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편
<-- Chapter 2 : 호수의 기사 -->
“부, 부탁합니다. 회장님.”
나는 스스로의 입장을 굽히듯 고개를 푹 숙이며 중얼거렸다. 사실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는 것이 몹시도 부끄러웠지만 그럴 때가 아니었다. 생각보다 오는데 시간이 걸려 결투 약속이 가까워왔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그렇게 부르시는 겁니까. 반쯤 장난이었는데.”
하지만 우정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얼굴이 빨개지는 걸 느끼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뭐 호칭이야, 편하실 대로 하시죠.”
“부탁합니다. 아줌마.”
“….”
“아주머니.”
“….”
“누나.”
“좋군요.”
좋은 거냐.
“뭐, 반쯤 농담이고, ‘정현 씨’정도 선에서 타협을 보는 것이 어떨까 싶은데. 어떠십니까?”
“그럼 그렇게 하죠. 정현 씨.”
“좋습니다.”
그렇게 중얼거린 그녀는 이내 눈앞에 인터페이스를 띄워 무언가를 나에게 휙 집어던졌다.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 그게 곧장 통장으로 추가가 되자 나는 살짝 인상을 찌푸린 채 고개를 들었다.
“일단 옷부터 사십시오. 그 옷, ‘재킷’이 맞죠?”
“그, 그렇습니다만.”
“턱시도면 그 가격에 괜찮은 제품을 사실 수 있을 겁니다. 일단, 차에 타시는 걸로 할까요.”
“네, 네엡.”
어쩐지 압도되는 기색에, 나는 군소리 없이 넬과 함께 자동차에 올라탔다.
“출발해주십시오.”
“네, 회장님.”
묵직한 남자의 목소리와 함께 차는 스무스하게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안정적인 승차감을 즐길 겨를도 없이 아서리안에 접속해 추가 구입 제품란에서 턱시도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기사들에게 확인을 받고 너무도 쉽게 정문을 통과. 차는 정원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적당히 아무 턱시도나 고르고 구매 버튼에 손을 올리려는 시점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컬러는 블랙으로 하십시오.”
“왜, 왜요?”
“남자는 블랙이 어울리는 사내가 되어야 하니까요.”
“….”
그렇게 이야기한 정현 씨는 무언가 그리운 것이라도 보는 눈으로 날 보았다. 그 시선에 어른스러운 사색이 깃들어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얌전히 말을 들어 검정색 턱시도를 구매했다.
- 구매 완료.
- 구매한 옷을 착용하시겠습니까?
그런 메시지에 예스 버튼을.
바로 그 순간, 재킷의 형태가 뒤바뀌기 시작했다. 치료제로 쓰였던 그 정보량 송신 합금마냥 수은과 비슷한 형질을 지녀, 재킷이 아닌 하반신의 청바지를 물들이기 시작했다. 나는 약간 긴장한 채 그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이내 먼저 입고 있던 평범한 청바지가 사라지며 그 자리를 매끈매끈한 재질의 정장 바지가 대체하는 것이 느껴졌다. 언제 봐도 마법 같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어울리는군요.”
“그, 그런가요. 이런 옷은 처음이라….”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 멈춰 섰고 나는 목에 감기는 보타이에 어색함을 느끼며 정현 씨를 따라 차에서 내렸다.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신발까지 완벽하게 구두로 바뀌어 나는 거기에 무척이나 이질감을 느꼈다.
“완벽하지 않습니까? 정보량 송신 합금이란.”
신발을 내려다보는 시선에서 알아챘는지 정현 씨가 질문을 던졌다. 나는 거기에 살짝 질린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렇군요.”
“원래 극한까지 발전한 과학 기술은, 신의 권능에 비견되기도 한다는군요.”
“그 정도입니까….”
“네 뭐, 저도 엘레노어에 관해서는 모르는 부분이 더 많지만. 일단 그 정도로 이해해두고 있습니다.”
정현 씨는 그렇게 말하며 싱긋 웃었다. 과연 그걸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올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앞머리를 매만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정현 씨가 자리에 우뚝 멈춰 서자 고개를 들었다.
“아, 머리가.”
“네?”
“그런 머리는 매너 위반입니다.”
“…. 머리가 나쁘다는 건 아닐 테죠?”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그렇게 중얼거린 그녀는 이내 종종걸음을 한 채 차로 돌아가 트렁크에서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나는 약간 당황한 채 그녀를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뒤쪽에 조용히 있던 넬이 눈을 반짝이며 날아들었다.
“주, 주인님! 옷이 날개라더니 정말 잘 어울리세요!”
“또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나는 쑥스러워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넬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으며 다시금 내 앞으로 왔다.
“아니에요! 정말! 영화배우 같아요!”
“후우,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됐는지.”
“헤헤, 린슬렛님이 좋은 사람이라는 건 알잖아요?”
“그게 과연 걔일까 싶은 마음이 없지는 않아서.”
나는 다시금 그 복잡한 상념이 머리를 치켜드는 걸 느끼며 중얼거렸다. 확실히 내가 아는 린슬렛은 솔직하고 좋은 녀석이다. 단 한순간도 다른 속내가 있다는 낌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잠깐, 이걸 들고 계시겠습니까?”
그렇게 있자니 얼마 지나지 않아, 정현 씨가 곤란하다는 얼굴의 운전기사와 함께 돌아왔다. 나는 그녀로부터 파우치를 넘겨받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전에 쓰던 게 남아있었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중얼거린 그녀가 포마드를 내 머리에 바르기 시작했다. 나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진지한 표정의 정현 씨를 황당함에 들어차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시선을 눈치 챈 정현 씨가 부드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왜 그러십니까?”
“특이한 사람이다 싶어서요. 첫 인상과는 달리.”
도무지 대한민국 최고 그룹 회장이 할 만한 행동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중얼거리고는 이쪽의 머리를 제멋대로 헝클며 매만지는 우정현 씨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의 첫 인상만큼 중요한 건 없지만, 상대의 첫 인상만큼 믿지 말아야할 것도 없죠.”
머리를 슥슥 털어내며 정현 씨는 미소를 입에 머금었다. 이렇게 보니 나이를 빼놓고 생각을 하자면 약간 어른스러운 누나 같은 느낌이었다.
“스스로를 능숙히 감추는 건 무척 중요한 법이니까요.”
“그렇습니까.”
“그리고 상대방이 스스로를 감추고 있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부분도 중요합니다.”
“…. 어려운 이야기로군요.”
“괜찮습니다. 쉽게 익힐 수 있는 능력은 아니죠. 자각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으니까요.”
나는 앞머리가 슥슥 사라지는 걸 느끼며 정현 씨의 말에 대답했다. 어쩐지 나는 그 말에 린슬렛에 대한 걸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녀의 해맑은 웃음을.
“자, 다 됐습니다.”
얼마 후, 머리를 정돈해준 정현 씨는 멍하니 있던 내 이마를 손가락으로 튕기며 뒤로 물러섰다.
“회, 회장님. 이런 건 그냥 절 불러주셔도….”
“아뇨, 기사님. 감사합니다.”
뒤쪽에서 당황한 기사가 물티슈를 내밀었고, 정현 씨는 거기에 손을 닦고는 예의를 갖추어 인사를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사는 내 머리에 쓰인 포마드와 물티슈를 가지고는 차로 돌아갔다.
“어쨌든, 들어가시죠. 반응이 기대되는군요.”
“왜, 왜요?”
“이준 씨는 거울도 안 보고 사십니까.”
“…?”
내가 의아해 바라보았지만, 정현 씨는 드레스의 끝을 움켜쥔 채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잠깐 남겨져 있던 나는, 따로 사교모임을 위한 공간까지 마련된 엄청난 저택의 규모에 혀를 내두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집안에 또 ‘동산’이 있을 줄이야.
동산이라는 어감은 조금 이상하지 않나 싶었지만 그 말 이외에는 이 건물의 위치를 표현할 길이 없었다. 거기에 높다랗게 직사각형으로 올라선 2층으로 모양새가 잘 빠져 고풍스럽게 그 존재감을 발산했다.
“끄응….”
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생각해보니 우정현 씨는 이조차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될 정도로 엄청난 부를 쌓고 있겠지.
“주인님?”
“아, 아무것도 아니야.”
약간 긴장한 걸까.
나는 보타이의 끝이 조여드는 걸 느끼며 정현 씨를 따라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그 위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녀가 파우치를 쥔 채 우아하게 나를 돌아보았다.
“일단 들어가게 되면…. 이준 씨는 제가 후원을 하고 있다는 식으로 소개해도 되겠습니까?”
“좋으실 대로.”
나는 무뚝뚝하게 중얼거리고 그녀의 뒤로 따라붙었다. 그리고 정현 씨는 능숙하게 앞을 지키던 경비원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열리는 문을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좌중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스스로 자의식과잉에 빠지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명백히.
커다란 연회장 내부에서 들려오던 이야기 소리는 그대로였다. 하지만 모두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정현 씨를 의식하기 시작한 걸 나는 느꼈다. 생각했던 대로의 높다란 샹들리에와 번쩍거리는 실내. 턱시도와 드레스를 갖춰 입은 대부분 중년 나이대의 사람들.
“….”
뭔가 이상해.
나는 그런 사람들의 의식이 무척이나 경계가 짙은 걸 느끼고는 가볍게 앞머리를 매만지려다 관뒀다. 갈 곳이 없는 손길을 쓰윽 주머니로 넣으려 하니,
“주머니에 손은 중요할 때만 넣는 겁니다.”
정현 씨가 제지했다.
“등은 곧게, 시선은 주변을 훑어보지 마십시오. 정면을 보고 당당하게 걷는 겁니다.”
“으, 으음….”
“정현님, 뭔가 선생님 같네요오.”
넬이 거들듯 이야기해 나는 의식을 하며 정현 씨의 뒤를 따라 연회장 내부를 거닐었다. 그녀는 가장 안쪽에 있던, 부부로 보이는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5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중년의 부부였다.
“아! 회장님. 오셨습니까.”
“네, 안녕하세요. 부인.”
“어머나아, 회장님! 점점 젊어지시는 것 같아요!”
“후후, 감사합니다. 부인께서도 오늘 밤 수많은 별 중 가장 빛나는 별이시로군요.”
우와, 재수.
“….”
“그쪽의 청년은?”
약간 환멸감을 느끼며 바라보고 있자니 남성이 고개를 들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느끼며 얼른 표정을 굳히고 등을 꼿꼿이 세웠다.
“아, 이쪽은 제가 현재 후원하고 있는 소년입니다. 남편이 없는 관계로…. 오늘은 그 역할을 대신.”
옆으로 몸을 돌려 날 소개한 정현 씨가 이내 시선을 보내왔다. 나는 어색한 기운을 느끼며 가만히 서있는 두 사람을 향해 살짝 목례를 했다.
“이준이라고 합니다.”
“…. 하하! 이거 아주 건실한 청년을 두셨군요.”
뭔가 이상한데.
나는 아주 짧은 순간 표정이 굳어졌던 남자를 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뭔가, 내가 이 자리에 온 것이 탐탁찮은 듯한 느낌…. 을 넘어서서 그게 정현 씨에 대한 경계심과 관련이 있다는 기이한 예감마저 들 정도였다.
하지만,
“어머, 어머, 어머.”
그 옆의 부인은 얼굴이 새빨갛게 물든 채였다.
========== 작품 후기 ==========
잘생긴 남자는 고시 삼관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