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편
<-- Chapter 3 : 선율의 기사 -->
하지만 자, 생각을 해보자.
기본적으로 이 게임은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정보량 송신 합금’의 존재로 인해 무너뜨리고 있다. 즉, 에스콰이어가 입는 재킷은 일종의 ‘게임 패드’인 셈이다.
그리고 또한, 아마 저 거미는 ‘게임 패드’가 없는 우리를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느끼는 거겠지. 그건 공정한 게임이 아닐 테니까. 하지만 가만히 있는 대신, 녀석은 끝없이 공간에 거미줄을 치고 있다.
뭔가 목적이 있다는 걸까?
“재킷을 입은 다음에 반응을 보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당장에 녀석이 공격적인 반응을 보일 터였고, 합금으로 신체를 구성해 현실에까지 영향을 끼칠지도 몰랐다. 개인적으로는 유하가 있는 상황에서 절대로 그런 짓을 하게 둘 수는 없었다.
“음, 그 수밖에 없는 걸까요?”
“절대 안 돼.”
“그렇게 말씀해주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단호하게 거절하자 준우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감돌았다. 나는 그 반응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썹을 찌푸렸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 아저씨, 이거 당신 퀘스트에요.”
“그렇군요.”
무시하자.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웃으며 서있는 빼빼로에게서 등을 돌려 방안을 거닐기 시작했다. 곳곳에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은 거미줄은, 이제는 거의 방의 반 이상을 메워가고 있는 중이었다. 컨퍼런스장 내부의 사람들이 이걸 눈으로 보게 된다면 기겁하겠다 싶을 정도로.
“응…?”
거미줄의 흐름을 눈으로 좇던 나는, 이내 그것이 조그마한 창문을 통해 바깥으로 연결되어져 있는 걸 발견했다. 가까이 가서 확인해보려고 했지만 창문 자체가 워낙 좁아 머리를 내밀기도 빠듯해보였다.
어쩔 수 없나.
“넬.”
나는 나직이 이름을 부르며 눈앞에 프로그램 아이콘을 불러왔다. 하지만 아이콘들은 무언가를 지키듯 군집해 있는 상태였고….
[시, 싫어요!]
그 안에서 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둥그런 아이콘들이 파르르 몸(?)을 떨기 시작했다.
“부탁할게 있는데.”
[네, 넬은 거미가 가장 무섭다고요!]
“눈 같은 거 가리고 잠깐만 나와봐.”
[히이이이이잉….]
내 재촉에 울며 겨자 먹기로 넬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하얗고 자그마한 손으로 눈을 가리고 있는 상태였다. 나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었다가, 재킷을 입지 않은 상태라는 걸 깨닫고 입을 열었다.
“왼쪽으로.”
“우으으 너무해요!”
“가다가 맛있는 거라도 사줄 테니까.”
“넬은 그럼 스테이크 정식 풀코스로 먹을래요.”
“그래, 그래. 좀 더 앞으로.”
나는 자연스럽게 그런 대화를 나누며 눈을 가린 넬이 창문 바깥으로 나가도록 유도했다. 당연히 실체하지 않은 녀석은 유리로 된 벽을 가볍게 통과했다.
“이제 눈 떠도 돼.”
“…? 주인님?”
바깥의 풍경을 확인한 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쪽에 거미줄 보이지?”
“네넬, 음…. 위쪽으로 연결이 되어있네요?”
“한 번 가서 확인 좀 해주겠어?”
“뭔가 불안한데요오오오….”
“부탁해.”
넬은 몇 번을 망설이다 위로 떠올라 눈앞에 사라졌다. 나는 자연스럽게 벽에 기대어서며 앞머리를 매만졌고 그녀가 뭔가 결과를 가져오기를 침착하게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준우가 가까이 다가왔다.
“뭐 발견하신 거라도 있으신지요.”
“여기, 뭔가 수상해서.”
“…? 아, 그렇군요.”
창문을 통해 바깥으로 뻗어나간 거미줄을 본 녀석이 납득하고는 그 근처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시…. 영 적극적인 태도가 아니라 나는 괜한 짓을 한 게 아닐까 걱정이 드는 걸 느꼈다.
“저기….”
“네.”
“혹시 진짜로 불편한 거라면, 하지 않아도 돼.”
“…. 지금 시점에서 그렇게 말씀하셔도.”
준우는 어색하게 웃었다.
“각오를 다지지 못한 거겠지요.”
“각오?”
“네, 각오.”
알 수 없는 소리에 나는 눈썹을 찌푸렸다. 그렇게 있자니 녀석은 다시금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지만 뭐, ‘타나토스’님이 경험치가 필요하시다면.”
“….”
그건 어딘가 이상하지 않나.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넬?”
바로 그 순간, 귓가를 짓이기듯 들려온 비명소리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넬을 불렀다.
[주, 주인님 미워요오오오!]
“무슨 일인데 그래?”
[거, 거미가 거미가아아아아!]
“젠장…!”
나는 인상을 찌푸린 채 준우를 돌아보았다.
“위로 올라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따, 따라오시죠.”
나는 녀석을 따라 컨퍼런스장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바로 옆에 있는 비상구를 통해 위층으로 올라갔다. 객실층인 건지 양옆으로 복도가 펼쳐지고 번호가 달린 문이 늘어선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히이이이잉…. 주인님 살려주세요오오오…!]
“넬, 어디야?”
그렇게 소리치자 눈앞에 푸른색으로 마커가 하나 떠올랐다. 우리는 복도를 달려 마커가 위치해있는 방문 앞에 도달했다. 하지만 당연히 문은 잠가진 상태였다.
“문을….”
어떻게 하지?
재킷을 입고 부수고 들어가?
아니 그건 상황을 더 악화시킬 가능성이….
[으아아아앙! 깨어나기 시작했어요오오!]
“깨어나?”
넬의 이어진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재킷을 기동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이내 굳게 닫혀져 있던 문이 천천히 열렸다.
“아~! 역시 왔네.”
그리고 그 안에서 여자애가 나왔다.
“…?”
진한 녹색에 가까운 머리카락은 웨이브를 그리며 허리까지 기른 상태였다. 짙은 화장에 육감적인 몸매는 허벅지를 가린 짧은 폴라 원피스에 감춰진 상태였다. 가터벨트에 스타킹, 부츠라는 어딘가 화려한 차림.
“시, 시우야?!”
뜻밖에도 그런 여자애의 모습에 반응을 보인 건 뒤쪽에 서있던 준우였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옆으로 비켜서서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안녕~ 오빠.”
오빠?
“네, 네가 왜 여기에?”
“오빠가 알바한다고 했잖아~.”
“…. 너, 설마?”
그 한 마디만으로 준우는 대략의 상황을 파악한 것 같았다. 잠깐 가볍게 웃고 있던 시우라고 불린 여자애는 곧이어 나를 돌아보았다.
“그건 그렇고, 함부로 본명으로 부르기 있어?”
그 말인즉슨,
“너도 에스콰이어라는 건가?”
“어머 오빠도?”
“….”
“아하하, 농담이야. 농담. 오빠가 누군지도 알고 있지.”
“나를?”
“타나토스잖아? 맞지?”
매혹하듯 웃으며 이야기한 녀석이 내 곁으로 다가와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나는 슬쩍 그 동작을 피해 뒤로 물러서며 말을 이었다.
“어떻게 안 거지?”
“음, 마스크 쓰고 있었을 때도 잘생겼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말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글쎄? 난 아무것도 안했는데.”
그렇게 중얼거린 녀석은,
“단지 ‘재킷’을 입고 있었을 뿐.”
의미심장한 얼굴로 웃었다.
“….”
나는 인상을 찌푸린 채 그 얼굴을 내려다보다 이내 방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눈앞의 풍경은, 평범한 호텔방이 아닌 질척거리는 점액질로 뒤덮였다.
“그렇군.”
대충 이해했다.
“뭐가 그렇군. 이에요. 이 바보!”
“미, 미안.”
내가 사과를 하자 구석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던 넬이 달려들어 이내 디멘션 커넥터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볼을 긁적거리며 주변의 풍경을 다시금 살피기 시작했다.
주변은 ‘알’로 가득했다.
재킷에 반응을 한 것일까. 호텔방 내부는 군집을 이룬 거미의 알로 가득 뒤덮인 상태였다. 속이 비치는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다리가 여러 개 달린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준우는 퀘스트 장소에 도달해있는 상황이긴 했지만, 재킷을 기동시키고 있지 않다. 따라서 거미는 우리를 인식하지 못한 상태로 있다. 하지만 뭔가 행동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그건 단순히 집을 짓는 게 아니라,
“근처에 있는 다른 에스콰이어를 경계하던 거로군.”
“흐음~ 트리슈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
어느덧 안으로 들어온 시우가 가볍게 웃으며 시치미를 뗐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나는 녀석의 ‘이곳에서’의 이름이 트리슈임을 기억하기로 했다.
“트리슈, 넌 무슨 목적으로 이곳에?”
“딱히? 지금부터 뭔가 하게 되겠지만.”
거짓말을 하고 있군.
“아 오빠, 나도 그 퀘스트 좀 공유해줘.”
“하아….”
당연하다는 듯한 트리슈의 말에 준우는 한숨을 내쉬며 데이터 덩어리를 슥 집어던졌다. 웃으며 그걸 받아들인 트리슈는 이내 몸이 굳어졌다.
“으, 으윽…. 이건….”
“쭉 이런 상태였어.”
“으에에에엑…. 싫다….”
녀석은 혐오감에 몸을 떨며 준우의 뒤로 슥 숨었다. 아니 준우가 아니라 지금은 빼빼로인가. 어쨌든….
“뭐 어떻게 하려고?”
나는 살짝 짜증이 치솟는 걸 느끼며 물었다. 트리슈가 하는 행동 자체에 그다지 무게감이라는 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개인적으로 안 좋아하는 유형.
“응? 잡아야지. 몬스터 어디에 있는데?”
“아니 사람들로 가득한데….”
“그게 더 좋은 거잖아?”
“뭐?”
“화제가 될 수 있으니까.”
“….”
그걸 노린 거였나. 이 자식.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건 중요하다고?”
나는 짜증이 치솟는 걸 느꼈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 아니면 고그나 모그처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쪽인 걸까. 어느 쪽이던 정말로 싫어하는 타입이다.
“오빠,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트리슈, 일단은 좀 진정을….”
나는 머리에 피가 도는 걸 느꼈다.
“…. 야.”
“응?”
웃고 있는 트리슈의 멱살을 쥐고 당겼다.
“장난쳐?”
“…. 어머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
아래에는 50명 가까이 사람들이 있다. 자칫하다간 그 사람들 모두가 전투에 휘말려 큰 사고를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그게 ‘화제’가 될 수 있다고?
“들었던 대로 가웨인을 쓰러뜨린 남자답네.”
“그게 무슨 상관이야. 지금 당장 재킷 해제 안 해?”
“흐음, 왜? 퀘스트는 해야지.”
“지금 그럴 때가 아니란 말이다!”
“…. 타나토스님?”
바로 그때, 준우가 나를 나직이 불렀다. 그리고 나는 녀석이 트리슈의 멱살을 쥔 내 팔을 붙잡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슬쩍 힘이 느껴졌다.
“놓고 이야기하시죠.”
“…. 그래.”
확실히 친오빠 앞에서 할 행동은 아니었군.
나는 그걸 느끼고 얌전히 손을 놓았다. 그러자니 목 폴라 부분을 가볍게 털어낸 트리슈가 이내 웃었다.
“괜찮아. 너무 흥분하지 마.”
“…. 뭐?”
“에픽 퀘스트에서 몬스터들은, 먼저 공격하지 않는 이상 반격해오지 않으니까.”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는 건데?”
“하아, 나 모르는구나. 정말.”
그리고 녀석의 눈에 약간 흥이 식은 기색이 감돌았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소리야?”
“정말 몰라? 시우를? 데뷔한지 1년이 넘은 나름대로 앨범 두 장도 낸 아이돌인데.”
“아이돌이 뭔데.”
나는 의아함을 느끼며 물었다.
“…. 오빠, 이 아저씨 조선시대에서 살다왔어?”
“말 돌리지 말고 확실히 해.”
나는 놀리는 듯한 기색에 인상을 찌푸리며 녀석에게 다가갔다. 그런 내 얼굴을 보며 여유롭게 웃은 트리슈는 곧이어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러면 이쪽은 알까?”
트리슈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가볍게 가슴 부분을 쓸었다. 그러자 가슴 부분의 천 조각이 손에 달라붙으며 녀석의 팔에 뭔가가 휘감겨 작은 활의 형태를 이루었다.
“기사 중 하나인 트리스탄.”
그리고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게 중얼거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