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편
<-- Chapter 3 : 선율의 기사 -->
◇
잠에서 깨 당황하고 있던 유하를 데리고 컨퍼런스장을 빠져나온 직후,
“미, 미안해요! 준!”
느닷없이 사과를 들었다.
“뭐?”
당황해 돌아본 나는 가녀린 눈썹을 찌푸리고 있는 유하의 뒤로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는 걸 깨달으며 물었다. 하지만 내 바라보면서도 몇 번이고 머뭇거리던 유하는 얼굴을 슬쩍 붉힌 채 입을 열었다.
“호, 혹시 제가 술 먹고 이상한 짓 안했나요?”
“…. 그다지?”
그녀의 명예를 위해 거짓말을 하기로 하자.
“미안해요. 준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는데.”
“아, 아니 난 괜찮아. 혼자서 잘 구경했….”
“우우우…. 미안해요오오.”
나는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서둘러 말을 지어냈지만 그게 도리어 역효과를 낸 것일까. 유하는 고개를 푹 숙이며 다시금 사과를 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나는 저도 모르게 앞머리를 매만졌다.
음.
….
“누나가 바보에요….”
말을 잘못한 것일까.
그런 유하의 반응에 나는 어쩐지 이런저런 생각이 드는 걸 느꼈다. 예전 같았으면 단순히 사과를 듣고 어색하게 상황이 마무리 되었을 것 같지만….
“바보네.”
그건 역시 좀 이상하지 싶었다.
“주, 준?”
역시나 나답지 않은 반응이었던 걸까. 유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쪽을 올려다보았다. 그런 모습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프로그램 아이콘을 눈앞에 불러왔다.
“확실히, 혼자서 외롭기는 했지.”
“그, 그건 정말 미안해요….”
“유하가 없었으니까 재미도 없고.”
“으으….”
“외로워서 죽는 줄 알았어.”
“제, 제가 어떻게 하면 화가 풀리시겠어요…?”
“글쎄에.”
그렇게 중얼거리고 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 이제 슬슬 넬을 불러내서 유하에게 강남 쪽의 구경을 시켜달라고 부탁하면 되겠지.
“뭐든지…. 시키는 대로 할게요.”
“….”
잠깐.
“하고 싶은 게 있나요?”
살짝 달콤하게 느껴지는 유하의 말에, 나는 몸이 굳어지는 걸 느끼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슬쩍 나를 바라보며 허리를 숙이고 있어, 평소보다 좀 더 타이트하게 조여드는 원피스는 풍만하게 가슴을 조이고 있다. 미안한 감정에 살짝 찡그린 눈썹, 촉촉해 보이는 입술.
“하, 하고 싶….”
“그, 그런 의미가 아니라요?!”
“아, 알고 있어! 미, 미안!”
“아, 아뇨…?! 저야말로! 그, 어휘의 선정을 이상하게 해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역시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당황해 서로 말을 주고받은 유하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긴 침묵에 빠져들었다. 뇌가 이상해진 걸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해버린 스스로에 대해 자책감을 느끼며 접싯물에 코라도 박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있어요?”
하지만 이내 유하의 달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진짜 그런 쪽으로.
“아, 아니! 없어!”
“정말요…?”
“?!”
팔뚝 사이로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져 바라보니, 유하가 팔짱을 끼고 있었다. 팔 부근에서 유하의 심장이 두근거리는 감각이 느껴질 정도였다.
“정말 없나요?”
“그, 그런 거….”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0
“매번 내 쪽에서만 다가가서…. 준은 그런 마음이 아예 없는 건가 했어요.”
“아, 아니야. 그런 건…. 하지만….”
“조금 기뻐해도, 괜찮은 걸까요?”
“…. 유, 하.”
나는 참지 못하고 그녀를 돌려세웠다.
거리, 사람들이 우리를 스쳐 지나가고 있다. 우리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붙잡고 있는 가녀린 어깨 사이로 유하의 단정한 얼굴이 보였다. 붉게 상기된 얼굴과 살짝 벌어진 입술, 망설이던 그녀가 눈을 감았다.
나는 천천히, 입술을….
“주, 주인님?!”
바로 그 순간, 우리 사이로 넬이 불쑥 튀어나왔다.
“우왁?!”
“꺅!!”
놀라 비명을 지른 유하와 나의 사이에 등장한 넬이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금 전까지 취해있다 정신을 차린 사람처럼, 갑작스레 창피한 기분이 몰려들어 나는 크게 헛기침을 했다.
“네, 넬…?”
유하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듯 이름을 불렀지만, 넬은 나를 돌아보았다.
“큰일 났어요! 큰일!”
“뭐, 뭔데 그래?”
“이상한 영상이 현재 커뮤니티에…!!”
그렇게 소리친 넬은 아서리안의 팝업창을 띄워 다급히 두드렸다. 커뮤니티 사이트로 접속해
‘타나토스’라는 단어로 검색. 그러자 수많은 글들이 쏟아져 나와….
“잠, 유하가?!”
나는 놀라서 손을 뻗었지만 넬은 이미 조회수가 가장 많은 글 하나를 클릭하고 난 뒤였다. 황망히 떠오르는 화면을 지켜보자니 이내 치직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같↘은→ 여↗자↗는→ 처↘음↘이↘야↘]
“…?”
그리고 내 목소리가 흘러나왔는데.
[내↗것↘이↘ 되→라↗]
그 내용이 심이 괴악했다.
[아, 안 돼! 나는 누구의 것도 되지 않아! 언젠가 세계의 스타가 될 아이돌 트리스탄이라고!]
뒤를 이어 트리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멍하니 서있었다.
[트↗리→스↘탄↗은→ 무→슨↗ 내↗ 다↗리↘사↗이→의↗ 대↗구↘경→탄↗ 맛↗을↘ 보↗여↗주→도↘록↗ 하↘지↗]
“흠흠, 이건 트리스탄과 대구경탄의 어미가 같다는 걸 이용한 말장난이로군요!”
나도 알아.
[아, 안 돼! 내게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후↗흐→하↘↗하→하↘하→하↗]
영상은 거기에서 끝.
“….”
“…. 주, 주인님 정말로 이런 말을 하셨어요?”
“그럴 리가 없잖아!”
나는 당황해 소리치며 넬을 바라보았다. 반대쪽에서 조작된 내 말을 받았던 목소리는 분명히 트리슈의 것이었다. 그녀가 이런 짓을? 왜?
“주, 준이 이렇게 불량스러운 아이였다니….”
“잠, 유하?!”
뭔가 생각에 잠기려던 순간, 반대편에 서있던 유하가 거의 세상이라도 무너진 것처럼 당황해 입을 가렸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지금의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할까 고민에 빠져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누나는 준을 이렇게 키운 적이 없어요!”
“유하아아아앗?!”
유하는 몸을 돌려 내게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제, 젠장?!”
“주인님!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어요!”
“아니거든! 멍청아!”
나는 유하를 쫓아 달리기 시작하며 옆에서 따라붙는 넬에게 소리쳤다. 이 멍청이, 사람을 대체 어떻게 보고 그런 쓰레기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단 말인가! 유하는 순진해서 그렇다 쳐도!
바로 그때, 전화가 걸려왔다.
린슬렛…?!
“리, 린슬렛!”
[쓰레기.]
여기 바보가 하나 더 있잖아!!!
“오해다! 내, 내 말 좀 들어줘!”
[쓰레기. 쓰레기. 쓰레기. 쓰레기. 쓰레기.]
“준은 바보오오오오오오오오!!”
“유하!”
[?! 유하 씨랑 같이 있는 거야?!]
“그, 그렇다만!”
[그러면서 여자를 하나 더?! 이 쓰레기!!]
“오해라고 했잖아아아아아!”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드는 기분이었다.
지하철역으로 달려 내려간 유하를 계속 쫓아가며, 나는 어떻게 해서든 린슬렛의 오해를 풀기 위해 뇌를 움직였다. 하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가 않았다.
아니 대체 왜 이런 걸 오해를?!
“목소리가 이상하잖아”
[그건 네가 흥분해서겠지!]
“제가 준이 흥분해 있을 때의 목소리를 모를 리가 없잖아요!”
[…?! 그걸 유하 씨가 어떻게 아는 건데!]
“주인님…! 그런 쓰레기였을 줄이야!”
세 사람의 공격이 점점 거세졌다.
마치 아까 상대한 거대한 타란튤라 세 마리가 동시에 목을 조여 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내 최대의 조커라고 할 수 있는 망령 신체는 쿨타임이다.
쿨타임이라고.
[나, 나한테는 그런 소리 안 해줬으면서!]
“저도 준에게 강하게 대해지고 싶다고요!”
“아, 주인님 의외로 초식남이니까요.”
“….”
누가 이 상황을 어떻게든 해줘.
[타나토스 씨.]
라고 생각할 무렵, 이번에는 아서리안을 통해 귓속말이 걸려왔다. 이 목소리는 분명 모드레드였다.
“모, 모드레드?!”
[너 걔한테도 손 뻗은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통화 중이셔서 부득이하게 이쪽으로 연락을 드렸습니다. 커뮤니티의 상황을 보면 기사 전력 중 하나인 트리스탄과 접촉하신 것 같은데…. 맞습니까?]
“그, 그래!”
이제야 좀 대화가 통할 사람이 나오는군.
나는 그렇게 소리치며 지하철역을 빠져나가 다시 달리는 유하를 계속 쫓았다. 아까부터 거의 2분 가까이 전력 질주를 했음에도 유하는 아무렇지도 않아보였다.
[베디비어를 쫓는 과정에서 접촉하신 겁니까?]
“으, 응! 자세한 과정은….”
[그녀에게 (삐이-)한 짓을 통해서 (삐이-)함으로서 자신의 것으로 삼으신 겁니까?]
“…?”
뭐야 얘도 바보야?
[아, 죄송합니다. 비속어 필터가…. 그럼, 다시 한 번 여쭙겠습니다. 트리스탄에게 섹….]
“그런 거 아니거든!”
[그럼 그 대화는 대체?]
[맞아! 정확히 대답하라고!]
[미남계를 쓰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나, 나한테는 왜 안 써주는 건데?! 미남계! 이미 낚은 물고기라는 거야?!]
살려줘.
◇
[하이~ 타나토스 오빠! 집에는 잘 들어갔어? 우리 오늘 너무너무 재밌었지? 해피타임이었지?]
편지의 첫 문장은 그렇게 시작했다.
[음~ 사실 오빠한테 좀 관심이 생겨서 말이야. 이 크레이지 아이돌! 트리슈님이 관심을 가져주는 거니까 가문의 영광인 줄 알라고?]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자랑.
[…. 아, 네! 바로 준비할게요.]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하는가 싶더니.
[영상 봤지? 트리슈가 재미있는 계획을 하나 생각해뒀으니까~. 관심이 가면 바로 이쪽으로 전화 줘!]
급하게 마무리를 지었다.
편지의 내용은 그게 전부였다. 나는 무척이나 정신적으로 내몰린 상태로 카페 구석에 앉아, 눈앞에 떠올라있는 키스마크를 눈으로 바라보았다.
“좋으시겠어?”
옆에 앉아 당분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릴 하이퍼 초코 우유를 마신 린슬렛이 비아냥거리듯 이야기했다. 나는 앞머리를 매만지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거 아니라고 했잖아.”
“어머, 나한테도 화내게?”
“아니….”
하지만 이내 다시 내몰렸다. 쏘아지듯 날아드는 린슬렛의 시선을 이겨내지 못한 나는 시선을 피해 옆을 돌아보았다. 디멘션 커넥터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정밀한 분석을 통해 예측해본 결과, 음성은 합성 프로그램을 통해서 만들어진 모양입니다.”
린슬렛의 반대편에 앉아있던 모드레드가 안경을 밀어올리며 무뚝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다지 높지 않은 의자였음에도 바닥에 닿지 못한 발이 가볍게 흔들렸다. 나는 어이가 없어지는 걸 느꼈다.
아니 그게 그럼 합성이 아니면 뭐겠어.
목소리의 높낮이가 계속 바뀌는데….
“에스프레소 두 잔 나왔습니다.”
최선을 다해 진정을 시킨 덕인지 유하는 아까보다 훨씬 침착해진 태도로 에스프레소를 내왔다. 조그마한 잔 두 개가 테이블 위에 놓이자 나는 감미로운 향을 맡으며 그녀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지만….
“‘두 손님’ 모두 맛있게 드세요.”
아직 화가 난 것 같았다.
“남자 손님, 계속해서 친구가 여성분들만 느시는 것 같은데, 정말 축하드려요.”
“…. 죄, 죄송합니다.”
“? 죄송할게 뭐 있어. 티티.”
“티, 티티?”
린슬렛이 슬쩍 내 쪽으로 다가서자 유하의 웃는 얼굴에 금이 갔다. 그런 모습을 보며 하! 하고 일부러 웃음소리를 낸 린슬렛이 엉덩이가 닿을 정도로 가까이 앉았다.
“음~ 애칭이에요.”
“애, 애칭?!”
“애. 사랑 애.”
“사, 사랑?!”
“….”
살려줘.
========== 작품 후기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