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편
<-- Chapter 3 : 선율의 기사 -->
◇
정신을 차리니 수업이 끝난 뒤였다.
“….”
책상에 늘러 붙어 있느라 자국이 남은 볼을 꾹꾹 누르며, 나는 멍한 뇌를 흔들어 깨웠다. 함께 수업을 듣던 학생들은 대부분 강의실을 빠져나간 뒤였고, 나는 하품을 하며 일어나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주인님, 어제 주무신 거 아니셨나요?”
뒤쪽에 나타난 넬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지만 나는 시선을 피했다. 물론 VR에서 실컷 시간을 보낸 것과는 별개로 몸은 잠을 자두기는 했지만…. 어쨌든 뇌는 피로감을 호소했고 덕분에 잠이 쏟아졌던 것이다.
“설마 어제도…?”
“어, 어제‘도’라니. 그렇게 많이 하지는 않았다고.”
“흐음, ‘하셨다’니 뭘 ‘하셨다’는 거죠?”
“….”
“네에에에에에에엘?”
“배고프지 않냐.”
“넬은 아까 뭐 먹었는데요.”
눈을 가늘게 뜬 채 이쪽을 노려보는 넬의 모습에 나는 애써 무뚝뚝하게 표정을 굳혔다. 하지만 녀석은 계속 의구심이 섞인 표정을 지어보였고 나는 등줄기에 식은땀이 맺히는 걸 느꼈다.
“변태.”
그리고 녀석의 결론은 그것이었다.
“….”
나는 죄책감이 등을 짓누르는 걸 느끼며 건물을 빠져나와 교정 내에 발을 디뎠다. 어쨌든 수업은 대강 마쳤으니 린슬렛에게 연락을 하면 될까. 오늘부터는 본격적으로 베디비어에 관련되어 조사를 시작해야 하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니 문제가 하나 더 발생했다.
“….”
“뭘 멍하니 있어?”
“?!”
잠깐 거기에 대해 생각해보려던 찰나, 나는 목에 차가운 무언가가 닿는 감촉에 펄쩍 뛰었다. 뒤를 돌아보니 캔 음료를 손에 든 소녀가 씨익 웃고 있었다.
“린슬렛.”
어깨 너머로 물결을 치는 머리카락을 양쪽으로 묶고, 오늘은 가벼운 후드 티에 짧은 청바지로 스포티한 느낌. 린슬렛은 이내 들고 있던 음료수를 내게 내밀었다.
“수업 시간 내내 잤지?”
“어떻게 그걸….”
“얼굴에 자국이 남아서.”
볼을 툭툭 건들며 웃는 린슬렛의 모습에 나는 얼굴이 슬쩍 붉어져선 음료수 캔을 따서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 이내 식도로 파고드는 한약의 쓴맛을 느꼈다.
“마, 맛없어….”
“응?”
이게 뭐지 싶어 나는 캔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슈퍼 자양강장 농축 DX’라고 적혀진 글자 위에 거대한 용이 똬리를 트고 ‘피로가 한방! 남성성이 한방!’이라는 캐치프레이즈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무어라 반응해야 할지 몰라 린슬렛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 그…! 남자한테 좋다고 해서!”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중얼거린 나는, 이내 린슬렛이 얼굴이 새빨간 채 굳어진 모습을 보고는 반쯤 남은 음료를 단숨에 들이켰다. 사온 성의를 생각해서 버릴 수는 없었으므로.
“그런데, 넌 괜찮은 거야?”
가볍게 묻자 린슬렛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나는 왜.”
“너도 어제 같이 밤샌 거니까.”
“아 그거라면 괜찮아. 난 수업 쨌으니까.”
“….”
“5분 전까지만 해도 동방에서 자고 있었지요.”
한심.
나는 그런 단어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린슬렛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역시 표정에서 드러난 것일까. 갑작스레 통증과 함께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고.”
린슬렛이 눈을 찌른 것이다.
“수, 수업은 나가야지….”
“흥, 너처럼 내내 잠만 자는 것보단 낫거든!”
“….”
그 말에는 반박할 수가 없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살짝 삐친 채 앞장서 걷기 시작하는 린슬렛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눈물로 시야가 얼룩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비틀거리고 있자니 이내 무언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그, 그리고 사실, 이번이 처음이야.”
“…?”
“수업 짼 거.”
가까운 곳에서 린슬렛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이 보이지 않아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일까. 나는 그녀의 그런 목소리에서 약간의 죄책감과 후련함을 느꼈다. 완벽한 딸. 완벽한 친구로서의 자신을 벗어났기 때문일까.
“잘했어.”
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한 건 아니거든.”
“자각은 있군.”
이번에는 코에 주먹이 날아들었다. 반쯤 회복된 시야로 그걸 피하며 웃은 나는 이내 뒤쪽에서 뭔가 음산한 오라(?) 같은 걸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
넬이 굳어진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응? 넬, 어디 안 좋아?”
“결국 그런 거였군요오오….”
“네, 넬?”
내가 더듬더듬 이름을 부르자 넬은 볼을 부풀렸다.
“네넬은 넬이 대답할 때 쓰는 말이고요!”
“….”
“주인님 바보! 변태!”
“넬?!”
메롱, 하고 혀를 내민 넬이 이내 픽셀 조각에 휩쓸려 눈앞에서 사라졌다. 멍하니 손을 뻗고 있던 나는 이내 한숨을 내쉬며 디멘션 커넥터를 확인했다.
눈앞에 떠오른 프로그램 아이콘 중 넬을 찾았지만…. 누르려고 할 때마다 여기저기 피하면서 실행(?)되기를 거부하는 넬.
“나 오기 전에 무슨 일 있었어?”
“…. 나중에 사과해야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창을 닫았다.
◇
쥬브나일 포르노에는 오늘도 어김없이 손님들로 가득했다. 에스콰이어인지 NPC인지는 분간하기 힘들었지만, 나는 그들에게서 시선을 돌린 채 흘러나오는 재즈 음악에나 집중하기로 했다.
사실 딱히 재즈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지금의 상황에서 그런 시늉이라도 않는다면 뭐랄까.
“….”
노이로제에 걸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반대편의 린슬렛은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였지만 나는 어쩐지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쥬브나일 포르노에 오고서 지금껏, 이곳에 있는 손님들로부터 힐끔거리는 시선이 계속해서 느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왜 그래? 티티.”
재즈 음악에 유일하게 기분 나쁜 얼굴을 하고 있던 린슬렛이 이윽고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이 시선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다 이내 입을 다물었다. 단순히 과민한 거겠지.
“다들 티티를 보고 있다고?”
“아니군.”
“응?”
“…. 단순히 내가 너무 신경을 쓰고 있는 건가 했지.”
“그럴 리가.”
“그렇다면 어째서?”
나는 슬쩍 당황스러운 기색을 느끼며 물었다. 사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일 자체가 처음이었던 만큼…. 그리고 그걸 무척이나 싫어하기에 슬슬 짜증이 나던 참이었다.
“음, 가웨인을 쓰러뜨렸으니까?”
“그렇죠.”
린슬렛이 불확실한 얼굴로 중얼거리고 다음 순간, 발렌타인이 웃으며 테이블 한쪽에 앉았다. 연분홍색의 머리에 차이나 드레스와 장죽. 나는 우아한 손짓에 다시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뭐 어때서.”
“가웨인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유저였으니까요…?”
“그딴 자식이….”
나는 거의 증오에 가까울 정도로 불쾌함을 느끼며 의자에 기대었다. 가웨인의 얼굴, 그리고 그 녀석과의 전투를 비롯한 모든 것들은, 생각할 때마다 기분이 더러웠다.
“으음,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나요.”
“딱히.”
쓸데없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었으므로 우리는 일단 가웨인과 비비안의의 정확한 목적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은 상태였다. 발렌타인과 그 일행이 알고 있는 정보는 린슬렛이 배신을 당하고 내가 구해주었다 정도.
“어쨌든 가웨인은, 단순히 종합 능력치로 따지자면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강력한 기사였으니까요.”
때문에 이런 반응인 거겠지.
갑작스레 나타난 타나토스라는 이름의 에스콰이어가 기사 계급으로서 막강한 전투력을 발휘하는 가웨인을 쓰러뜨렸다. 그래서 대단하구나! 정도.
게임이니까.
“그 녀석이 그렇게 강했던 거야?”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린슬렛이 반응했다.
“전 세계에 있는 에스콰이어 중에 단 한 명이라고…? ‘가웨인’이라는 이름을 받은 사람이 그 하나야.”
“….”
“일종의 히든 직업 같은 거죠? 가웨인이라는 이름을 빼도 그만큼 강한 에스콰이어였겠지만.”
“그런가…?”
발렌타인의 설명에도 와닿지 않는 건 매한가지였다.
“헤헤, 그걸로 치면 나도 히든 직업인데!”
볼을 붉게 물들이며 웃은 린슬렛이 이내 눈앞에 픽셀 조각과 함께 떠오른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고 보니 눈앞의 이 녀석도 ‘랜슬롯’이라는 이름의 기사였지.
“정말 대단하다니까. 1년 전만해도 내가 주는 퀘스트도 제대로 못해서 잔뜩 깨지고 돌아온 애가.”
“헤에, 그때 네가 나 놀리려고 일부러 난이도가 높은 퀘스트를 준 게 아니었던가?”
“응, 아니야. 네가 생각보다 약했던 거지.”
두 사람은 가볍게 말다툼을 해보이고는 건배를 나누었다. 와인 글래스와 맥주잔이 공중에서 부딪치는 걸 보며 잠깐 생각을 하던 나는 이내 고개를 들었다.
“…. 라쿠스 기사단은 상황이 어떻다고?”
거기에는 발렌타인이 대답해주었다.
“가웨인님과 비비안님이 사라지신 후에 앤더슨님이 이어받으셨다고는 들었는데…. 간부 계급이 꽤 많은 탈퇴를 해서 혼란스러운 상황이라던데요.”
그들은 가웨인으로부터 할 킬러즈의 진상을 들었으니 당연한 결과겠지. 하지만 두 사람이 모습을 감추었다는 말은 역시나 할 킬러즈와 함께 하고 있다는 말일까.
“나중에 한 번 더 맞붙을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그때까지 착실히 레벨을 올려두어야겠지?”
“음…. 타나토스님 레벨을 ‘올리셔야’하는 상황인가요?”
린슬렛의 이야기에 발렌타인이 고개를 돌리며 내 쪽을 돌아보았다. 가웨인과의 전투로 지금의 레벨은 90을 갓 넘긴 상황이었다. 때문에 린슬렛은 그런 표현을 쓴 거겠지만 역시 발렌타인은 모르는 거겠지.
“….”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나는 이내 데이터 조각을 휙 집어던졌다. 그걸 받아든 발렌타인이 내 스테이터스를 확인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엑…? 레벨이?”
“가웨인과 두 배 차이였지.”
“그런데 이기셨다고요? 어떻게?”
“….”
그걸 저한테 물으셔도.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지난번의 전투를 상상했다. 물론 사기 아이템인 모르가나의 역할 또한 컸지만, 그와는 별개로 녀석을 이길 수 있었던 건….
도저히 이유를 모르겠군.
그 비헤딩 슬래셔를 한 방 맞은 것만으로도 거의 재킷이 사라지기 직전까지 내몰렸던 것 같은데.
“뭐 어쨌든, 그런 식이야.”
“재킷 능력이 사기적이신…?”
그래봤자 공개한 건 레벨 정도였기에, 발렌타인은 좀처럼 상황을 납득하지 못하고 내게 다가오려 들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휙 하고 린슬렛이 손을 내밀었다.
“그 이상 티티한테 접근하지 마.”
“어머나아…. 그렇게 된 거였구나?”
“아, 아니거든!”
“뭐가?”
“응?”
“뭐가 ‘그렇게 된’ 건데에?”
“그으으으윽….”
린슬렛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나는 사이좋게 다투는 두 사람을 보면서도 머릿속으로는 가웨인에 대한 걸 떠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결론을 내렸다.
운이 좋았다.
녀석은 내가 지닌 재킷의 능력에 대해서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가장 중요한 망령 신체에 대해서는 알았지만 심리전에 유용하게 쓰이는 스킬은 전혀. 아마 그것이 유용하게 통한 거겠지.
…. 생각하고 싶지 않다.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가웨인에 대한 기억이 머릿속을 떠도는 걸 느꼈다. 녀석과 그렇게 친했던 것도, 잘 아는 사이가 아니었음에도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머저리 같은 길은 선택한 녀석이 신경 쓰였다.
나와 비슷하다고 생각해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