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편
<-- Chapter 3 : 선율의 기사 -->
◇
상황은 순식간에 전개되었다.
일단 만나자는 식으로 편지를 보내자마자 트리슈에게서 ‘현실’의 전화번호가 날아왔다. 이후 우리는 각종 협의를 거쳐 타나토스와 트리슈로서가 아닌 이준과 김시우라는 아이덴티티를 지닌 채 만나기로 했다. 단 둘이라는 조항이 붙었기에 어쩔 수 없이 린슬렛은 빠지기로 했다.
뭐, 말은 그럴싸해도 변하는 건 없지만.
얼굴도 다 본 사이고.
“하이~ 오빠. 잘 지냈어?”
오빠는 무슨 오빠냐.
나는 그런 말을 애써 삼키며 무표정한 얼굴로 트리슈를 바라보았다. 사람을 이런 장소로 불러내는가 싶더니 또 꼴은 저게 뭐냐 싶어서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일단은 커다란 리본을 단 트윈테일.
하늘하늘한 하이웨이스트 플레어스커트에 레이스 셔츠 차림. 모양이 잡힌 가슴을 받치는 듯한 복장은 뭐랄까. 청순하고 가련한 소녀를 연상시켰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눈앞의 트리슈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트리슈가 보고 싶어서 온 거구나?”
이렇게 사악하게 웃고 있는 모습과는 전혀.
거기다 유혹하듯 뻗어오는 팔의 동작이나 요염하게 웃고 있는 입술 끝은, 청순함이라는 단어와는 도저히 매치가 되질 않았다. 나는 이쪽의 귓불을 매만지려는 트리슈의 손을 밀어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언제 끝나지?”
내가 그렇게 이야기를 한 이유는 무척이나 간단했다.
그녀가 날 불러낸 장소가 방송국이었기 때문이다.
“여섯 시간 정도?”
“…. 왜?”
저도 모르게 그런 질문이 나왔다.
수도권 구석에 위치한 인터넷 방송국은, 무척이나 분주해보였다. 바퀴가 달린 행거를 끈 누군가가 옆을 스쳐지나갔고 사람들이 눈앞에 여러 개의 팝업창을 띄운 채 일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은 분명히 지금 방송이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그렇지 않아보였다.
“자리가 그쯤 되서 나니까…?”
“무슨 자리가?”
“방송 자리가.”
“….”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자니 눈앞에 팝업창을 띄운 트리슈가 나를 향해 휙 건넸다.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는 아이돌의 모습이 스크린을 통해 드러났다.
“이건?”
“지금 진행 중인 방송이야.”
“여기에서? 어마어마한 시청자 숫잔데.”
우측 하단에 떠오른 숫자는 약 10억 명이었다.
“그렇지? 방송이 그것만 나오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이야기한 트리슈는 내 손을 잡아서 어디론가 끌고 가기 시작했다. 스크린을 이것저것 매만져본 나는 이내 그 형태를 파악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국가별, 장르별, 세세하게 연령이나 인종, 성별 같은 것까지 태그가 붙어 전 세계에 스트리밍 서비스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디멘션 커넥터를 통해 간단하게 볼 수 있는, 일종의 진화된 인터넷 방송 같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문제는,
“왜 여섯 시간이나 기다려야 하는 거냐…?”
“인기가 많으니까.”
“뭐?”
“이 방송국은 일정 조건만 갖추면 누구나 방송이 가능하다는 조건이거든. 마이너 장르도 실력만 좋으면 뜰 가능성이 높아지니까. 다만 그만큼 실력을 요구하지.”
“…. 넌 그 실력이 있다는?”
“어머, 재능이라면 이 트리슈가 최고라고?”
그렇게 이야기한 녀석은 씨익 웃었지만, 눈동자에서는 귀기가 서린 상태였다. 그렇게 녀석을 따라 방송국 바깥으로 나온 나는 따사로운 햇살을 느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언어적 장벽이야 요새는 번역 기능이 무지막지하게 발전했으니 그렇다 쳐도.
“아 물론 그것만으로 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그렇겠지.
나는 트리슈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볍게 앞머리를 매만졌다. 누구에게나 기회는 열려 있다. 의도 자체는 좋은 말이었지만 반대로 생각해보자면 경쟁이 심화된다는 말이기도 했다.
3분 남짓 TV에 나온다고 해서 뭔가 달라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되겠지.
“그래서 한 가지 작전을 생각해뒀지.”
보통 나는 이럴 때 불길함을 느끼곤 했고 보통 빗나가는 일이 없었다.
“…. 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묻자니,
“타나토스 오빠가 날 도와주는 거야.”
최악의 대답이 돌아왔다.
“뭐, 어떻게?”
무대 위에서 춤이라도 추라는 건가?
“그냥 내가 무대 할 때 옆에 서있어 주면 돼. 아서리안에서도 잠깐 나를 도와주고.”
“그게 뭐가 도움이 된다는 거지?”
나는 전혀 감이 오지 않는 걸 느끼며 물었다. 트리슈는 내 눈앞에 양손을 들고는, 각자 검지 하나씩을 펼친 채 입을 열었다.
“하나는 아서리안의 기사, 트리스탄 씨.”
그녀는 한쪽 검지를 들어 올린 후,
“하나는 슈퍼 아이돌이 되실 김시우 양.”
나머지를 들어 두 손가락을 가까이했다.
“이 두 사람이 어쩌면 동일인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일반 시민들이 하게 된다면?”
“동일인물이잖냐.”
나는 생각하기도 지치는 걸 느끼며 물었다. 반대편에서 볼을 부풀린 트리슈는 단호하게 소리쳤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면, 흥미를 가질 거라는 거지!”
“….”
그러니까 이 녀석은,
“그런 뉘앙스를 주겠다는 거냐. 현실에서.”
“응응! 이해가 빨라서 좋네.”
멍청이로군.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침묵에 빠져들자니, 트리슈는 좋은 작전을 입안한 책사마냥 자랑스럽게 웃으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아서리안에서 트리스탄과 타나토스가 연합해서 방송과 퀘스트를 진행하는 거야. 방송 때마다 시우의 노래를 틀면서. 그러면서 아이돌인 시우의 곁에는 못 보던 장신의 남자가 퍼포먼스로 계속 함께 하는 거지.”
“….”
“그런 사실이 화제가 된다면 계속해서 입소문을 타고 퍼져나가겠지? 그러면 내 재능에 반한 사람들이 팬이 될 테고. 나는 유명해지는 거야!”
나는 어이가 없어지는 걸 느꼈다.
아서리안을 이런 식으로 사용하고자 하는 녀석이 있다니, 어떻게 보면 지극히 가웨인에 가까운 사고방식이었다. 가상을 통해 현실에 개입을 하려 드니까. 물론 그 녀석이나 할 킬러즈만큼 악의가 있는 행동은 아니었지만.
“두 가지 정도, 질문이 있는데.”
나는 일단 침착하게 목소리를 냈다. 반대편에서 뭐든 물으라는 듯 웃은 트리슈를 보며 이야기를 했다.
할 킬러즈가 조사를 하면 어쩔 건지.
그리고 왜 나를 끌어들인 건지.
“기본적으로 에스콰이어는 범죄자잖아.”
“응, 그렇지.”
“할 킬러즈가 만약 김시우를 찾아온다면?”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할 킬러즈는 에스콰이어를 잡을 마음이 없으니까.”
“…?”
의아한 시선을 보내자 트리슈가 씨익 웃었다.
“이 이상은 말해주기 곤란하지만.”
그 말은 무슨 의미일까.
“그리고 오빠를 끌어들인 이유는 간단해. 가웨인을 쓰러뜨렸다고 하니까. 게다가 그런 사람이 영화배우 뺨치게 잘생겼어. 화제가 되기엔 안성맞춤이지.”
“대가는?”
앞선 두 마디로 인해 나는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하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방금 전의 대화로 인해 나는 한 가지 사실에 대해 섣부르게 추측했다.
가웨인 역시 이 녀석에게 접촉한 게 아닐까. 하고.
그로서 트리스탄은, 할 킬러즈가 에스콰이어를 제대로 체포할 마음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와 같은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결심을 마쳤다. 그리고 이렇게 날 불러낸 것은, 아마 내가 모드레드와 한 배를 탔다는 걸 알게 되었다는 말이 아닐까….
“후후, 오빠가 가장 원하는 걸 주도록 할게.”
역시.
의구심이 확신으로 반쯤 뒤바뀌는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이내 인상을 찌푸렸다. 어쨌든 일이 그렇게 진행된다면, 이쪽으로서도 뭔가 확실히 묶어둘 수단은 필요해보였다. 모드레드와 같은 꼴이 날 수도 있으니.
“그럼 그건 언제….”
“아이 참, 급하네. 일단 그 전에…. 복장 컨펌부터. 그 옷 말고 다른 건 없어?”
“…. 뭐?”
“명확히 계약을 하기 전에 좀 체크해두고 싶어서. 오빠가 무대 위에서 얼마나 날 살려줄 수 있을지.”
가까이 다가온 트리스탄이 내 재킷 끝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이 모습도 나름 퇴폐적이고 음울한 맛이 있어서 나쁘진 않지만…. 뭐랄까. 음악이 그렇게까지 어두운 곡은 아니라 좀 젠틀하고 발랄했으면 좋겠는데.”
대충 이해했다.
“그거라면 이게 있는데.”
가볍게 중얼거린 나는, 디멘션 커넥터를 조작하며 주변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했다. 그리고 팝업창 위에 떠오른 복장 중, 턱시도를 선택해 갈아입었다.
옷이 슬쩍 조여드는 게 느껴졌다.
거품처럼, 그리고 픽셀 조각처럼 재킷이 몸에 달라붙으며 무분별한 형태에서 점차 턱시도의 형태를 갖춰가기 시작했다. 옷의 질감이 느껴지며 엉덩이에 바지가 달라붙고 뻗어나가 모양을 만들어냈다. 자연스럽게 손목의 커프스를 매만지니 목에 보타이가 꾹 조여드는 것이 느껴졌다. 재킷은 완전히 턱시도의 형태를 갖추었다.
“….”
그리고 트리슈는 경악한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옷이 바뀌는 게 신기하다는 듯한 태도는 아니어서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디멘션 커넥터로 모습을 비춰 약간 어긋난 타이를 올바르게 했다.
“이게 있는데.”
그리고 녀석을 보며 중얼거렸지만 반응은 없었다. 녀석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굳어져 있었다.
뭐가 이상한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나는 이내 우정현 씨의 말을 떠올리고는 한 가지 작업이 더 남았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앞머리를 가볍게 주먹으로 말아쥐듯이 잡아,
“잠시만.”
그렇게 중얼거리며 뒤쪽으로 넘겼다. 약간 모양새가 흐트러져 몇 가닥 억센 머리카락이 흘러내렸지만 나는 그런대로 만족하고는 녀석을 바라보았다.
“미친.”
그리고 그런 감상이 나왔다.
“뭐?”
“아, 아…. 아니! 아닙니다! 후, 사람들의 우상인 트리슈님에게서 이런 말이 나올 리가 없죠?”
“그걸 나한테 물어도….”
이상한 녀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