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편
<-- Chapter 3 : 선율의 기사 -->
◇
마침 마지막 수업이었다는 모양이다.
“바, 바깥에서 만나는 건 처음이죠?”
“음.”
당황해 먼저 말을 꺼낸 발렌타인과 함께 교정을 거닐며 나는 무어라 대답을 해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린슬렛보다는 크고, 트리슈와 엇비슷한 정도였으니 어른스러운 편이라고 해야 할까.
설마 중학생이었을 줄이야.
“그, 뭐라고 불러야….”
“이름은 이준…. 이라고 하는데, 편하게 불러도 돼.”
“그, 그럼 그냥 평소처럼 부를게요.”
“나도 그렇게 하지.”
어색해 죽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사실 아서리안을 플레이한 이후 이렇게 가상과 현실의 모습이 다른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 갭이 어쩐지 지금의 어색한 상황을 만드는 기분이었다. 내 안에 있는 발렌타인에 대한 데이터를…. 지금 눈앞에 있는 중학생 소녀와 겹쳐서 뭔가 합의점을 도출을 해야 했으니까.
“여기는 어쩐 일로?”
“퀘스트 때문에.”
“그, 그렇군요.”
“혹시 갑자기 찾아와서 기분이 상했다면 사과할게.”
“아, 아니에요. 사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좀 기분이 나빴겠지만, 타나토스님은 괜찮아요.”
애매한 대답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린슬렛과 아저씨의 친구니까요.”
“그렇군.”
아저씨라는 건 아마 준우를 뜻하는 거겠지.
“아…. 그리고 괜찮으시다면 린슬렛에게는 제 실제 모습에 대해서는 비밀로 해주세요.”
“일부러 숨기는 거야?”
“아, 아뇨. 그래도 혹시나 나중에 불편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아, 담배도 사실은 교묘하게 위장에서 피우는 척만 하는 거랍니다.”
말하지 않으면 누가 알까 싶었다.
눈앞에서 미소를 짓고 있는 발렌타인은, 깔끔하게 교복을 갖춰입은 모습이었지만 표정이나 행동이 단정해 어른스러운 느낌이었다. 조금 무례할지도 모르겠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20대 후반의 직장인 여성이 할로윈 코스프레를 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래서, 무슨 퀘스트인 가요?”
“음?”
“베디비어와 관련되어서는 아저씨한테 들었어요.”
“…. 이걸.”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품안에서 다람쥐를 꺼내서 내밀었다. 새하얀 연초를 입에 물고 있던 고르바초프가 킁킁거리며 발렌타인의 냄새를 맡았다.
“또 다른 암컷이군.”
“그렇게 말하지 마.”
“네?”
그러자 발렌타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그런 태도에 녀석이 ‘재킷’을 착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채고는 고르바초프를 구깃구깃(?) 접어서 다시 주머니 속으로 넣었다. 아마 지금 발렌타인에게는 고르바초프가 단순히 다람쥐의 모양을 본뜬 플라스틱 덩어리 비슷한 것으로 보이는 거겠지.
“지금 재킷을 입을 수는….”
“…. 죄송해요, 지금은 좀.”
“그럼 언제쯤이면 괜찮아?”
“시간이 문제라기보다는 장소가 문제여서요.”
학교는 안 된다는 건가.
“쥬브나일 포르노로 같이 가주시겠어요?”
발렌타인의 제안에 나는 교문 쪽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그런 내 행동을 알아챈 발렌타인이 말을 이었다.
“혹시 린슬렛과?”
말하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별 생각 없이 말을 꺼냈다.
“아니, 그건 아니야. 사실 트리슈가 와있어서.”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 그 여자가요?”
발렌타인은 싸늘한 목소리를 내며 날 노려보았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에서는 대답의 여하에 따라 금방이라도 소리를 버럭 지를 것 같은 분노가 느껴졌다.
“사실 이게 트리슈의 퀘스트거든.”
일단 침착하게 대답을 했지만,
“어째서, 죠?”
발렌타인은 충격에 빠진 얼굴로 물러섰다.
“그걸 나한테 물어봤자 뭐 어….”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시겠어요?”
내가 무어라 대답하려던 순간 발렌타인이 칼처럼 말을 끊었다. 불쾌하다는 기색이 눈동자에서 느껴져 나는 입을 다물고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어쨌든 지금은 혼자 두는 편이 낫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러는 사이 트리슈를 상태를 보고 올까.
슬쩍 빠져서 뒤로 돌아선 나는 이내 교문 바깥으로 돌아갔다. 하교를 하는 학생들의 시선을 즐기고 있던 트리슈가 나를 보며 빙긋 웃었다.
“어땠어?”
“설마 중학생일 거라고는….”
“원래 저러는 게 특기니까.”
“뭐?”
“남을 속이고 기만하는 거지. 거지같은 년.”
갑작스러운 폭언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비틀린 웃음을 지어보인 트리슈는 이내 말을 이었다.
“어째서 내가 퀘스트를 가지고 있냐니? 당연한 거잖아. 나는 친동생이고 쟤는 그냥 들러붙은 똥파린데.”
“트리슈…?”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나는 뒷음을 살짝 비틀며 의아해 트리슈를 바라보았다. 벽에서 등을 떼고 일어난 그녀가 다가와 내 뒷목을 매만졌고, 이내 손에 자그마한 카메라를 든 채 웃어보였다.
“다 들었어.”
“하아.”
“진짜 짜증나는 여자네. 예나 지금이나.”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사실 알아봤자 피곤하겠지만,
“그래도 일단 따라가는 편이 낫지 않겠어?”
나는 적당히 절충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트리슈는 헛웃음을 내뱉으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커다란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왜?”
“퀘스트….”
“이따가 방송 있는 거 잊었나봐?”
“그, 그건 그렇다만….”
“그런 상황에서 지금 저 년 편의를 봐주자고?”
“트리슈 말이 좀….”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그리고 지금까지 중에서 가장 굳어진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그 딱딱함이 마치 고무공이라고 생각하고 생각하며 집었던 쇠구슬 같았다. 지금껏 여유롭고 능글맞은 트리슈의 모습과는 정반대였다.
“그건 그렇지.”
그래서 나는 살짝 뒤로 물러섰다. 트리슈는 스스로도 너무 나갔다는 사실을 자각했는지 고개를 돌린 채 입을 다물었고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뭐랄까.
외로워 보인다는 말을 하면 싫어할 것 같은.
하지만 정말로 외로워 보이는 느낌이다.
팔짱을 낀 채, 그 누구보다도 화려한 모습으로 자신을 감추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긴 속눈썹과 조각상 같은 옆얼굴에서 그림자와 드리운 채로, 하지만 그 그림자는 또한 방벽의 역할을 해내는 듯했다.
“어떻게 할까.”
그래서 나는 일단 맞춰주기로 했다.
“뭐?”
“어떻게 하고 싶은 건데, 넌.”
약간 침착하게 할 요량으로 나는 녀석의 옆에 기대어 서서 가만히 그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 오라고 해.”
“어디로?”
“방송국으로, 직접.”
“제한 시간이 괜찮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금 퀘스트창을 들여다보았다. 아직 20시간 정도 남은 상태이기는 했지만, 혹시나 무슨 일이라도 발생할까 싶었던 것이다.
“그러면 퀘스트 실패하던가.”
“…. 알았어.”
나는 어쩐지 짜증이 나는 걸 느꼈지만 필사적으로 꾹꾹 눌러 담으며 빙긋 웃었다. 그리고는 다시금 발렌타인을 향해 돌아가며 준우에게 귓속말을 걸었다. 일단 당사자에게도 이야기를 전해두어야겠지.
“김준우.”
그렇게 목소리를 낸 뒤 잠깐 멈칫하고는,
“빼빼로.”
라고 정정을 했다.
[네, 타나토스님.]
“지금 어디야?”
[가게에 있습니다만…. 잘 지내셨나요?]
“으, 으응. 너도?”
[네, 목소리가 좀 불편해 보이시는데요.]
네 여동생이 날 시종처럼 부려먹어.
“….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네?]
“아, 아무것도 아니야.”
이어진 준우의 물음에 나는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어쨌든 친오빠에게 할 소리는 아니겠지.
“사실 지금 트리슈랑 있는데…. 그 녀석이 발렌타인한테 뭐 ‘열쇠’를 건네주라는 퀘스트가 있어서.”
[….]
“그 둘이 좀 사이가 안 좋아보여서 말이지.”
그리고 나는 대강의 상황을 설명했다. 무척이나 복잡한 상황이라는 것을 자각할 정도로 길게.
“그래서, 혹시 괜찮다면…. 방송국으로 와줄 수 있어?”
[알겠, 습니다.]
그리고 녀석은 약간 떨떠름한 채 대답했다.
“빼빼로?”
[시간에 늦지 않도록 가겠습니다. 끝나고 장소랑 원하는 시간을 좀 지정해주시겠어요?]
나는 거기에 적당히 대답하고는 귓속말을 종료했다. 모르는 부분이 많은 것이 조금 답답한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어쨌든 지금 상황에서 섣불리 끼어들 수는 없었으니…. 아는 것만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트리슈 -〉 적대 -〉 발렌타인
발렌타인 -〉 적대 -〉 트리슈
이게 베이직에, 트리슈는 자신의 친오빠를 약간 가지고 노는 경향이 있으며, 발렌타인은….
무슨 관계지?
[빨리 와.]
바로 그때, 트리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나는 교문 앞에 서있는 녀석이 흉흉한 눈길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걸 발견했다.
무슨 네고시에이터도 아니고….
나는 한숨을 내쉬며 그때까지도 멍하니 서있는 발렌타인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