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편
<-- Chapter 3 : 선율의 기사 -->
◇
“트리스탄…?”
나는 인상을 찌푸린 채 눈앞에 서있는 트리슈를 바라보았다. 장난스럽게 브이 사인을 그려 보인 녀석은 이내 가볍게 얼굴 위로 손바닥을 휘둘렀다.
그러자 마치 변신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래, 아서리안의 슈퍼 아이돌. 트리스탄.”
새의 깃털이 달린 챙이 넓은 모자, 화려한 형태의 가면은 카니발의 아가씨를 연상시켰다. 슬리브리스 원피스 위에 가볍게 머플러가 내려앉았다.
“슈퍼…. 뭐?”
“아이돌.”
시간 낭비로군.
말이 통하지 않는 녀석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가볍게 혀를 차며 뒤로 돌아섰다. 어쨌든 지금 상황에서 거미가 우리를 먼저 공격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렇게 경계를 하는 듯 알을 뿌리고 있다면 큰 사고로 번질 가능성이 컸다. 어떻게든 해결해야만 했다.
“아 그리고 두 사람, 슬슬 재킷 입어.”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트리슈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는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녀석을 돌아보았다.
“뭐?”
“방송 시작할 거야.”
“무슨 방송?”
“일상에서 아서리안을 갈구하고 있을 청소년, 직장인 에스콰이어들을 위한 트리슈님의 방송이지.”
“인터넷 방송을 한다는 거냐?”
나는 어이가 없어지는 걸 느끼며 물었다.
“응응, 괜찮지? 오빠.”
“트리슈….”
“괜찮아. 괜찮아. 퀘스트 내용은 말 안할 테니까.”
“제정신이냐?”
“에이, 뭐 어때서 그래?”
“….”
정말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건가.
“누군가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어, 그런데 그게 너한테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란 거냐?”
“안 죽어. 이 게임은 그렇게 만들어져 있으니까.”
내 심각한 얼굴에도 트리스탄은 반쯤 단정 짓듯 이야기했다. 말로 해서는 통하지 않겠다는 생각에 나는 재킷을 걸친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크로맨서 재킷 기동.”
“호오, 납득해주시는 거야? 타나토스.”
“그럴 리가.”
나는 품에서 빠져나오는 마스크를 잡아 얼굴에 쓰고는 곧장 스파다를 꺼내 들었다. 트리슈는 흥미로운 눈을 한 채였고 나는 그대로 검을 녀석에게 겨눴다.
“따라와.”
“타, 타나토스님?!”
“미안, 빼빼로. 아무래도 네 여동생은 흠씬 두들겨 맞아야 정신을 차릴 것 같아서 말이지.”
“…. 역시 가웨인을 이긴 남자답네.”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나는 머리에 피가 몰리는 걸 느끼며 차갑게 중얼거렸다. 어쨌든 트리슈가 여기에서 굳이 방송을 하며, 동시에 컨퍼런스를 혼란 속으로 빠뜨릴 생각이라면 그걸 좌시할 생각은 없었다.
“내가 널 막겠어.”
“…. 우와, 되게 만화주인공처럼 말하네?”
“비아냥대고 장난치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거냐?”
“뭐 그래서, 엉덩이라도 때려주시게?”
“…. 너!!”
나는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하지만 빙긋 웃은 녀석은 이내 가볍게 몸을 돌려 엉덩이를 흔들었다. 분명한 도발이었지만 나는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자자, 어디 때려보시라고? 이것도 방송 컨텐츠로서 괜찮지 않을까? 성(性)은 가장 잘 팔리는 상품이니.”
그 말에 반쯤 이성을 잃은 내가 검을 치켜들 무렵,
“협의점을 찾아보죠.”
와이어가 날아와 나와 트리슈의 사이에 거미줄처럼 벽을 형성했다. 저도 모르게 몸을 멈춘 나는, 베이스 기타를 손에 들고 있는 준우를 돌아보았다.
“무슨 협의점…!”
“트리슈는 방송을 하고 싶은 거고, 타나토스님은 사람들을 안전하게 지키고 싶으신 거잖아요?”
“그리고 넌 컨퍼런스를 망치지 않고 싶어 하지.”
내 지적에 준우는 쓰게 웃었다.
“그거야, 지금 시점에서는 포기하는 수밖에요.”
“헤에, 또 괜찮다고 하는구나.”
바로 그 순간 트리슈는 살짝 가시가 돋친 말을 내뱉었다. 싱글싱글 웃고 있었지만 어딘가 비아냥거리는 듯한 이야기에 나는 의아한 기색을 느꼈다.
“매번 그런 식이지. 오빠는.”
“별 거 아니야. 트리슈. 괜찮아.”
너 때문에 그런 거잖아?
나는 당장에라도 그렇게 외치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감정을 억누르듯 입을 다물었다. 지금 이렇게 말꼬리를 잡아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일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
“컨퍼런스는 중지하는 걸로 가죠. 타나토스님.”
“…. 원하지 않는다면서?”
“어쩔 수 없죠, 뭐.”
웃으며 이야기하는 녀석의 모습을 보던 나는, 이내 이를 악물었다. 벽 곳곳에 붙은 거미의 알이 꿈틀거리며 기괴한 소리를 냈고 나는 앞머리를 매만졌다.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하자.
“후우….”
바로 아래층에 있는 타란튤라는 현재 재킷을 입은 우리를 명백히 인식하고 있다. 알을 뿌리고 거미줄을 치는 행동은 재킷을 입은 트리슈가 위층에 도착….
아니 잠깐, 뭔가 이상한데.
“트리슈, 네가 여기 도착한 게 언제야?”
“흐음, 이 트리슈님께 ‘협의’를 구하고 싶어?”
“…. 날려버린다.”
“농담이야. 농담. 오빠 너무 진지한 거 아니야?”
나는 대답하는 대신 녀석을 강하게 노려보았다.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쉰 그녀가 말을 이었다.
“20분 전쯤이야.”
“….”
그리고 컨퍼런스의 시작은 30분 전. 즉, 거미는 준우가 아서리안을 켜고 방안에 진입한 시점부터 거미줄을 치기 시작했다는 말이었다.
거기에 내 망자가 잡아먹혔을 때 거미의 동작은….
“아마 그럴지도.”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이내 입을 다물었다. 뭔가 머릿속을 번뜩이며 스치는 생각이 있었고, 하지만 그 뒤로 유하에 대한 것이 떠올랐다.
그래, 아래에는 유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위험한 상황은 반드시 피해야만 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만큼은 안전하게 지킨다. 그것이 지금에 이른 상황에서 최우선으로 지켜야할 일.
하지만 갤러해드라면 타협하지 않았을 것이다.
“거미는 잡아야겠어. 하지만 거기에.”
잠깐 뜸을 들이자 트리슈와 준우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나는 단호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컨퍼런스도 이대로 진행되도록 할 거야.”
“타, 타나토스님?”
“헤에, 재미있는 생각이네. 어떻게?”
“그거야 지금부터 시험을 해봐야지.”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트리슈에게서 몸을 돌렸다. 사실 내가 퀘스트에 끼어들건 끼어들지 않았건 저 녀석으로 인해 문제는 불거져 나왔을 터였다. 하지만 나는 솔직하게 말해서 타협하고 싶지가 않았다.
“아버지와 연이 닿아 있다며?”
나는 그렇게 이야기했고 준우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그렇…. 기는 합니다만.”
“그러니까 지키는 방향으로 가자는 거야.”
소란을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타란튤라를 처치한다.
혹은,
“녀석을 유인하는 거야.”
조용한 장소로.
잠깐 소란이 빚어져도 누군가 눈치 채지 못할 장소로.
“…. 왜, 왜 굳이?”
“침범하도록 두고 싶지는 않으니까.”
게임이 현실을.
“그러니까 해보자는 거야.”
나는 그렇게 선언하듯 이야기하며 트리슈와 준우를 돌아보았다. 한쪽 눈썹을 치켜뜬 채 그런 나를 바라보고 있던 트리슈가 이내 말을 이었다.
“좋은 철학이긴 하지만, 어떻게?”
“몰라.”
“…. 네?”
“그건 이제부터 알아봐야지.”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마스크를 빼고 평범한 옷처럼 보이도록 재킷의 형태를 원래대로 되돌렸다.
“어, 어떻게 하시려고요?”
“확인해 봐야지.”
“뭘…. 말입니까?”
“눈이 보이는가. 보이지 않는가를.”
그렇게 중얼거린 나는 다시 계단을 타고 컨퍼런스장 바로 앞까지 걸음을 옮겼다. 뒤를 돌아보니 준우와 트리슈가 각각 당혹과 흥미로움을 얼굴에 담은 채 뒤를 따라와 서있었다.
“너희는 여기에 있어.”
“흐으음, 뭘 하려는 건지는 몰라도 만약에 뭔가 하려다 삐끗하면 바로 큰 사고로 번지는 거 알지?”
비아냥대는 듯한 트리슈의 말을 무시한 나는 거미줄이 가득 쳐진 컨퍼런스장 내부를 바라보았다. 거미줄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방안을 돌아다니고 있는 상태에서,
“후우.”
나는 가볍게 심호흡을 하고는 그 안으로 들어섰다.
“뭣…?!”
준우가 만류하듯 손을 뻗었지만, 나는 무시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거미는 나를 인식하지 못했다. 나는 생각했던 사실이 맞아떨어지는 감각에 씨익 웃었다.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거미줄’을 피하면서.
“재킷을 안 입어서 우리를 인식하지 않던 게 아니야.”
거기에 공격을 먼저 하지 않아서 경계를 하고 있었던 것은 더더욱. 녀석은 단지 눈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준우를 찾으려 거미줄을 쳤던 것이었다.
알 또한 그 연장선상인 거겠지.
하지만 이 과정은 무척이나 큰 문제가 하나 있었다.
“….”
“푸, 푸푸우우웁!! 푸하하하하하하핫!! 저거 보래요! 저 키 큰 놈 보래요!”
죽여 버리겠어.
나는 얼굴이 빨개진 채 엉거주춤 거미줄을 피하며 계속 앞으로 걸었다. 뒤쪽에서 트리슈가 그런 식으로 나를 도발했지만 나는 다리를 쭉 벌리고, 허리를 낮췄다 올리며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적당히 중간쯤까지 갔다 돌아왔다.
“트, 트리슈.”
“푸핫! 아하하하하하! 정말, 정말 최고야! 오빠!”
“….”
배꼽을 부여잡으며 트리슈가 웃어댔다. 언제 그런 것이었는지 가면은 벗고 모자 하나만 남겨놓은 채라,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녀석을 노려보다가….
“보는 것처럼, 녀석은 눈이 보이지 않아.”
“그, 그렇군요. 그러면 어떻게 유인을?”
“….”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방금 전 망자 소환으로 불러냈던 녀석은, 거미줄에 몸이 닿자마자 타란튤라가 쏜 거미줄에 붙잡혔다. 그리고 그 과정은 철저하게 가상 속에서 이루어졌다. 나와 준우가 재킷을 입고 있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즉, 이런 것이다.
“재킷을 입은 채 거미줄에 닿으면, 그 순간 거미는 합금으로 이루어진 몸이 생성될 거야.”
그리고 현실의 존재로 탈바꿈한다.
하지만 망자는 아니다. 적어도 거미처럼 가상의 세계에 머물러있는 존재를 공격하는 한은.
“뭘 할 생각인데?”
트리슈가 흥미로운 얼굴로 물었다. 잠깐 그런 녀석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나는 이내 망자 소환을 시전. 아까처럼 뼈로 된 들짐승을 한 마리 앞으로 불러왔다.
“호오, 호오.”
쪼그려 앉은 트리슈가 녀석을 보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나는 지도를 불러와 주변의 구조를 확인했다. 지하주차장으로 이어지는 길은….
“저쪽이군.”
엘리베이터가 늘어선 복도의 끝. 나는 그곳에 마커를 세우고는 트리슈와 준우에게 보일 수 있도록 조정했다.
“내 망자가 거미줄에 닿는 순간, 타란튤라는 거미줄을 쏘아 보낼 거야. 그걸 누가 저쪽으로 당겨줬으면 해.”
“헤에.”
트리슈가 턱을 괸 채 나를 올려다보았다.
“거미줄을 쏘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저쪽 벽으로 빼내는 거야. 그리고 거미가 따라오도록 유도하는 거지.”
그로서 바깥으로 나오게 한 뒤에는 공격을 시작. 실체화를 시켜도 괜찮을 지하 주차장 내부에서 전투를 벌인다. 거리가 꽤 떨어져 있으니 괜찮겠지.
“재미있는 작전이네.”
“그럼 누가 당겨줄 수 있겠어?”
“내가 도와줄게.”
트리슈가 웃으며 손을 들었다.
“재미있어 보이거든.”
“….”
믿을 수 있으려나.
“괜찮을 겁니다.”
“네가 그런다면야….”
준우의 승낙에 나는 약간 뒤가 구린 기분을 느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반쯤 펄쩍 뛰어 자리에서 일어선 트리슈는 엉덩이를 탁탁 털며….
“잠깐!”
컨퍼런스장 안으로 들어섰다. 내가 손을 뻗었으나 그녀는 이미 안으로 들어서서는 가볍게 거미줄을 피하며 벽 끝으로 가서 섰다. 방금 전의 나와는 달리 우아하고 정숙한 동작에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젠장, 저 녀석….”
[이제 해도 돼~.]
벽에 기대어 선 녀석이 가볍게 팔을 흔들었다. 그 모습을 보던 나는 이내 준우와 함께 옆으로 물러서 망자를 문 앞을 가로지르는 벽에 접촉시켰다.
아니 근데 저 녀석, 어떻게?
거미줄이 가볍게 튕기자 나는 갑작스레 든 생각에 고개를 돌렸다.
타란튤라의 꽁무니로부터 튀어나오는 거미줄.
그리고 반대편의 트리슈는 활을 든 채였다.
“잠…!!”
저대로 쏜다면 화살은 거미줄에 분명히 닿을 터였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타란튤라는 화살의 궤적을 읽고 분명히 트리슈를 노릴 터, 만약 그녀가 거미줄에 닿기라도 한다면 끝장이었다.
하지만,
[페일노트.]
그녀는 화살을 쏘아 보냈다.
녹색의 빛으로 그려진 화살은 방향을 비틀며 정확히 내 망자의 머리에 꽂혔다. 그리고 그 충격에 의해 망자는 뒤로 튕겨져 날아갔고,
[이 트리스탄님을 못 믿은 거야?]
거미줄이 그 뒤를 따르듯 눈앞을 스쳐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