고르바초프를 꺼내들었다.
“음, 아까의 소녀로군.”
“혹시 지금 재킷을….”
“네, 확실히 보이네요.”
무거운 목소리로 중얼거린 녀석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고르바초프를 가져가려 했다. 그리고 발렌타인이 다람쥐의 목덜미를 움켜쥐려던 순간,
“못 봐주겠네.”
트리슈가 느닷없이 고르바초프를 채갔다.
“트리슈?!”
“오랜만이네, 발렌타인. 오빠 상태가 뭐 어떻기에 여기까지도 못 온다는 건지 좀 말해줄래?”
차가운 얼굴로 중얼거린 트리슈가 발렌타인을 향해 다가섰다. 충분히 위협적인 행동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두 사람의 사이에 끼어들려고 했지만, 발렌타인 역시 지지 않겠다는 듯 트리슈를 마주 보았다.
“말씀드려봤자 또 비아냥거리실 거잖아요?”
“어머나아, 또 같은 소리를 하네. 나는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고 말하고 싶은 거지?”
“딱히 그렇게 말씀드리지는 않았는데요.”
“그럼 내 쪽에서 똑같이 말해줄까? 서로 상처만 핥고서 그렇게 ‘연기’하는 게 어디까지 계속될 것 같아?”
상처? 연기?
“트리슈…!!”
내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린 순간, 발렌타인이 이를 악물며 동시에 손을 들었다. 하지만 트리슈의 뺨을 후려치려던 손은 내게 막혔다.
“진정해.”
“타나토스님!”
“어머, 이제는 이쪽한테 꼬리치시려고?”
“…. 트리슈도.”
“사실을 말했을 뿐인 걸?”
이 녀석, 일부러 이러는가 싶을 정도로 독설가로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요염하고 사악하게 웃고 있는 트리슈를 바라보았다. 손을 잡힌 상태에서 다시 흥분한 발렌타인이 몇 번이나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나는 그걸 놔주지 않고 침착하게 트리슈를 바라보았다.
“고르바초프를 돌려줘.”
“싫은~데.”
“뭐 어쩔 생각이야?”
“오빠가 직접 찾으러 오라고 해. 그렇지 않는다면 돌려주지 않겠어.”
“…. 그럴 상황이 안 된다고요!”
“상황이고 나발이고~ 트리슈랑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야긴데요? 고르바초프는 내 손에 있는데.”
[어쩔 수, 없네.]
바로 그 순간, 나는 준우의 목소리를 들었다.
[시간과, 장소를 지정하고…. 조율을 해볼까?]
“빼빼로!”
발렌타인이 경악에 찬 목소리를 냈다. 나는 골이 아파지는 걸 느끼며 끼어들 타이밍을 찾지 못하고 두 사람 사이에서 트리슈를 돌아보았다.
어라?
녀석은 의외로 입술을 비틀듯 세게 깨물었다.
“하! 좋아, 3시간 뒤에 중학교 앞에서 보는 걸로 해.”
[…. 아슬아슬하게, 맞출 수 있겠네.]
잠시 고민을 하는가 싶던 준우는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뭔가 반발하려던 발렌타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트리슈를 원망이 섞인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럼 전, 빼빼로를 약속 시간까지 데리고 올게요.”
“헤, 나이 차가 그렇게 나는데도 아직도 말을 놓는구나? 속도 좋아. 구역질 같은 거 안 나니?”
“트리슈….”
참다 못한 내가 조심스럽게 만류했지만, 트리슈는 대답하는 대신 강하게 시선을 보냈다. 거기에는 분노와 짜증, 원망 같은 복잡한 심경이 가득 담긴 채였다.
“….”
하지만 문제는 발렌타인 쪽이었다.
“저는 당신처럼 도망치지 않았으니까요.”
“아니….”
이럴 시간이 없다고!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금 두 사람의 사이에 끼어들려던 순간, 번개와 같이 트리슈의 손이 움직였다.
짜악, 하는 소리와 함께 발렌타인의 뺨이 기울었다.
“가증스러운 년…!”
반쯤 울 것 같은 눈으로 소리친 트리슈는, 내가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 몸을 휙 돌려 대기실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나는 뺨이 붉어진 채 입을 다물고 있는 발렌타인을 조심스럽게 바라보았다.
“괜찮아?”
“네…. 죄송합니다.”
“아니, 나한테 사과할 필요는 없는데.”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으나 납득하지 못한 듯 발렌타인은 천천히 뒤로 돌아섰다.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나는 몸을 돌려 반대편으로 사라진 트리슈를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
시간이 다 되었는데 아직 준우와 발렌타인은 약속 장소에 도착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약간 걱정되는데.
나는 그런 생각이 ‘어느 쪽’으로 향하는 건지 고민하면서 눈앞의 트리슈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파하…! 맛있다♡”
지금 장소는, 중학교 바로 맞은편에 있는 편의점 앞이었다. 두 시간 전쯤 도착하자마자 곧장 편의점에서 보드카니 위스키니 하는 비싼 술들을 마구잡이로 사서 나온 트리슈는 곧장 폭음(暴飮)을 시작했다. 녀석이 종이컵에 따라서 적당히 내민 보드카에는 손도 대고 있지 않던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너무 마시는 거 아니야?”
“으응~? 오빠야말로 좀 먹으라고.”
이러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지는 않을까.
하얀 피부가 취기로 인해 벌겋게 물든 채, 녀석은 유혹하듯 혀를 내밀며 종이컵을 손으로 가리켰다. 벌써 빈 병이 하나, 둘, 세 개째. 디멘션 커넥터가 술의 종류와 도수를 정보로 표시해주었다.
일반인이 이 혼자서 저걸 마신다면 거의 급성 알코올 중독으로 병원에 실려 간다는 모양이었다. 녀석은 재킷을 입고 있기 때문에 괜찮은 것 같았지만.
“적당히 마셔.”
“안~돼♡ 오빠도 같이 마시기 전까지는 트리슈가 다 마셔버릴 테야♡”
“….”
나는 한숨을 내쉬며 종이컵을 들어 술을 털어 넣었다. 목에 액체 불꽃을 넣는 듯한 감각이 들었지만…. 그다지 역겹거나 하지는 않았다. 게임 상에서 제공되는 맥주는 현실처럼 한 잔만 마셔도 어지럽더니.
“꺄아♡ 잘했어요오! 한 잔 더?”
“아니, 됐어.”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일부러 컵을 테이블 위에서 슬쩍 치웠다. 편의점에서 의자를 사용하는 대가로 틀어주는 각종 광고 영상들이(트리슈가 산 물건에 따른) 눈앞에 재생되었다. 트리슈는 그 중 하나를 손으로 짚으며 가볍게 웃었다.
“호오, 안주 하나 먹을까?”
“됐다니까.”
“왜애? 먹자. 술만 먹으면 쓰다고오.”
“지금까지 세 병이나 비운 녀석이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
“트리쮸 머꼬 찌뽀요오♡”
“….”
“아, 알았어. 이건 너무 막 나갔네. 인정.”
혐오가 담긴 내 시선에 트리슈는 솔직하게 인정했다. 하지만 그러더니 이내 검지 끝으로 찹쌀떡 같은 볼을 꾸욱 누르며 다시금 웃어보였다.
“하지마눈~ 투리쮸라묜~ 기엽지 아나욤?”
“….”
“투리쮸 일케 기여운데에.”
마치 미움받고 싶어서 사는 것 같은 녀석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녀석의 손에 아까부터 ‘붙어’있던 술병을 낚아채 한 모금 벌컥 들이켰다. 주도권을 빼앗을 요량에 한 행동으로 반쯤 가늘게 드리워져 있던 트리슈의 눈꺼풀이 크게 드러났다.
“취하지 않으니까, 이렇게 마시는 거로군.”
목은 탈 것 같았지만.
“그렇지. 이제야 좀 이해하시네.”
“….”
딱히 나로서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어쨌든 가상과 현실의 그런…. 괴리감을 들게 하는 행위였으니까.
“그런데 오빠.”
그렇게 생각하던 중, 트리슈가 테이블 위에 몸을 기대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날 불렀다. 입안의 알코올 맛을 잠재우기 위해 사탕이라도 하나 사올까 싶던 나는, 별 생각을 하지 않고 녀석과 눈을 마주쳤다.
“지금이 기회라고?”
“무슨 기회.”
“이 트리슈에게 야한 걸 할 수 있는.”
“….”
진짜 미쳐도 곱게 미쳐야지.
“어때? 기분 좋은 거 안 할래?”
그렇게 말은 했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테이블 위에 몸을 기대고 있는 녀석의 모습은 무척이나 야했다. 풍만한 가슴이 팔위로 부드럽게 올라온 상태에서, 녀석은 조심스럽게 셔츠의 단추를 몇 개 풀었다. 그리고 나는, 고개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무언가를 보고 잠깐 어이가 없어지는 걸 느꼈다.
“춥겠다, 야.”
약간 뇌가 차갑게 굳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 나 가슴에 점 있는 거 알아?”
“굳이 알아야 되나 싶은데.”
“한 번 확인해볼래? 손으로.”
“그게 손으로 만져지는 거면 점이 아니라 사마귀야.”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 내가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 이유는 무척이나 간단했다.
“…. 가슴 사이는, 무척이나 따뜻하다고.”
녀석이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느껴졌기에.
“야.”
“응? 뭐하고 싶어?”
이쯤이라면 바보라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너 옛날에 쥬브나일 포르노 소속이었지?”
“….”
“맞아? 아니야?”
“그, 그런 재미없는 이야기 하지 말고….”
내가 되묻자 자리에서 일어선 녀석이 다시금 가까이 다가와 팔짱을 꼈다. 부드러운 것이 팔에 휘감기며 뒤를 이어 트리슈는 내 귓불을 살짝 깨물었다.
“섹스할까?”
“….”
“하자, 즐거운 거.”
역시 아까부터 드는 생각이지만….
“미움받고 싶어 하는 거라면, 타겟이 다르지 않냐?”
“무, 무슨 소리야? 오빠 고자야?”
나는 일부러 그런 이야기를 하는 트리슈를 가볍게 팔에서 떼어냈다. 그리고는 술병을 치워둘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왔어.”
사실 녀석은 시야에 드러난 이후로 여기까지 ‘걸어오는’ 일에만 5분이 넘게 걸려서…. 내가 순간적으로 복잡했던 머리가 냉정해지는 단초를 제공했지만.
“늦어서, 죄송합니다.”
“…. 아니.”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천천히 준우에게 다가가 부축했다. 일단은 타인의 눈에 띄어봤자 좋을 일은 없기 때문에 이 장소로부터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뭐, 뭐야. 그 팔은….”
뒤쪽에 있던 트리슈가 당황한 듯 목소리를 냈다.
“보면 몰라요?!”
준우의 옆에 서있던 발렌타인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재킷을 입은 상태로 있던 그녀는 내가 대신 준우의 ‘팔’을 손에 쥐자 지쳐서 숨을 몰아쉬며 물러났다.
아니, 팔이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을지도 모르겠군.
그것은 차라리 통나무에 가까웠으니까.
준우의 오른팔은, 마치 누에나방의 번데기처럼 나무껍질에 감싸인 상태였다. 그리고 그것은 거의 준우의 키만큼이나 자란 상태였다.
“일단 좀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가자.”
나는 제대로 몸을 가누지도 어려운 준우를 부축한 채 그렇게 이야기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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