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편
<-- Chapter 3 : 선율의 기사 -->
경박하게 대답한 남자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여자는 사무적인 기세로 날 돌아보았다.
“일단 가실까요.”
“….”
나는 대답 대신 린슬렛을 돌아보았다. 내게 팔짱을 낀 채 서있던 녀석은 지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하자, 응?”
◇
뭐, 그렇게 해서 우리는 그 세 사람의 안내를 받아 정현 씨의 저택으로 돌아갔다. 중간에 체력이 완전히 방전되어버린 내가 쓰러지는 바람에 덩치 큰 사내에게 업힌 일만 제외한다면 별 문제는 없었지만.
다연아!
엄마!
하고 저택의 정원에서 린슬렛과 어머님이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두 사람이 감동의 재회를 통해 새로운 관계로 거듭날 거라 예상했지만.
이놈! 이놈!
꺄악?! 어, 엄마?!
호쾌한 기술로 린슬렛을 넘겨 무릎 위에 엎드리게 만든 어머님이 엉덩이를 찰싹찰싹 때려댔던 것이다.
우리 앞에서.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나와 정현 씨. 나머지 세 사람이 보는 앞에서. 한참이나 때리던 어머님은 그런 게임 따위 당장에 그만두라고 소리를 버럭버럭 질렀지만.
그걸 네, 하고 들을 린슬렛이 아니었던 것이다.
“자네, 그래서 결국….”
바닥에 엎지른 하이퍼 초콜릿 우유 대신 새것을 가져온 유하가 공허한 눈으로 돌아갔다. 나는 거기에 무척이나 신경이 쓰이는 걸 느끼면서도 어머님의 말에 다시금 경청을 하기 시작했다.
“네, 네에….”
“직업은?”
“아, 아직 학생입니다.”
“졸업 후의 진로는?”
“….”
“자녀 계획은? 살 집은? 차는? 공과금은?”
“….”
“우리 다연이를 정말로 행복하게 해줄 수 있겠어?”
“….”
“이거 받아요.”
나왔다.
흰색의 봉투.
물론 현대에는…. 실존하는 봉투가 아니라 디멘션 커넥터로 그걸 표현하는 것이지만. 어쨌든 픽셀 조각을 모아 봉투를 형성한 어머님이 그걸 나에게 던졌다. 나는 그걸 받아서 공손히 돌려드리려고 했지만….
“열어보도록 해.”
어머님은 싸늘하게 날 노려보셨다. 나는 별 수 없이 봉투를 열어보았고 나온 것은 전자 명함이었다.
“…?”
누나가 원하는 대로 미소년 천국. 010-XXXX-XXXX.
“혹시 연기력 좀 돼?”
“네, 네?”
“거기 말이야. 각종 상황에 따른 플레이를 제공해주는 곳이야. 삼국지 플레이. 명탐정 코난 플레이. 제국주의 식민정책 플레이 등등. 일단 거기에서 살아남아ㅂ….”
“어, 엄마아아아아?!”
참다 못했는지 쿵쾅거리는 소리와 2층에서 이어지더니, 카페의 문을 통해 린슬렛이 안으로 들어왔다. 숨을 헐떡거리며 얼굴이 빨개져서는.
“역시 듣고 있었구나. 딸.”
“아…. 설마 이걸 노리고!”
“그래, 아무리 그래도 딸의 남자친구에게 이런 걸 시키지는 않아. 그는 야왕이 될 수 있는 재능을 지녔지만.”
“아니! 사귀는 게 아니라…!”
“많이, 많이 걱정했어.”
“?!”
어머님이 손수건을 들어 눈물을 훔치셨고 그 모습을 본 린슬렛이 입을 다물었다. 거짓말이 순식간에 들통이 나버린 상황에 나는 몸이 굳어진 채였지만.
“다연아!”
“어, 엄마아아아!”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어머님께서는 달려드는 린슬렛의 허리를 거꾸로 쥐고는 공중에서 멋지게 회전을 시키셨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당신의 무릎 위에 올려놓으시곤,
“이놈! 이놈! 이 못된 놈!”
“꺄악?! 자, 잠깐만!”
찰싹, 찰싹 하고 엉덩이를 때리기 시작했다.
“….”
“준?”
움찔.
“유, 유하?”
나는 본능적으로 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끼며 뒤를 돌아보았다. 인기척도 없이 가까이 다가온 유하는 식칼을 손에 든 채 웃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와도 잠깐 얘기 좀 할까요?”
“그, 그 칼은?”
“아, 이거? 커피를 만들다가. 우후후♡”
가볍게 웃은 유하가 칼날을 살짝 손으로 쓸었다. 그 말에 나는 그녀의 의도를 이해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 피로 커피를 만들려는 거구나. 그래.
정확히는 내 피로.
◇
“하아….”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기, 린슬렛.”
“말 시키지 마.”
아까부터 린슬렛은 잔뜩 뾰로통한 상태였다. 그 도톰한 볼에서 나오는 화살이 나에게 향한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나는 신경이 쓰이는 걸 느꼈다. 엄마한테 엉덩이 맞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 창피하다나 뭐라나.
“진짜, 그 할멈 너무하지 않아?!”
“그래도 널 길러주신 분이야.”
“…. 와아, 주인님. 도덕교과서에 나오는 대사 같아요.”
넬이 공허한 눈으로 내 말에 덧붙였다.
“흥, 가웨인한테는 온갖 욕을 다했으면서.”
“그, 그건 지금 상황이랑은 관계없잖아!”
린슬렛의 말에 나는 얼굴이 빨개져서는 항변하듯이 소리쳤다. 그때 한 말을 후회하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들었다고 생각하니 부끄러워졌다.
“뭐 어쨌든, 끝나고 얘기해.”
“그, 그래.”
일방적으로 대화를 끝낸 린슬렛은 가볍게 입술을 오므리고는 ‘호수’를 향해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광범위한 지역에 펼쳐진 호수를 보며 나는 그 바깥쪽을 어이가 없다는 듯이 보았다. 기왕이면 좀 실감나게 주변의 풍경까지도 신경을 쓸 것이지.
우리가 있는 장소는, 서울 시내로부터 한참이나 떨어진 고속도로의 중간 지점이었다. 그것도 톨게이트로 진입하기 위해 원형으로 건설된 도로 중간쯤의 어딘가.
증강된 현실이 호수를 보여주고 있기는 했지만…. 원래대로라면 여기는 적당히 풀과 흙으로 덮어놓은 평범한 공터겠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간간히 지나가는 차량의 불빛을 바라보다 린슬렛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호수 중간에 서있었다.
- 당신은 선택받았습니다.
- 에스콰이어 린슬렛. 앞으로 기사 랜슬롯으로서 충
실하게 자신의 임무를 수행할 것을 맹세합니까?
“맹세합니다.”
- 좋아하는 사람과 이렇게 애매한 관계에 놓여있더라
도 그 유혹에 빠지지 않겠습니까?
“매, 맹세합니다.”
- 가상현실을 이용한 사이버 섹스에 빠져들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까?
“….”
- 사이버 섹스의 위험성과 요즘 젊은이들의 무분별한
사이버 섹스에 대해서 인식하고 있습니까?
“저, 저기요?”
- 특히나 지난번에 속으로 ‘VR의 기능을 이용해 가슴
을 커지게 하면 튀-튀가 좋아하지 않을까?’라고 생
각한 것에 대해서는 열등감의 발현인지요.
“….”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언제나 여러 가지 의미에서 정신이 나간 게임이라고 생각을 했지만, 기사 서임을 할 때조차 이런 식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나는 호수 위에 서서 엘레노어인지 뭔지 모를 목소리에게 농락(?)을 당하고 있는 린슬렛을 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넬.”
“네넬! 주인님. 왜 그러세요?”
“왜 이 게임의 로그는 이런 식인 거야?”
“그, 글쎄요?”
“너도 모르는 건가?”
“네넬…. 저는 일개 NPC일 뿐이라서…. 그러니까 놀이공원으로 치면 아르바이트에 불과한 거지요!”
“….”
참으로 적절한 비유다.
- 어쨌든 당신은 랜슬롯이 되었습니다. 축하해요.
“와, 와아~ 가, 감사합니다아~.”
이어진 목소리에 어색하게 대답한 린슬렛의 주변에 가볍게 빛이 맴돌았다. 그리고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호수를 빠져나왔고, 이내 그것은 사라졌다.
“으음…. 이런 식이었다니.”
“뭐, 100만 명 정도 지켜봐주길 기대한 거야?”
“그, 그런 건 아니지만…. 사실 티티가 봐준 게 100만 명 보다 더 기쁘다고 해야 할까….”
“?”
뒤로 이어질수록 목소리가 잦아들어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렇게 있자니 린슬렛은 눈앞에 스테이터스창을 띄워 이것저것 살펴보기 시작했다.
“어때?”
“음…. 잠시만.”
내 질문에 무의식을 담아 중얼거린 그녀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클릭했다.
“아론다이트.”
그리고 린슬렛은 그 이름을 입에 담았고, 동시에 품안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원형의….
“?”
방패?
“엑?”
린슬렛은 스스로 뽑고도 당황했는지 방패를 놀라 들여다보았다. 라이온 실드와 별반 다르지 않은…. ‘버클러’에 가까운 동그란 형태의 방패. 끄트머리에서 파르스름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 이외에는, 의외로 라이온 실드보다 장식도 적고 평범한 형태였다.
“아하하!”
“…?”
그리고 린슬렛은 돌연 웃기 시작했다.
“아하하하하하! 뭐야, 이게?! 귀, 귀엽잖아!”
“너 병원 좀 가봐야 하는 거 아니냐.”
“아, 아니! 하하하하하!! 큭, 큭큭… 끄윽….”
방패를 팔에 장착한 녀석은 배꼽을 잡으면서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나는 그런 모습에 뭐라 반응해야할지 몰라 가만히 바라보았고 이내 린슬렛은 고개를 들었다.
웃음기를 싹 지운 채로.
“고마워. 티티.”
“뭐?”
“…. 글쎄?”
이상한 녀석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얼굴을 붉힌 채 씨익 웃고 있는 린슬렛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머쓱한 듯 볼을 긁적거리던 녀석은 이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 도망쳤던 거라고 생각해.”
“…. 무엇으로부터?”
“현실.”
그녀는 허탈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주다연의 현실이란 보기만 해도 피곤해지는 곳이었으니까. 학교에서든, 집에서든, 언제나 사람들이 원하는 주다연으로 있어야 했으니까. 그래서 게임의 세계에 빠져들었고 거기에서 위안을 얻었다. 하지만 겨우 깨달은 기분이었다. 이곳은 현실이 되지 못한다는 걸.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더 경계를 했어야 했다는 걸.
“가웨인도 비비안도…. 사실 내가 좀 더 신경을 썼다면 알 수 있었겠지. 그 애들에게 뭔가 있었다는 걸. 하지만 그냥 ‘아니었으면’ 하고 바라기만 했던 게 아닐까.”
“아니야.”
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며 씁쓸하게 입술을 깨무는 린슬렛을 향해 다가갔다. 이건 확실히 해두고 싶었다. 그녀가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자식들이 그만큼 치졸하고 사악했던 것뿐이야.”
“가웨인과 비비안이?”
“그리고 할 킬러즈가. 명색이 국가기관이 아서리안에 대해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을 줄이야.”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입을 다물었다.
나는 확실히 이 광기를 단순히 게임으로만 보는 녀석들을 혐오한다. 그래서 라쿠스 기사단을 비롯해 다른 유저들과의 관계를 최대한 꺼려왔던 걸지도 모른다. 린슬렛과도 처음에는 그다지 좋은 관계가 아니었으니.
하지만 그런 그들조차 결국 할 킬러즈에게 이용을 당했을 뿐이라고 생각하자면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졌다. 스스로 생각하고 있던 무언가 부서지는 듯했다.
“그러니까 린슬렛. 넌 잘못하지 않았어.”
“헤에.”
“너는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해.”
“…. 이렇게 진지할 때의 티티는 뭔가 멋있으면서도 오글오글하단 말이지. 얼굴이라도 잘생겨서 다행이야.”
“사, 사람이 진지하게 말하고 있는데.”
“매번 진지하고, 무모하고. 적당한 선에서 타협할 줄 모르는 어린애잖아? 그러니까 매번 다치고 상처입지.”
“으음….”
린슬렛은 일침에 가까운 말을 하고는 후련한 표정으로 내 손을 쥐었다. 거기에서 느껴지는 따
스함은 분명 가상의 것이 아니었다. 나를 걱정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젠 괜찮아. 내가 티티를 지켜줄게. 티티가 갤러해드가 될 때까지는 랜슬롯으로 있어줄게.”
“…. 잘 부탁해.”
“응! 나도…. 음, 어음, 여러, 모로?”
활기차게 대답을 하던 린슬렛은 이윽고 뭔가 머릿속에 떠올렸는지 얼굴을 붉힌 채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뭔가 결심을 했는지 단호한 얼굴을 한 채 말을 이었다.
“마, 만약에! 게임이 끝나는 날이 올 때가 되면 반드시 날 택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 테니까!”
“…?”
고개를 갸웃거리던 중, 린슬렛이 가볍게 발꿈치를 들었다.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나는, 입술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에 얼굴이 붉어지는 걸 느꼈다.
“물론 그때까지는 ‘현실’에서는 이정도로만.”
“가상…. 이라.”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내게 있어 모든 건 현실이었다.
“그, 그렇게 진지하게 굴면 여자들이 싫어하거든.”
비이, 하고 린슬렛이 날 노려보았다.
“죄, 죄송.”
“우으, 그렇게 풀 죽은 강아지 같은 표정 하고 있으면 진짜 미워할 수도 없잖아! 거기에….”
다시금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고,
“항상 진지하니까. 미워할 수 없는 거기도 해.”
그녀는 씨익 웃어보였다.
◇
========== 작품 후기 ==========
감기 때문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부디 감기 조심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