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편
<-- Chapter 2 : 호수의 기사 -->
“…. 어, 어쨌든 본론으로 돌아가서.”
애써 분위기를 수습하는 넬의 모습에 나는 복잡한 머릿속을 털어내듯 중얼거렸다. 아주 가끔이지만, 이 녀석은 나를 완전히 바보 취급할 때가 있는 것 같았다. 특히 여자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눌 때면.
“일단은, 누가 에픽 퀘스트에 대한 정보를 퍼뜨렸냐가 가장 중요하겠지….”
“? 그거라면 간단하잖아요.”
“뭐?”
나는 어이가 없어져 고개를 들었다. 잠깐 그런 날 빤히 바라보던 넬은 어깨를 으쓱 하고는 말을 이었다.
“라쿠스 기사단이요.”
“아니, 그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으음~ 간단한 소거법이잖아요? 에픽 퀘스트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그 퀘스트에 대한 정보가 있어야 하니까요. 하지만 인근을 꽉 잡고 있는 쥬브나일 포르노에서 함구령을 내렸다면….”
라쿠스 기사단 이외에는 없다는 건가.
“그렇다면 내부에 배신자가?”
“거기까지는 잘…. 에헤헤♡”
예기치 못한 질문이었던 걸까. 넬이 가볍게 웃어보였고 나는 눈썹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라쿠스 기사단에서 정보를 퍼뜨려서, 그로서 대규모 연합군에 가담한 자가 있다는 건가? 랜슬롯이 되기 위해서?
하지만….
“뭔가 이상해. 그럴 거였으면 린슬렛하고 결투를 벌여 승리했으면 됐을 텐데.”
결투를 벌여서 승리할 자신이 없었다는 건가?
“으음….”
머릿속이 복잡했다.
“처, 천천히 생각하시죠?”
“그보다 좀 더 큰 흐름을 봐야합니다.”
바로 그 순간,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귀 밑에서 자른 짧은 머리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바가지를 들어 위험한 곳(?)을 가렸다.
“윽…! 나가주세요!”
“순정만화 주인공 같은 반응이로군요.”
“아하하하! 정말이네요!”
넬이 웃으며 장난스럽게 덧붙이자, 나는 얼굴을 붉히며 힐끔 노려보았다. 하지만 정현 씨는 그런 내 말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가까이 다가왔다.
“걱정 마십시오. 딱히 흥미가 있지는 않으니.”
“바, 바깥에서 이야기를….”
“린슬렛 양에게는 들려드리고 싶지 않은 문제라, 양해를 구해도 되겠습니까?”
“안 구해도 들어올 거잖아요!”
“그렇군요.”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한 정현 씨는 어른스러운 미소를 입에 담았다. 이쪽의 모습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태도에 나는 얼굴이 붉어지는 걸 느꼈다.
“그보다 좀 의외입니다. 가장 사건과 관련이 없던 넬 양께서 핵심을 찌르실 줄이야….”
“와, 정말요? 주, 주인님! 넬이 핵심을…. 엑?”
“?!”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굳어졌다.
권한을 넘겨주지 않았는데도 넬을 볼 수 있다니.
“뭘 그렇게 놀라십니까.”
“어떻, 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도움을 주었습니다만.”
“또 그 얘깁니까….”
나는 질리는 걸 느끼며 중얼거렸다. 어쨌든 땀은 충분히 씻어냈으므로 나는 바가지를 중요한 부위(?)에 댄 채 벽에 붙어서는 바깥쪽으로 향했다.
“어쨌든, 좀 더 큰 것을 봐야한다니요?”
“네, 지금 당신께 말씀드릴 부분은 아닙니다만.”
“그럼 어째서…?”
내 말에 정현 씨는 길게 한숨을 내쉰 후 등을 돌린 채 벽에 기대어 섰다. 수건으로 몸을 대충 닦아내고 셔츠와 옷을 걸친 나는 망설이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날이 밝으면 전 상무님께 사정을 설명 드린 후, 이곳으로 모셔올 생각입니다. 주다연 양이 아서리안의 플레이어라는 부분을 설명하자면 좀 어렵겠지만….”
“네?”
나는 놀라서 되물었다. 하지만 이내, 그 말이 뜻하는 바를 생각하고는 어이가 없어지는 걸 느꼈다.
“자, 잠깐만요? 린슬렛은 앞으로 3일 동안….”
“린슬렛이 아니라 주다연이겠죠.”
하지만 정현 씨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이제는 게임을 할 시간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는 정현 씨의 목소리에서는 약간 한심해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나는 수치심에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지만 반박하지 못하고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시간이 없으므로 핵심만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주다연 양의 디멘션 커넥터를 해제하십시오.”
“이유가 뭐죠?”
“이대로 게임 플레이를 단행했다가는, 그녀가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쯤이야 저희도 각오를….”
“상황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죽기야 하겠어요? 아서리안은 지금껏….”
“하지만 그걸 플레이하고 있는 건 인간이죠.”
“….”
“교활하디 교활한 인간.”
정현 씨의 지적에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무슨 말인 거지? 단순히 누군가 랜슬롯이 되고 싶어서 라쿠스 기사단과 에픽 퀘스트에 대해서 떠벌리고 상황을 혼란 속으로 밀어 넣은 게 아니란 말인가?
“분명 아서리안은, 그리고 정보량 송신 합금은 인류의 상식을 벗어난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
럴수록, 개인은 그걸 날카로운 눈으로 통제하고 바라봐야 합니다.”
“왜….”
“그렇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토록 바라고 원하는 진실에 도달할 수 없을 테니까요.”
가까이 다가온 정현 씨가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무뚝뚝하지만 깊은 눈동자를 보며, 나는 머릿속이 복잡한 것을 느꼈다.
그러니까 그녀는 지금 내게, 린슬렛이 랜슬롯의 후보자라는 위치를 포기하게 만들고, 현실로 돌아오게 만들라는 말인가?
모르가나를 이용해.
◇
입술이 뜨거워서 데일 것 같은 기분이었다.
차가운 물줄기에 머리를 씻어내도 좀처럼 심장이 진정되질 않았다. 디멘션 커넥터를 조작해 재킷을 보이지 않는 형태로 돌린 상태였으므로 피부에서 채 지워지지 않은 꺼끌꺼끌한 가루 같은 감촉이 느껴졌다.
물이 받아진, 큰 욕탕에 들어갈까도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랬다가는 시간을 지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다연은 차가운 손으로 입술을 매만졌다.
몇 주 전만해도 상상치 못했다.
자신이 그와 입을 맞추리라고는.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렇게 좋은 순간이 올 거라고는.
“으으….”
사실 주변에서는 좀 늦다는 평가를 받는 자신이었고, 스스로도 거기에 대해서 그다지 틀린 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확실히 자신은 이성에 대한 관심보다도 아서리안을 즐기는 것이 더 좋았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다연 역시 그런 변화에 살짝 겁이 들기도 했다. 그가 허리를 당기며 ‘한 번 더.’라는 말을 했을 때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기분이랄까.
하지만 역시 그 반듯한 입술, 깎아지른 듯한 코와 턱의 라인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상념에 잠긴 그 눈을 볼 때면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드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그 안에는 송유하라는 사람만이 있지 않을까 했는데….
“빼, 빼앗게 되는 건가…?”
나쁜 여자? 아니 그건 아니다. 사귀는 사이는 아니라고 했으니까. 엄밀히 말하자면 경쟁에 가까우리라. 다연은 주먹을 불끈 쥐며 전의를 불태웠다.
물론 그쪽은 오랜 시간 알아온 사이인 만큼 여러모로 불리한 싸움이겠지만…. 자신에게는 게임에서의 관계가 있다. 타나토스와 린슬렛이라는.
응응, 할 수 있어. 주다연.
스스로를 다독이듯 주먹을 불끈 쥔 다연은 이내 샤워기를 끄고 뒤로 돌아섰다. 젖은 머리를 조심스럽게 짜낸 그녀는 바깥에 비치된 수건으로 몸을 닦으며 얼굴은 괜찮은지, 화장은 지워지지 않았는지를 확인했다.
바로 그 순간, 전화가 걸려왔다.
“윽…!”
안색이 창백해져 신음 소리를 낸 다연은, ‘엄마’라고 적혀진 글자를 보자 당황해 굳어졌다. 시간은 벌써 새벽 4시. 먼저 돌아간 딸이 집에 없자 화가 난 걸까.
“여, 여보세요?”
결국 이겨내지 못하고 그녀는 전화를 받았다. 어떻게 해서든 변명거리를 떠올리려 애쓰며.
[…. 어디니?]
침착한 목소리에 다연은 약간 입안이 마르는 걸 느꼈다. 언제나 밝고 유쾌한 엄마가 저런 목소리를 낸다는 건, 사실 엄청나게 화가 나있다는 반증이었다.
“자, 잠깐 누구랑 같이 있어.”
[그 남자애랑?]
“응.”
[어디서?]
변명을 해야만 한다.
‘아서리안을 플레이하고 있어! 뭔지 알지? 딱히 엄마가 걱정하는 일은 하고 있지 않으니까 안심해!’ 라며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었으므로.
“음, 사실 지금 우정현 회장님 댁이거든…?”
[뭐?]
더욱 굳어지는 엄마의 목소리에 린슬렛은 머릿속에서 이어지는 말들을 마구잡이로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 그으! 엄마가 그랬잖아? 좋은 분들과 좋은 관계를 쌓는 게 중요하다고. 준이가 우 회장님이랑 아는 사이라고 해서 같이 있는데 괜찮아! 오늘 여기서 자면서 이것저것 많은 이야기를 듣….”
[당장 거기서 나와.]
“뭐, 뭐?!”
[다연아. 엄마 말 들어. 거기에 있으면 안 돼. 알겠어? 그 남자애, 네가 내 딸이라는 걸 알고 이용한 거야!]
“무슨, 소리야?”
이해가 가지 않는 말에 다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걸까. 하지만 그렇게만 보기에는 목소리에서 심각할 정도의 다급함이 느껴졌다.
[엄마가 데리러 갈게. 지금 어디야?]
“어, 으.”
하지만 대답할 수 없었다.
[대답해. 주다연.]
티티는….
“미안해!”
거기에 아서리안은.
결국 혼란스러움으로 가득한 채 다연은 전화를 다급히 끊어버렸다. 그리고 이내 수신 거절로 상태를 돌리고는 이마를 짚으며 벽에 기대어 섰다.
“티티이….”
린슬렛은 심장이 조여드는 걸 느끼며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