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편
<-- Chapter 3 : 선율의 기사 -->
◇
전투는 금방 끝이 났다.
“그럼, 오늘은 이만.”
“소란 피워서 미안했어!”
가볍게 인사를 한 타나토스와 린슬렛이 갑판 위에서 뛰어오르는 모습을 보며, 빼빼로는 복잡한 기분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먼 위치의 파이프관에 내려선 두 사람은 이내 모습을 감췄다.
배는 계속해서 오수로 된 호수를 떠다니고 있었다. 가끔씩 선회를 하기 위해 노가 움직이기는 했지만 언제나 그런 식이었으므로 이제는 완전히 적응을 했다. 눈앞에 아이템 창을 띄워 배의 상태를 점검한 빼빼로는 저도 모르게 압도적이었던 방금 전의 싸움을 떠올렸다.
레벨이 오른 건가.
아니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실력이 늘었나.
그동안 수많은 에스콰이어를 만나보았지만 저런 부류는 처음이었다. 근 한 달 사이의 타나토스는 거의 사람이 변했다 싶을 정도로 능력이 상승한 상태였다. 기본적인 스킬부터 시작해서 감각에 이르기까지.
앤더슨도 나름대로 강한 축에 드는 에스콰이어인데.
“가웨인을 이겼다는 게 요행은 아닌 건가…?”
슬쩍 의아함이 들어 빼빼로는 갑판에 기대어 서서 안개로 가득한 호수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단순히 전투 능력으로만 따지자면 앤더슨 역시 한국에 있는 에스콰이어 중 50위 안에 드는 실력자인데.
그런 그를 간단하게 쓰러뜨린 타나토스가 그만큼의 실력자라는 걸까. 거기에 에픽 퀘스트에 묘하게 집착을 보이는 모습에 빼빼로는 슬쩍 당황스러운 기분이 드는 걸 느꼈다. 처음 만났을 때의 그와는 많이 달랐기 때문에.
뭔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갔어?”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돌렸다. 슬쩍 고개를 돌린 빼빼로는 갑판 안쪽으로부터 모습을 드러내는 발렌타인을 발견했다.
“네, 방금.”
“어휴 라쿠스 기사단이 사라져서 이제 좀 괜찮나 싶었더니…. 린슬렛은 매번 사고를 치네.”
“하하, 그래도 계속 받아주시네요.”
“어쩔 수 없잖아? 친구인 걸.”
그렇게 중얼거린 발렌타인은 이내 가까이 다가와 빼빼로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갑작스러운 행동이었지만 빼빼로는 당황하지 않고 그녀를 끌어안았다.
“누가 본다고요?”
“엘레노어가?”
“….”
뭐, 그건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저기 빼빼로 아저씨. 어떻게 생각해?”
“뭐가요?”
“베디비어를 찾고 있다잖아. 두 사람.”
발렌타인의 말에 빼빼로는 입을 다물고 잠시 곤란해져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화를 낼 수도 없어 그는 적당히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자그마한 소녀를 원망하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발렌타인….”
“농담이야, 농담. 아저씨가 그런 거 누구보다 싫어한다는 건 내가 잘 아니까.”
자신이 플레이하는 게임으로 인해 누군가 다칠 수 있기 때문에, 그는 항상 이곳에 머무르는 것이다. 발렌타인은 상냥한 빼빼로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이상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내면에 있는 갈증은 알고 있다. 지금 자신들은 그저 가상의 공간에 갇혀 있을 뿐이기 때문에.
바로 그 순간 빼빼로의 눈앞에 팝업창이 떠올랐다.
“…. 트리스탄?”
서로 모든 권한을 공개해두기는 했지만, 발렌타인은 보지 않아도 대충 예상이 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런 예상의 근거인, 갑작스레 무겁게 가라앉은 표정을 짓고 있던 빼빼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그 언니, 아직도 아저씨한테 이것저것 시키는 거야?”
가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뒷말은 차마 끝까지 내지 못한 채, 발렌타인은 슬쩍 빼빼로에게서 떨어졌다. 제멋대로인 여동생을 단호하게 대하지 못하는 모습에 어쩐지 여자친구로서 기분이 좋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면모를 좋아하게 된 거지만.
“그래서, 타나토스님은 왜 마음에 든 건데?”
“예?”
잠깐 생각에 잠겨 있던 빼빼로는, 이내 고개를 들어 발렌타인을 바라보았다. 살짝 의구심이 어린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에 빼빼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저씨가 굳이 그런 친절을 베풀 사람은 아니잖아?”
“그런가요.”
승부에서 일부러 져준 기색이 보였기 때문이려나. 하지만 실상은 전혀 아니었다. 자신이 타나토스와의 승부에서 패배한 것은 그에게서 광기에 가까울 정도의 투지가 느껴져서 당황한 탓이었다. 하지만 그 후로 자신과 비슷한 면을 지닌 그에게 호감이 생긴 건 사실이었다.
“모르겠네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고민을 하는 걸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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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픽 퀘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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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베디비어의 여정 5/10
난이도 : ★★★★★☆☆☆☆☆
내용 : 손의 봉인구를 획득하세요.
제한 시간 : 없음
보상 : 경험치 1,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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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팔의 기사라.
사람 놀리는 짓거리는 잘한다고 생각하며 빼빼로는 저도 모르게 떨리는 오른손을 쥐었다.
◇
쥬브나일 포르노에서 별다른 소득이 없었으므로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기로 했다.
어머님과 저녁을 먹겠다는 린슬렛과 헤어진 뒤, 나는 슬쩍 주변이 조용해진 걸 느끼며 건물 위를 달렸다. 스치는 바람과 풍경이 다른 소리들을 모두 묻어버려 어쩐지 기분이 좋았다. 얼마만의 조용함이냐 싶었지만 뭔가 하나 잊고 있었다는 생각이 잠깐….
“아.”
들고 곧장 넬에 대한 것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가게 근처에서 끼익 멈춰선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디멘션 커넥터의 패널을 소환했다. 그리고 눈앞에 떠오른 둥그런 형태의 프로그램을 샅샅이 뒤져 그 구석에 있던 ‘NELL’을 바로 앞까지 당겨왔다.
하지만 그 구체는 내게서 고개를 돌렸다.
“네, 넬?”
다시금 구체 사이에 파묻히는 ‘NELL’의 모습에 나는 어쩔 줄 몰라 뒤통수를 긁었다.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미,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최선을 다해 사과했음에도 넬은 요지부동. 도무지 내 이야기를 들어줄 것 같지 않았다. 그런 모습에 나는 이를 악 물고는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화가 풀릴 때까지 이러고 있을게.”
어쨌든 거짓말을 해버렸으니 미안하다고 제대로 사과를 하고 싶었다. 나는 넬이 반응을 보일 때까지 자리에 무릎을 꿇고선 기다리기로 했다. 한순간 움찔 떨린 넬의 아이콘은 그대로 다시 구체 사이에 파묻혔다.
나는 계속해서 기다렸다. 그녀가 내 사과를 받아줄 때까지 차가운 옥상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로.
그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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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퀘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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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집으로 돌아가세요. 주인님.
난이도 : ★☆☆☆☆☆☆☆☆☆
내용 : 유하님이 기다리실 거예요.
제한 시간 : 3초 드릴 테니까요.
보상 : 경험치 10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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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조…?”
눈앞에 떠오른 퀘스트창에 나는 약간 어이가 없어지는 걸 느끼며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다른 내용을 포함해서 생각해보자면 넬이 장난을 친 모양인데.
“안 돼. 내가 잘못한 거잖아.”
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벽창호….]
“방금 넬이 말한 거지?”
[아닌데요.]
“마, 맞잖아!”
[그렇게 소리 지르실 입장이셨던가요?]
“죄, 죄송.”
나는 다시 고개를 푹 숙이고 사죄 모드로 들어갔다.
[변태.]
그 말이 화살처럼 심장을 꿰뚫었다.
[거짓말쟁이.]
두 발 째.
[두 분이서 밤새 이쌰이쌰한 거죠.]
세 발 째.
[결국 성욕의 노예였어.]
“제, 제발 그만….”
나는 죄책감으로 인해 심장에 구멍이 송송 뚫린 걸 느끼며 넬의 앞에서 몇 번이고 고개를 조아렸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눈앞에 반짝이더니 평소의 가죽(옷)에서 색깔만 흰색으로 바뀐 성스러운 넬이 튀어나왔다.
“귀여운 넬찡에게 거짓말한 것. 반성하십니까?”
“반성합니다.”
“흥, 이 벽창호…. 하루 정도는 삐쳐 있으려고 했는데.”
“뭐?”
“몰라요! 빨리 일어나요!”
얼굴을 붉힌 채 소리치는 넬의 모습에 나는 주춤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그녀의 앞에 다시금 고개를 숙여서 확실하게 사과를 했다.
“미안해. 다시는 거짓말하지 않을 테니까.”
“…. 아, 아니.”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금 가죽을 원래의 검정색으로 되돌린 넬이 내 등에 달라붙었다. 어깨 부분이 조여드는 게 느껴져, 나는 그녀가 재킷을 조종해 내 어깨를 쥐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주인님은 넬한테 거짓말하셔도 돼요. 넬은 네비게이터니까. 음, 해도 되는데….”
불확실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그녀는,
“모, 몰라요! 주인님 바보!”
다시 디멘션 커넥터 안으로 들어갔다.
“어….”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는데.
“다시 무릎 꿇을까?”
[빨리 집으로 가요!]
“….”
나는 왠지 채찍질을 당한 말처럼 앞으로 뛰쳐나갔다. 그렇게 건물 위를 다시 달리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맵 마커에 뭔가 표시되는 걸 발견했다.
“할 킬러즈….”
저도 모르게 그런 목소리를 중얼거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인상을 찌푸린 채 다시금 자리에 멈춰 섰다. 마커는 하나. 그 말인즉슨 혼자라는 말인데…. 그런 상황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건의 이후 할 킬러즈의 요원이 저런 식으로 혼자서 다니는 걸 본 적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뭐지?
분명히 녀석들은 최근에 발생한 대외적인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그리고 혹시나 있을 이미지 손상을 우려하여 저런 식의 활동이 크게 줄어들다시피 했는데. 그렇게 고민하고 있자니 넬이 다시금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주인님?”
“거기다 혼자라니.”
혼자 있는 할 킬러즈는 다른 에스콰이어들의 먹잇감이 되기에 좋았다. 함정인 걸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어쩐지 신경이 쓰이는 걸 느꼈다.
“음, 가보시려고요?”
“잠깐 상황만 보는 정도로.”
가볍게 공중으로 뛰어올라 나는 역 근처의 공원에 위치한 마커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적당히 그 근처에서 지상으로 내려온 나는, 마스크를 쓴 채로 횡단보도를 건넜다.
“….”
가로등 밑에 누군가 서있는 상태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근처에 오면 널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
담배를 피우고 있는 붉은 머리의 남자.
“백시호.”
“그래 이준. 오랜만이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녀석은 평소의 정장 위에 검정색으로 나풀거리는 재킷을 입은 상태였다. 그리고 녀석은 천천히 나를 향해 다가왔다.
“싸우자는 거냐?”
“아쉽게도. 현재 방침이 그러질 못해서.”
“…. 할 킬러즈에 들어간 거냐?”
“원래 티오가 있었거든.”
그렇게 말하면서 녀석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주변으로는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쳐 나는 그런 상황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무력적인 충돌은 없겠지만 그게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 그럼, 한 판 할까?”
고 생각한 순간,
“갈라틴.”
녀석은 검을 뽑아들었다.
“미친 새끼.”
“뭐, 농담이야.”
하지만 내가 차갑게 반응하자 다시금 품안으로 검을 넣었다. 나는 당장이라도 자리를 뜨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녀석을 향해 으르렁거리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지?”
“별 건 아니야. 단지 얼굴이 보고 싶었을 뿐.”
“….”
“증오를 벼려내기 위해서, 랄까.”
“얼른 꺼져. 나도 네놈을 상대할 시간은….”
“우정현 회장님의 아래에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
“하, 정말이었네.”
떠본 건가.
“백시호…!!”
“뭐 좋아. 그렇다면 대강의 상황은 전해 들었겠지? 이 게임을 끝내버린다고 하는 헛소리를.”
그 말에 나는 눈앞의 가웨인을 힘껏 노려보았다. 스스로의 신념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인간에게서 그런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았다.
“난 그걸 막겠어. 이준.”
녀석은 차갑게 뇌까리고는 뒤쪽으로 힘껏 뛰어올랐다. 그리고 이내 바닥에 떨어진 담배꽁초만이 남아, 나는 불쾌한 기분으로 그걸 내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