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편
<-- Chapter 3 : 선율의 기사 -->
◇
그리고 다음 날,
어제의 예기치 못한 만남으로 인해 기분이 찝찝한 상태인 채, 나는 오랜만에 강남까지 나온 상태였다. 근처에는 점심식사를 하러 나온 직장인들로 가득한 상태에서, 나는 가드 레일에 기댄 채 시간을 확인했다.
슬슬 올 때가 되었는데.
“헤에, 이곳이 서울의 수도라고 불리는 강남이군요!”
“그것도 오래 전 얘기지.”
흥미로운 듯 대로변의 차들을 바라보던 넬의 말에 나는 적당히 대답하며 앞머리를 매만졌다. 그러고 보니 녀석을 데리고 이곳에 오는 건 처음이었던가. 대부분 멀리 나와 봤자 신촌이었으니.
“신기하냐?”
“네넬! 뭔가 공기가 다르네요!”
“작은 나라지….”
나는 새삼 그런 사실을 느끼고는 중얼거렸다. 단순히 풍경으로만 보자면 더 나은 나라는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통일이 되었다한들 애초에 작은 나라였으니까.
하지만 뭐랄까.
“크게 보라고 했었나.”
나는 우정현 회장의 말이 머릿속을 떠도는 걸 느끼며 거기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확실히 엘레노어와 아서리안의 등장 이후 대한민국은 어째선지 각종 기술이나 과학의 집결지가 되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심지어는 사회학적으로 분석하는 학자 또한 있을 정도로.
마치 여기에 이세계로 가는 길이라도 생긴 것 마냥.
만약 그렇게 이해를 해본다면, 아서리안을 비롯한 가상의 세계는 누군가에게 있어 지극히 흥미로운 존재라는 말 또한 납득이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인간은 책임을 져야만 하는 존재인 것이다.
역시 모르겠어.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걸 느끼며 나는 고개를 돌려 차선 위로 부웅 날아오른 넬을 바라보았다. 즐거워하는 녀석의 모습에 나는 슬쩍 미소를 입에 머금었다.
“준!”
바로 그때, 뒤쪽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해요. 많이 기다렸어요?”
“나도 방금 왔어.”
그렇게 중얼거리자 유하는 빙긋 웃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무릎까지 오는 무난한 원피스에 구두, 화장도 살짝 더 진해진 데다가 좋은 향기까지 나 유하는 어른스러운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향수, 괜찮네.”
“후후, 데이트잖아요?”
“….”
그런 표현을 의식하자 나는 몸이 굳어지는 걸 느꼈다. 유하가 와인 컨퍼런스에 가자고 해서 별 생각 없이 같이 온 건데…. 아침에 ‘따로’ 출발하자고 했던 것이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단 말인가.
“농담이에요. 농담.”
겉으로도 티가 났던 것일까. 유하는 부드럽게 웃으며 팔짱을 끼었다. 그리고 그 미소처럼 부드러운 것이 팔에 닿아 나는 더욱이 긴장이 되는 걸 느꼈다.
“아, 안내할게.”
“아, 장소 알아요?”
나는 그 말에 입을 다물었다. 잠깐 그렇게 있자니 볼에 무언가 닿았고, 돌아본 나는 유하가 손수건으로 식은땀을 닦아주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으음, 준. 너무 긴장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의아한 얼굴로 날 바라본 유하가 이내 이끌고 걷기 시작했다. 그런 분위기를 읽은 건지, 아니면 단순히 강남에 온 게 즐거운 건지. 넬은 멀리서 신기하다는 듯이 강남의 거리를 둘러보고 있었다.
“후후, 이렇게 같이 나온 거 처음이네요.”
“그런, 가?”
“네, 준이 돌아오고 한 번도 없었잖아요?”
“….”
그랬었나.
“미, 미안.”
“응? 왜 사과를 하는 거예요? 준.”
“아니….”
나는 슬쩍 미안한 기분을 느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집에 돌아와, 약간은 불편한 감정이 있어 무의식중에 유하를 피하게 된 걸까.
“음, 이제부터는 불러만 주신다면.”
“헤에, 가게는 누가 보고요?”
“넬?”
“그래 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내 말에 장난스럽게 웃은 유하가 곧이어 뒤쪽의 넬을 돌아보았다. 녀석은 바닥에 쪼그려 앉아 길거리에 떠도는 비둘기를 신기하다는 듯이 보고 있었다.
“이렇게 보니 딸 같네요.”
“…. 네?”
“어, 어머. 농담이에요?”
방금 한순간 되게 기뻐 보이셨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재촉하듯 팔을 당기는 유하와 함께 강남거리를 걸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화려하게 솟아오른 한 건물 앞에 도달했다.
생각보다 화려한 걸.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호텔이지 싶은 건물은, 도저히 평범한 컨퍼런스를 개최하기에는 어딘가 이상하지 싶은 장소였다.
“여기야?”
외벽이 황금색으로 빛나는 호텔을 올려다보던 내가 묻자 유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으로 들어가니 호텔 라운지가 보였고 나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유하를 바라보았다.
“근데 유하….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네, 뭔가요?”
“왜…. 와인 컨퍼런스에?”
차라리 커피 쪽이라면 그나마 이해를 하겠는데.
“요새 사업 확장에 관심이 좀 생겨서요.”
“흐음.”
“밤에는 술을 팔아도 괜찮지 않을까요?”
“허가는 받았어…?”
“그, 글쎄요오?”
살짝 불안해져 묻자 유하는 고개를 돌리며 대답을 회피했다. 단순히 술을 즐기러 온 것일까. 하지만 유하의 경우에는 그다지 잘 마시지는 못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렇게 의아해하고 있자니 이내 엘리베이터가 도착해, 우리는 거기에 올라탔다.
“척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곳이네….”
엘리베이터는 한쪽 벽이 유리창으로 되어 바깥이 훤히 내다보이는 구조였다. 거기에 바닥은 붉은 양탄자에 벽에는 금박까지 입혀져 있어 나는 자신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장소라는 생각을 했다.
“후후, 준. 혹시 그 분 기억나세요?”
“누구?”
“왜 그때…. 하이퍼 초코 우유를 잔뜩 사간 왜, 머리가 이쯤 정도 오는 여자 손님이요.”
그렇게 중얼거린 유하는 턱 부근을 가볍게 두드렸다. 우정현 씨를 말하는 건가.
“그 분이 지난번에 오셨을 때 주셨어요. 동생하고 다녀오는 게 어떻겠냐면서. 앞으로 자주 오겠다던 걸요?”
“….”
그 양반 단 음식 얼마나 좋아하는 거야.
“괜찮으려나.”
“뭐 어때요? 구경하는 셈 치고.”
그렇게 적당히 협의를 마쳤을 무렵, 엘리베이터는 최상층에 도착했다. 우리는 거의 동시에 복도에 내려섰고 이내 정장을 입은 남자가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뭐지?
갑작스러운 풍경의 변화에 유하와 나는 동시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나는 약간 불길한 예감이 드는 걸 느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초대장만 대충 보고 건네줬나 보군.”
그리고 그런 결론을 내렸다.
우정현 씨가 굳이 나에게 나쁜 짓을 할 사람도 아니었고, 결국 ‘와인 컨퍼런스’라는 말만 보고 준 걸 텐데. 아무리 그래도 좀 확인을 해주지 싶었다. 본격적인 자리까지는 아니어도, 그녀가 건네준 컨퍼런스의 초대장은 꽤나 권위가 있어 보이시는 분들이 모이는 자리지 싶었다.
“그냥 돌아가자.”
“예? 왜요?”
“우리가 올 자리가 아니야.”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복도 끝에 있는 커다란 문과, 그 안에 보이는 손님들을 살펴보았다. 대부분이 중년의 부부들로 서로 알고 있는 사이이지 싶었다. 복장도 대부분 격식이 있어 보이는 옷들뿐.
재킷과 원피스를 입은 우리가 낄 자리가….
“아, 아니에요!”
잠깐 짜게 식은 표정을 짓고 있었더니 이내 유하가 날 단호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그리고 이내 눈앞에 팝업창을 띄우고는 거기에서 홀로그램으로 된 티켓을 하나 꺼내 나에게 보여주었다.
“초대장도 잇잖아요?”
“그건 우정현 씨의….”
“우정현 씨?”
“아 그, 초코우유 좋아하는 아줌마.”
그 말에 유하는 어떻게 이름을 아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이내 말을 이었다.
“아, 아무튼. 여기서 기다릴래요?”
“….”
그러더니 뚜벅뚜벅 문 앞으로 걸어갔다. 잠깐 멍하니 서있던 나는, 무슨 일이 있을까 하는 걱정에 팝업창을 띄워 그녀가 듣는 소리를 함께 듣기 시작했다.
[저, 저어.]
[아, 손님. 초대장을 확인해드리겠습니다.]
문 앞에 서있던 남자가 공손하게 말을 걸었다. 그리고 유하는 살짝 떨리는 표정으로 초대장을 내밀었다.
[우, 정현님….]
[네, 네! 들어가도 되나요?]
[실례지만 본인은 아니신 것 같은데.]
역시 유명한 사람이기 때문일까. 남자는 금세 차이를 알아차린 것 같았다.
[아, 네. 저에게 표를 주셔서요.]
그 말에 남자는 표와 유하를 번갈아 바라보는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죄송합니다만, 본인이 아니시면….]
[어, 어떻게든 안 될까요?]
[안 됩니다.]
남자는 딱 잘라 이야기하고는 표를 다시 건네주었다. 그 표를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던 유하는 이내 간절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 그래도! 표는 있는데…!]
[표가 중요한 자리가 아니어서요.]
그렇게 중얼거린 남자는 냉정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표가 아니라 사람, 다시 말해 누가 오느냐가 중요한 자리라는 걸까.
[그러니까 본인의 표가 아니시라면 좀.]
유하는 침울하게 고개를 숙였다. 잠깐 그런 유하를 가만히 바라보던 남자는 이내 피식 웃어보였다.
[복장도 조금, 자리와는 맞지 않으시군요.]
“…?”
저 새끼가?
[죄송합니다만, 컨퍼런스 진행에 지장이 생겨서.]
꺼지라는 건가.
[가, 감사합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린 유하가 이내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추욱 늘어진 어깨를 보던 나는, 방금 전에 남자가 한 말이 머릿속을 맴도는 걸 느꼈다.
“복장이 뭐 어쩌고 어째…?”
한 대 날려버리지 않으면 기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그를 노려보며 뚜벅뚜벅 걸어갔으나,
“주, 준?”
이내 유하에게 손이 붙잡혔다.
“돌아…. 가죠?”
“유하….”
“미, 미안해요. 괜히 시간 낭비하게 만들어서.”
“아니….”
잠깐 머뭇거리며 서있자니 유하는 애써 웃으며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그 얼굴에는 도무지 감출 수 없는 수치가 엿보였고, 나는 저도 모르게 초대장을 그녀의 손으로부터 빼앗았다.
방법이라면 있다.
“….”
“주, 준?”
“여기에 있어.”
나는 엘리베이터에 들어서려는 유하의 팔을 잡아당겨 세우고는 뒤로 돌아섰다. 그리고 디멘션 커넥터를 조작해 모르가나를 소환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