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편
<-- Chapter 3 : 선율의 기사 -->
그리고 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조그맣게 속삭였다.
“뭐어…?”
“시청자 반응이 최악이잖아…!”
“아, 아니.”
나는 당황해 무어라 이야기하려다 이내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이 녀석의 머릿속에는 뭐가 들어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딜 보는 거냐! 에스콰이어!”
“커헉?!”
바로 그 순간, 턱 끝으로 다람쥐의 날아 차기가 작렬했다. 얼굴이 휙 돌아가며 뒤로 나가떨어진 나는 환풍구에 세게 등을 부딪치고 말았다.
- 나이스!
- 멋있슴다! 고르바초프=상!
- 역시 소련의 사나이!
고르바초프를 응원하는 채팅이 주르륵 올라온 가운데, 녀석은 다시금 트리슈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푹신푹신해 보이는 꼬리를 세우며 나를 바라보았다.
“전투 도중 한 눈을 팔다니!”
“아니, 그러니까.”
“좋다! 그렇다면 승자가 여자를 갖는 걸로 하지!”
“….”
나는 다시금 어이가 없어지는 걸 느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트리슈는, 딱히 누군가 시키지도 않았음에 양손을 머리 뒤로 들어올려 팔이 묶인 듯한 자세를 취했다.
“뭐, 뭐야?! 나…. 나를 가진다고?! 내 섹시하고 야한 몸을 가져서 대체 어떻게 할 속셈이야! 이 변태들!”
그리고는 다시금 요염한 얼굴로 저런 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슬쩍 상기된 볼, 수치심에 살짝 입술 끝을 깨물고 있는 모습에 다시금 채팅창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딱히….”
당황해 중얼거렸지만,
“물론 아이를 낳게 할 것이다.”
고르바초프가 말을 끊으며 그런 소리를 했다.
“아니 그거 분명 이종간….”
“이 큰 골반은 아이를 낳는데 최적화된 몸이지. 거기에 가슴까지. 모유 수유에 적합한 몸이다.”
“….”
뭐에 적합해?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냐. 에스콰이어. 나는 이 여자가 마음에 들었다. 네놈은 어떻지?”
“마음대로 ㅎ….”
“아, 아앗! 오빠도 트리슈와 아이 만들기 하고 싶은 거구나! 이 음란한 몸을 자기 마음대로…!”
내가 적당히 대답하며 스파다를 꺼내들려던 순간, 얼굴을 붉힌 채 있던 트리슈가 다시금 소리를 쳤다. 마찬가지로 유혹하듯 다리 사이를 배배 꼬고 있는 모습에 채팅창이 불타올랐다.
- 타나토스 죽이러 비행기 표 끊습니다^^
- 이기면 트리슈랑 할 수 있음?
- 동양 여자가 조신하고 좋다며.
“….”
내가 스파다를 휘두른 건 그와 거의 동시였다.
“남자가 말이 뭐 그렇게 많아?”
적당히 맞춰주기로 했다.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뒤쪽으로 날아오른 고르바초프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녀석은 말 그대로 다람쥐가 위협하는 것처럼 털을 곤두세우며 나를 바라보았다.
“좋아, 어디 한 번 해보자고…. 에스콰이어!”
그리고 녀석은 날아올랐다.
“?!”
정확히 말하자면 반대쪽으로.
“어라?”
트리슈 역시 당황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고, 나는 다시금 도망치기 시작하는 녀석을 이내 쫓기 시작했다. 난간 위를 그 자그마한 몸을 이끌고 달리는 고르바초프를 보며 나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싸우자면서, 도망치는 거냐!”
“천만의 말씀! 이 고르바초프님은 모든 것을 계획해두고 있으시지!! 고르바초프류 플라잉 폼!”
그리고 녀석은 빌딩 끝에서 뛰어올랐다.
트리슈의 팬티를…. 낙하산처럼 팔과 다리에 매단 채.
“꺄앙♡ 트리슈의 팬티가 보여져버려!”
“….”
플라잉 폼?
아니 그보다 저건 언제 또 훔쳤대?
“이것은…. 내 태생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폼! 날다람쥐가 아닌 그냥 다람쥐로 태어난 나 자신이…. 스스로를 뛰어넘기 위해 고안한 폼이다아!”
허공을 두둥실 날아오른 고르바초프는 무척이나 자세한 설명을 곁들이며 바람을 타고 비행했다. 분명히 실크 재질의 팬티를 낙하산처럼 다루는 자세가 보통이 아니었지만, 멍하니 난간에 기대어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이를 악물며 그곳에서 뛰어올랐다.
“거기, 서어어엇!!”
“크흑?!”
허공에서 손을 뻗어 고르바초프의 조그마한 다리를 붙잡았다. 한순간 녀석이 숨이 턱 막힌 듯 소리를 냈고 이내 우리는 지상을 향해 추락하기 시작했다.
“아아~ 사내들이 날 두고 싸우다니!”
난간에서 굉장한 연기력을 보이고 있는 트리슈와 눈이 마주치고, 다음 순간 나는 주차되어있던 자동차에 고르바초프를 붙잡은 채 처박혔다.
콰앙! 하는 소리가 나더니 눈앞에 방어력이 하강되었다는 표시가 떴다. 등허리가 징징 우는 듯한 감각에 나는 인상을 찌푸린 채 고개를 들었고,
“고르바초프류 그림자 분신술!”
녀석은 이미 팬티 한 장을 남겨둔 채 사라진 뒤였다.
“뭐가 그림자 분신술이냐!!”
나는 트리슈의 팬티를 주머니 속에 쑤셔 넣으며 일어서 녀석을 쫓기 시작했다. 거리를 지나치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서 좌우로 비켜섰고, 녀석은 걸걸한 목소리로 길을 내라고 소리를 버럭 질러댔다.
“이…. 다람쥐 자식!!”
하지만 일단 보폭의 차이가 엄청났기에, 나는 녀석을 어렵지 않게 쫓을 수 있었다. 큰 엉덩이를 뒤뚱거리면서도 날렵하게 달려가던 녀석이 뒤를 돌아보았다.
“으, 으음! 역시 태생의 한계는!”
“너 아까는 네 아이를 낳게 한다며!”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내 외침에 한순간 눈을 빛낸 녀석은,
“고르바초프류 오의!!”
무척이나 진지한 얼굴로 소리친 뒤,
“무단횡단!!”
차도로 뛰어들어서 달리기 시작했다.
“크흑?!”
역시 오의다운 엄청난 기술이…. 아니라!!
“이거 나도 바보가 되어버리겠는데…!”
나는 그렇게 소리치며 마찬가지로 차도로 뛰어들어서 달리기 시작했다. 드넓은 8차선의 대로. 하지만 자동차 밑으로 지나칠 수 있는 이점이 있는 고르바초프와는 달리, 나는 쌩쌩 눈앞을 지나치는 차량들의 행적에 쉽게 쫓아가지 못하고 건너편으로 달려가는 고르바초프를….
바로 그 순간,
“뭣?!”
자동차가 그 위를 지나치는가 싶더니, 갑자기 고르바초프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당황해 차도 끝에서 굳어져 있던 나는 뒤늦게 달려온 트리슈가 소리치는 걸 들었다.
“차에 매달렸어!”
“저 자식…!”
“의외로 눈이 좋은 여자로군!”
이미 한참은 멀어져간 녀석이 굵직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를 악물며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본 나는, 가볍게 위로 뛰어올라 달리는 자동차 위에 착지했다. 차 안쪽에서 놀란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그곳에서 중심을 잡고 앞에 있던 차로 점프했다.
차량은 엇비슷한 속도로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사고의 위협을 줄이고 안전을 지키기 위해 모든 차량은 법률로 지정된 네트워크망에 접속, 교통 상황에 따라 엄밀하게 속도의 통제를 받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마치 차도라는 이름의 거대한 강을 떠내려가는 통나무들 같다고 해야 할까.
나는 몇 번이고 그런 차량들 위를 뛰어 고르바초프가 붙어있는 차로 접근했다. 검정색의 세단. 그 위에 착지를 한 나는, 가볍게 숨을 몰아쉬었다.
머리가 바람에 흩날렸다.
뒤쪽에는 트리슈가 먼 곳의 차량에 올라탄 채 흥미로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모습을 비추고 있는 방송 화면을 통해 유추해보자면 옆에 떠있는 둥그렇고 조그만 물체는 카메라겠지.
저 녀석, 단순히 방송 분량을 노리고….
나는 그런 예감에 가볍게 아랫입술을 깨물며 생각에 잠겼다. 차량 아래에 붙어 있을 녀석을 떼어내기 위해서는 무슨 수를 쓰면 좋을까. 고민을 하던 나는, 다시금 뼛조각으로 된 쥐를 소환해 차량 바닥에 내려놓았다.
쥐가 차량을 타고 아래로 기어 내려갔다. 차량 아래에 매달려 주변을 경계하고 있던 고르바초프가 이윽고 내가 소환한 쥐를 발견했다. 설치류의 앞니가 드러났고,
“네놈…. 보고 있구나!”
녀석이 분노를 담아 소리를 내질렀고 다음 순간, 몸이 기울어졌다.
“크윽?!”
쥐의 시야가 보여주는 바에 따르면, 녀석은 꼬리를 빳빳하게 세워 바닥을 찍어버린 상태였다. 바닥이 카카칵, 하고 갈리며 차량 하단부가 뜯겨져 나왔다.
앞으로 기울어진 차량은, 속도와 마찰력의 사이에서 붕괴했다. 투석기 위에 있던 것처럼 앞으로 튕겨져 날아간 나는, 몸이 회전하는 와중 상황을 확인했다.
수많은 차량이 도로를 질주하고 있는 와중, 고르바초프가 제동을 건 세단은 앞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바닥에 전면부가 부딪치더니 한순간 허공을 향해 높이 뛰어올랐다.
“젠장!”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착지에 동시에 세단을 받아내기 위한 준비를 했다. 뒤에서 오는 다른 차량들이 순식간에 사고를 감지하고 자동으로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발밑으로 거대하게 그림자가 지는 모습에, 나는 길게 심호흡을 하며 떨어지는 세단을 받아냈다.
“끄응…!!”
세단의 무게에 떨어지는 속도가 곱해져, 나는 무릎이 꺾이는 걸 느꼈다. 하지만 받아내고 있는 등에 힘을 주어 비틀거리면서도 쓰러지지 않고 견뎌냈다.
“히이이이…!”
발밑을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세단을 내려놓자, 그 안에서 공포에 질린 남자가 빠져나와 도망쳤다. 뒤쪽에 멈춰서있는 다른 차들 또한 앞문과 뒷문이 열린 채로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르바초프!!”
나는 반쯤 악을 쓰듯이 이름을 부르며 골목 쪽으로 도망친 고르바초프의 뒤를 따라서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녀석은 좁은 골목을 몇 번이고 재빠르게 모퉁이를 돌며 이내 시야에서 다시 사라졌다.
“제기랄….”
[오른쪽!]
바로 그때, 트리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라고…?”
[오른쪽으로 갔어!]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는 거야?
라고 물을 겨를도 없어, 나는 무작정 그 말을 따라서 달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풍경이 변화해 나는 미로처럼 얽힌 골목길 사이를 계속해서 달렸다.
[거기서 왼쪽!]
“큭!”
트리슈의 명령이 맞는가 싶었지만.
[오른쪽! 한 번 더 오른쪽! 왼쪽!]
청기 백기 게임도 아니고 말이지…!!
하지만 녀석은 대체 어디에 있기에 이런 식으로 고르바초프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거지? 갑작스레 든 의문에 나는 오더를 따라 달리면서도 계속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트리슈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자 이제 멈춰 서!]
끼익, 하고 멈춰서니,
[오른쪽에 쓰레기통 보이지? 그 안으로 숨었어.]
트리슈가 단언을 했다.
“대체 그걸 어떻게….”
물론 그 위치에 커다란 쓰레기통이 보이기는 했지만, 나는 어이가 없어지는 걸 느끼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어쨌든 밑져야 본전, 천천히 쓰레기통 앞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자….
“누오오오오오오오오옷!!!”
절규에 가까운 비명과 함께 고르바초프가 튀어나왔다. 솔직히 말해 약간 정신줄을 놓고 있던 나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며 녀석의 꼬리를 붙잡았다.
“큭, 이거 놔라! 이 비겁한 놈!”
“그럴 순…. 없지!”
나는 발버둥을 치는 녀석을 당겨 주먹으로 감싸 쥐었다. 괴로운 듯 끼긱, 하는 소리를 낸 고르바초프가 이내 조용해졌다.
“후아…. 힘드네. 잡았어?”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트리슈가 모습을 드러냈다. 뒤를 밟고 따라온 듯한 모양새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뭐가?”
“어떻게 이 녀석의 위치를 알았던 거야?”
“아하하! 그쯤이야 간단하지!”
활기차게 웃은 녀석은 가볍게 눈가를 매만졌다. 그런 동작에 나는 그게 트리슈의 스킬 중 하나임은 짐작했지만,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젠장, 죽여라…!”
그리고 고르바초프는 이미 삶을 포기한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