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편
<-- Chapter 2 : 호수의 기사 -->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달리 무언가 꿰뚫어보는 듯한 인상에 나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상대의 첫 인상만큼 믿지 말아야할 것도 없다.’라던 우정현 씨의 말이 마티니의 향을 따라 머릿속을 맴돌았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과 아는 사이였군요. 놀랍네. 학생.”
“…. 어쩌다보니.”
나는 적당히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거짓말이 능숙하지 못하구나. 거짓말을 할 때는 상대방의 눈을 봐야하는 거예요. 학생.”
나는 그 말을 듣고 순간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이내 그녀는 적개심을 담아 날 노려보았다.
“지난번에는 능숙하더니, 오늘은 술이라도 취한 거야?”
“무슨…?”
“다연이를 이용하려고 든 거잖아.”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나는 당혹스러움을 느끼며 되물었다.
“아니 뭐, 당신 같은 ‘전문가’ 앞에서 할 소리는 아니네. 회장님도 참. 슬슬 인정하시면 좋을 텐데….”
“어, 머님?”
“그 가증스러운 입으로 날 부르지 마요. 믿는 거라고는 반반한 얼굴 밖에 없는 주제에.”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나는 약간 의아해서는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반대편에 가있던 넬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주인님, 지금 가시면 될 것 같아요.”
“…. 나중에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당신 따위를 다연이에게 보낼 것 같아?”
하지만 슬쩍 지나치려는 나를 제지하는 손. 차가운 눈동자를 하고 있는 ‘어머니’는 딸을 보호하려는 의지로 가득했다. 하지만 주변의 분위기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그 정도를 조절하려는 기색이 느껴졌다.
“말해. 우리 다연이를 데리고 뭘 하려는 거야.”
이건, 곤란한 상황이다.
나는 문득 그 사실을 깨닫고는 아랫입술을 슬며시 깨물었다. 어쨌든 지금 이곳에 온 목적은, 어머니의 눈을 피해 린슬렛을 결투 장소로 무사히 데려가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스스로의 실수를 깨닫고는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전 상무님.”
“…. 회장님.”
하지만 바로 그때, 옆에서 누군가 다가왔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든 채 고개를 돌린 나는, 요염하게 웃으며 서있는 정현 씨를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린슬렛의 어머니, 다시 말해 전 상무는 경계하듯 가만히 모습을 드러낸 정현 씨를 바라보았다.
“가시죠. 이준 씨.”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정현 씨는 슬쩍 공간을 내어주며 날 돌아보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회장님….”
“그리고 상무님은, 저와 잠시 담소라도 나누실까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정현 씨는 내가 지나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 같았다. 당황해 적개심을 내비치는 전 상무의 어깨를 능숙하게 쥔 정현 씨는 이내 나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역시 영악하지 못하군요. 몸을 숨겨야할 상황에서.”
“…. 시험을 했단 말인가요?”
나는 대강의 상황을 깨닫고 어이가 없어지는 걸 느꼈다. 방금 전까지 연회장에서 에스코트를 부탁했던 것이나 칵테일을 주문하라고 한 행동 모두가, 단지 ‘내가 어떻게 나올 것이냐.’를 관찰하기 위해서…?
“나중에 이야기하죠.”
“잠, 당…!!”
한순간 크게 소리를 지르려던 전 상무는 주변의 분위기를 파악하고는 물러섰다. 그리고 나는 그녀들을 뒤로 한 채 2층으로 올라갔다. 여전히 등 뒤로 쏘아지듯 시선이 느껴져 나는 짜증스럽게 어울리지도 않는 보타이를 풀어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더러운 기분이었다.
우정현도, 전 상무도.
그 외 수많은…. 녀석들 모두가 얼굴에 가면을 쓰고 타인을 관찰할 뿐이었다. 나는 거기에 화가 나는 걸 느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무척이나 간단했다.
그녀가 지금 이따위 곳에 있기에.
데리고 나가야만 했다.
그리고 2층.
포켓볼과 포커 따위가 벌어지고 있는 장소. 아래층보다 어두운 조명 아래에 10명 정도의 20대 남녀가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 웃고 있는 린슬렛을 확인한 나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얼굴이 적잖이 곤란해져 있는 모습을 눈으로 확인했다.
마음에도 없는 웃음.
하지만 아무도 모르고 있다.
“린슬렛.”
나는 린슬렛의 팔목을 움켜쥐며 단숨에 바깥으로 당겼다. 그리고 끌려나온 그녀는 내 얼굴을 확인하고는 이내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이, 이준?”
“가자.”
나는 짜증스럽게 중얼거리고는 좌중을 둘러보았다. 순식간에 시선이 집중되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눈썹을 찌푸렸다. 그리고 제일 바깥쪽에 서있던 가웨인이 어깨를 으쓱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발목까지 닿는 드레스.
“할 게 있으면서 뭐 이런 곳에 있어?”
“하, 할…. 게….”
턱시도와 드레스를 입은 남녀가 날 호기심과 의아함을 담아 보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시선을 무시한 채 린슬렛을 잡아끌어 가웨인에게로 향했다.
“어디로 가면 되지.”
가웨인은 열려 있는 창문 하나를 슬쩍 고개로 가리켰다. 나는 그곳까지 가, 높다랗게 올라온 창턱을 확인하고는 린슬렛을 제멋대로 안아들었다.
“야, 야?!”
얼굴을 붉힌 그녀가 내 위에서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슬쩍 제정신으로 돌아온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물을게. 린슬렛.”
“…. 으, 응?”
“랜슬롯이 되고 싶어. 아니야.”
“티, 티티.”
“나는 주다연이 아니라 린슬렛에게 묻는 거야.”
그리고 그 말에 잠깐 머뭇거리던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되고, 싶어.”
그렇게 반쯤 막무가내로 허락을 구한 나는 이내 창틀을 넘어서려 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래도 잠깐 기다려봐!”
“크헉?!”
턱을 얻어맞았다.
혀를 깨물게 만드는 신속한 어퍼컷에,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은 나는 린슬렛이 치맛자락을 털며 자리에 서는 걸 확인했다. 뭔가 싶어 고개를 드니 녀석은 여전히 얼굴이 빨간 상태로 뭔가 불만스러운 듯 나를 바라보았다.
“자, 잠깐 일로 와봐.”
“뭐, 뭐?!”
그리고 나는 멱살을 잡혀 구석으로 질질 끌려갔다.
“보타이.”
“?”
“빨리.”
나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주머니에 쑤셔 박아두었던 보타이를 꺼내 내밀었다. 그걸 받아든 린슬렛은 멱살을 슥 당겨 내가 허리를 숙이도록 만들더니 이내 보타이를 매어주기 시작했다.
“엄마랑, 만났어?”
“….”
약간 불안한 듯한 목소리.
내 목 부분에 시선을 고정한 채 린슬렛은 파르르 입술을 떨었다. 그 동작에 나는, 여기에서만큼은 절대로 거짓말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그녀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응.”
“뭐, 래? 아니 여기는 어떻게 들어온 거야…?”
“우정현 씨가 도와주었어.”
“우, 우정현이라면, 그 우정현 우정현?”
“응, 그 우정현 우정현.”
나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너 대체 뭐야…? 아니, 으…. 그! 나, 나중에 이야기해. 나도 할 말이 없지는 않으니까.”
“나도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하, 하지만 일단은 친구들한테…. 인사는 하고 가.”
“굳이, 왜…?”
“너, 넌 남자친구잖아?!”
“아, 나 네 남자친구였지.”
“그, 그렇게 말하지 마!”
“그럼 뭐라고 말해…?”
“남, 남, 남…. 하으으으….”
뭔가 이야기하려던 린슬렛은, 이내 얼굴이 펑 터지듯 붉어지며 다 맨 타이 끈을 세게 쥐었다. 그리고는 커튼 뒤로 날 데리고 가 슬며시 가슴에 기댔다. 나는 심장이 뛰는 걸 느끼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보타이는 왜…?”
“…. 안 매고 인사하면 너무 아쉬워서.”
모르겠다.
“머리, 뭐 바른 거 처음 봐.”
“나도, 네가 드레스 입은 모습 처음 봐.”
“어울, 려…?”
그 말에 나는 숨을 삼켰다.
얼굴이 붉어진 것을 느끼며 커튼을 움켜쥐어 우리 둘의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이내 똑바로, 그녀의 갈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울려.”
“…. 저, 정말?”
“하지만 역시, 그 재킷이 더 멋져.”
“바, 바보야! 너무 많이 말하지 말라고!”
“왜?”
“심장에…. 안 좋으니까….”
그리고 그녀는 다시금 내 가슴에 기대었다. 심장 소리를 들킬 것 같았지만, 나는 품안에 있는 자그마한 소녀를 안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상큼하고 달달한 레몬 향기가, 반투명한 푸른 드레스를 사랑스럽게 만들었다.
“티티….”
“린슬렛.”
우리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크흠. 저기, 친구들?”
“우왁?!”
“꺅!”
바로 그 순간, 커튼 바깥에서 들려온 소리에 우리는 놀라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나는 얼굴이 빨갛게 물든 기색을 느끼며 바깥에 서있던 가웨인을 바라보았다.
“분위기 좋은 건 알겠지만, 바깥의 다른 친구들도 좀 생각해주면 어떨까 싶어서.”
“….”
나는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안쪽에서 부끄러운 듯 커튼을 꼬아 몸을 감추던 린슬렛을 나오게 했다. 그리고 이내 그녀는 자연스럽게 내 손을 잡고 다른 녀석들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누군가 툭툭 치는 기색에 뒤를 돌아본 나는 의미심장하게 웃고 있는 가웨인을 발견했다.
“솜씨 좋은데?”
“뭐가.”
“주다연 양, 사실 노리는 사람이 꽤 많았단 말이지. 여어어억시 잘생기고 볼 일입니까! 타나토스님!”
“….”
나는 관심을 주지 않기로 했다.
◇
========== 작품 후기 ==========
죽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