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편
<-- Chapter 3 : 선율의 기사 -->
◇
딱히 의도한 사항은 아니지만 지난번의 사건 이후 나와 린슬렛을 비롯해 에스콰이어들은 밤에 움직이는 경향이 짙어졌다.
낮에 게임 플레이를 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대부분 지하수도나 좁은 골목 쪽에서 수행되는 퀘스트 따위를 선호했다. 쉽게 말해서 할 킬러즈의 눈에 띌만한 플레이를 지양하게 되었다고 해야 할까.
“무슨 조직폭력배들 몸 사리는 것도 아니고….”
나는 어이가 없다는 생각에 중얼거리며 린슬렛의 뒤를 따라 밤하늘을 질주했다. 눈앞을 스치는 수많은 불빛들, 그 안에 있는 도심의 풍경은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다시금 원래의 풍경으로 돌아와 도무지 그런 싸움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무슨 소리야?”
“아냐, 아무것도.”
린슬렛의 물음에 나는 적당히 대꾸하며 재킷을 통제하는 일에 더더욱 집중하기로 했다. 딱히 이런 광경에서 느끼는 괴리감을 그녀에게 설명하기도 좀….
“뭔데.”
“….”
“뭐냐고. 대답해.”
“아, 아니.”
“대답하란 말이야.”
“도, 도시 복구가 빨리 되었구나 해서….”
“흥.”
당황한 내 대답에 린슬렛은 볼을 뾰로통하게 부풀린 채 다시 앞장서 나가기 시작했다. 최근에 이런 식으로 그녀가 진지한 얼굴을 할 때면 어떤 질문에라도 성실하게 마음을 담아 대답하게 된 것 같았다.
괜찮은 걸까. 이거.
“주인님…. 의외로 초식남이시군요.”
“초식, 뭐?”
“신경 쓰지 마세요. 옛날 말이니까.”
넬도 요새 놀리는 빈도가 빈번해졌군.
“회장님한테는 연락해뒀어?”
그렇게 약간 고민에 빠져 있자니 린슬렛이 다시금 말을 걸어왔다. 나는 디멘션 커넥터를 조작해 그녀로부터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마찬가지로 창문을 열어두겠다는 글자에 나는 슬쩍 속도를 높여 앞으로 튀어나갔다.
“이쪽.”
다시금 건물 옥상에 발을 디딘 나는 오피스텔의 위치를 확인하고는 뛰어올랐다. 레벨이 벌써 100 가까이 되어선지 몸이 이전보다 훨씬 가벼웠고, 나는 오피스텔 옥상에 발을 디디는 일이 없이 곧장 건물을 뛰어넘었다.
“오셨습니까.”
창문 안으로 들어서자 착지하자 정현 씨가 아무렇지도 않게 인사를 건네 왔다. 나는 가볍게 목례를 해 인사를 하고는 뒤쪽에서 날아드는 린슬렛을 받아주었다.
“여기는…?”
내게 안겨있다 떨어진 녀석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두운데다 살풍경한 느낌이 강한 방의 분위기에 그녀는 약간 압도된 듯싶었다.
“어서 와요. 다연 양.”
“아! 안녕하세요. 회장님.”
그런 분위기를 깨듯 정현 씨가 앞으로 나서며 인사했고, 거기에 린슬렛이 발랄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살갑게 정현 씨를 대하는 린슬렛의 모습이 어쩐지 신기했다.
“제가 혼자 살고 있는 집이니 안심해도 좋아요.”
“아, 그렇군요. 아담해서 혼자 사시기에 좋겠어요!”
“방이 열 개쯤 되어 보이는데….”
그러고 보니 두 사람 다 어마어마한 부자였지.
열 개까지는 오버였지만 눈앞에 열려있는 문짝만 해도 족히 네 개는 넘어보였다. 약간 그걸 당황해 바라보고 있던 나는 앞장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 정현 씨와 린슬렛을 따라 방으로 들어섰다.
“…. 늦으셨군요.”
그 안에는 흑발을 턱 밑에서 자른 자그마한 여자애가 서있었다. 지난번에 얼굴을 봤던 기억이 났다.
“1분밖에 지나지 않았잖아요? 모드레드.”
“정확히는 1분 37초입니다. 늦은 건 늦은 거죠.”
성질 한 번 고약하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벽에 기대어 서서 모드레드라고 불린 여자애를 빤히 바라보았다. 분명히 그 이름을 어딘가에서 들은 기억이 났다. 원탁의 기사 중 한 명.
“뭘 그렇게 빤히 보십니까?”
그렇다면 저 녀석 역시 기사 서임을 받았다는 건가.
“아니, 아무것도.”
너무 빤히 쳐다보았나 싶어 나는 가볍게 시선을 피했다. 짙은 남색의 재킷은 적당히 현대적으로 변형시킨 판초 같은 느낌이었다. 목에서부터 사선으로 단추까지 있어 여차할 때는 망토로도 쓰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간도 늦었고 하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아서리안과 관련된 이야기면 넬은….”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옆에서 흥미로운 눈을 하고 있는 넬을 돌아보았다. 미안한 말이었지만 지금부터 있을 이야기를 그녀가 들어도 좋을까 싶었던 것이다.
“아, 괜찮습니다. 어차피 디멘션 커넥터를 켜두고 있는 이상 저희의 모든 행동과 말은 엘레노어에게 수집이 되고 있을 테니까요.”
“….”
기분이 나빠지는 말이었다.
“사육하는 개미가 주인을 없애려는 음모를 꾸며도, 주인은 아무렇지도 않아하겠죠. 지금 우리의 말도 엘레노어에게는 그 정도의 일일 뿐입니다.”
개미가 주인을 없앤다라….
“역시 당신은….”
“일단 그 전에.”
내 중얼거림을 끊어낸 정현 씨는 그대로 안쪽의 책상에 기대어 앉아 린슬렛을 바라보았다.
“다연 양. 전 상무님과는 어떻게?”
“네?”
“결론이 난 건가 싶어서요.”
“음….”
결론이라면 역시 아서리안에 관해서겠지.
하지만 오늘 낮에만 하더라도 다시금 실컷 엉덩이를 얻어맞고 싸웠던 터라, 린슬렛은 대답을 꺼리는 눈치였다. 그 모습을 보던 정현 씨는 한숨을 내쉬었다.
“랜슬롯으로서 서임은 받으셨습니까?”
“그, 그거는 했죠?”
“그렇다면 문제가 더 심각해지는데….”
무거운 얼굴로 중얼거린 정현 씨는 이내 턱을 괸 채 고민에 잠겼다. 나는 그녀가 하는 고민에 대해 이해는 했지만 납득은 할 수 없는 걸 느꼈다.
“이 녀석도 성인이에요.”
“그렇겠죠. 하지만 어른이라고 해서 남을 걱정시켜도 될 권리가 생긴다는 건 아닙니다.”
그렇게 중얼거린 정현 씨는 씁쓸한 얼굴로 왼손 약지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나는 이내 우리가 딜레마에 빠져있다는 생각을 했다. 유하 역시 내가 아서리안의 플레이어라는 걸 알면 뜯어말릴 테니까. 그리고 그게 가족으로서 평범한 선택이겠지.
하지만 우리는 이미 약속을 했다.
“…. 그럼 어머님께 허락을 받고 올까요?”
곤란해 하는 린슬렛을 대신해 이야기하자 정현 씨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세상의 그 어떤 부모가 자식을 이기겠습니까.”
어쩐지 경험담처럼 들리는 목소리였다.
“다연 양…. 아니 이 호칭은 적절하지 않겠군요.”
“네, 넵….”
진지한 얼굴로 중얼거린 정현 씨가 자리에서 일어서 방 중간쯤에 서있던 린슬렛의 어깨를 잡았다. 약간 긴장을 해있던 린슬렛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연 씨, 그리고 이준 씨도. 이야기를 진행하기 전에 한 가지만 약속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정현 씨는 잠시 우리의 반응을 살폈다.
“앞으로의 싸움은 여러분이 상상하는 그 이상이 될 공산이 큽니다. 그 과정에 앞서서 한 가지 원칙을. 무엇보다도 목숨을 소중히 할 것을 약속해주세요.”
“무, 물론이죠.”
“….”
“이준 씨는?”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그런 내 눈을 똑바로 보던 정현 씨는 다시금 자리로 돌아가 깊게 심호흡을 했다. 손가락을 매만지며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저는 이 게임을 끝낼 생각입니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애초에 저희가 뿌린 씨앗이기도 하고, 그렇기 때문에 좌시하고 둘 수는 없습니다.”
“구체적인 방법은?”
“모르가나를 이용하는 겁니다.”
모르가나?
생각지 못한 물건의 등장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모르가나.”
“엘레노어를…. 해킹한다는 건가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네?”
정현 씨의 시원한 대답에 린슬렛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앞머리를 매만지며 이어지는 말을 기다렸다.
“모르가나를 통해 해킹을 시도하는 건, 그녀의 곁에서 현재의 사태를 주도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사람…?”
나는 정신이 번쩍 드는 걸 느끼며 되물었다. 저도 모르게 엉망인 얼굴을 했던 걸까. 나를 돌아본 린슬렛과 넬이 당황하는 기색을 내비추었다.
“‘이딴 짓거리’를 한 것조차 사람이라고?”
“네.”
“할 킬러즈와 마찬가지로?”
“네.”
“….”
빌어처먹을 개자식들.
나는 더 심한 말이 입으로부터 빠져나가려는 걸 막으며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그리고 슬쩍 피맛이 느껴지려고 할 때쯤 린슬렛이 다급히 다가와 내 입술을 매만졌다.
“하지 마.”
그녀가 단호한 얼굴로 중얼거리자 나는 몇 번을 망설이다 입술을 놓아주었다.
“누군데, 그거.”
“…. 그레일이라는 이름의 남자입니다.”
“그레일…?”
“네, 성배(Holy Grail)의 약어로, 스스로를 그렇게 칭하고 있습니다. 엘레노어의 뒤에 숨어서 스스로를 감추고 있을 뿐, 그가 실질적인 ‘아서리안’의 기획자입니다.”
그레일.
그 이름을 증오를 담아 머릿속에 새긴 나는 이내 뭔가 걸린다는 생각을 했다. 아서리안, 기사, 에스콰이어. 그 모든 것들은 결국에….
“자기 자신을 찾으라는 거군.”
“호오.”
내 대답에 정현 씨는 흥미롭다는 듯 눈길을 보냈다.
“성배를 찾기 위한 거잖아. 아서리안은 결국.”
기사들이 원탁에 집합한 후 자기 자신을 찾는 퀘스트를 진행한다. 그것이 그 남자가 원하는 바인 걸까.
“하지만 어째서?”
“그건….”
“에픽 퀘스트를 통해 기사를 선별한 뒤, 성배를 찾는 게 게임의 목적이라면, 그 녀석은 어째서 그런 미치광이 같은 짓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려는 거지?”
정현 씨는 입을 다물었다.
“애초에 그 남자는 누구야?”
“에, 엘레노어의 초기 개발자 중 하나입니다.”
정현 씨는 내 앞에서 처음으로 말을 더듬었다.
“왜 이런 일을 계획한 거지?”
“그건 당신이 알 바가 아닙니다.”
내 질문에 뒤쪽에 서있는 모드레드가 나섰다. 곤란한 건지 시선을 피하는 정현 씨를 대신해 앞으로 나선 그녀가 나를 노려보았다. 잠깐 지지 않고 눈을 마주치던 나는,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뭐 그래, 중요한 건 아니지.”
“…. 감사합니다. 이준 씨. 모드레드도.”
“아닙니다. 회장님.”
정현 씨는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내며 모드레드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윽고 모드레드가 고개를 숙이며 물러서자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내 말이 맞는 겁니까?”
“네, 그렇게 모든 기사의 서임이 끝난 이후, 그레일을 찾으란 퀘스트가 내려올 겁니다. 그렇게 되면 저희는 기사 전력을 이용해 누구보다 먼저 그 남자를 찾아…. 디멘션 커넥터를 해킹하는 겁니다.”
“많은 기사 전력을 확보하는 게 우선이겠네요.”
“네, 모드레드. 그리고 랜슬롯.”
그렇게 중얼거린 정현 씨는 잠시 후, 나를 돌아보았다. 역시 알고 있는 건가 싶었지만 나는 거기에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업적 퀘스트창을 불러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