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네크로맨서 재킷-55화 (55/321)

55편

<-- Chapter 2 : 호수의 기사 -->

바람둥이에 대해 사전에서 찾아본 바에 따르면, ‘곧잘 바람을 피우고 다니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 말인즉슨 여기서 말하는 ‘바람’이란, 다른 이성…. 즉, 나로 말하자면 여성에게서 받는 연심이 많다는 건데.

“딱히 유하도 린슬렛도, 날 좋아하진 않잖아?”

“….”

“유하도 남동생으로 밖에 보질 않고, 린슬렛은 뭐…. 그냥 친구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

“그렇, 잖아?”

“….”

아까부터 넬은 말이 없었다.

나는 계속 해봤자 변명으로 들릴 거라는 생각에 머리를 긁적이며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늦은 밤, 10시가 넘었으므로 당연히 카페에는 손님이….

“있, 네?”

나는 당황해 중얼거렸다. 창가 쪽에서 한 여자가 눈앞에 팝업창을 띄워놓은 채 앉아있었다. 귀 아래에서 자른 암갈색의 단발. 정장에 바지를 갖춰 입은 채 있던 여자가 곧이어 가볍게 목례를 했다.

단정한 얼굴이었다.

어쨌든 이유는 모르겠지만 인사를 받았으므로, 나 역시 목례를 하고는 주방 쪽으로 들어섰다. 의외로 유하가 인사를 하러 나오지 않았던 터라 뭔가 싶었던 것이다.

“주, 준?”

“…. 이게 다 뭐야?”

주방에서는 한창 사투가 벌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힐끗 내 쪽을 돌아본 유하가 그럴 겨를이 없다는 듯 주방을 뛰어다니며 무언가를 만드는 모습이 보였다. 달콤한 냄새로 봐서는 아마 카페의 특제 메뉴인 하이퍼 초코릿 우유가 아닐 런지 싶은데.

“잠시만 기다려요! 거의 다 만들었으니까!”

문제는 그게 열 잔이 넘는다는 거였다.

“바깥의 손님이 주문한 거야?”

“네, 네네! 바쁘네요오오!”

“흐음, 엄청나아아아게에에에 미인이신데요?”

“버릇없이 보지 마.”

나는 바깥을 내다보고 있는 넬을 향해 중얼거리고 이내 가벼운 작업을 돕기 시작했다. 4잔을 담을 수 있는 종이 캐리어를 4개 준비하고 거기에 꽉꽉 초콜릿 우유를 담아 바깥으로 가지고 나갔다.

“소, 손님. 하이퍼 초콜릿 우유 나왔습니다.”

하이퍼가 붙을 정도로 달달한 초콜릿 우유를 담아 내놓자, 자리에 앉아 있던 여자가 일어서 가까이 다가왔다. 가볍게 울리는 하이힐 소리에, 나는 네 개의 캐리어를 카운터 위로 내밀며 옆을 쓱 돌아보았다.

“더, 더는 못 만들어어어….”

갑작스레 많은 메뉴를 소화한 터라 유하는 주방 바닥에 탈진해 쓰러진 상태였다.

“….”

“손님?”

하지만 가까이 다가온 여자는 좀처럼 캐리어를 가져가져 하지 않고, 도리어 고민에 빠진 모습이었다. 그러더니 디멘션 커넥터를 조작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응, 수민아…. 잠깐 와줄래?”

여자는 잠깐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가 싶더니 이내 전화를 끊고는 가만히 카운터 앞에 섰다. 피곤했던 터라 얼른 유하와 함께 들어가서 쉬고 싶었으나, 나는 묵묵히 서서 허공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죄송합니다. 혼자 들고 가긴 힘들 것 같아서.”

“괜찮습니다.”

“어디 다녀오시는 길인가보죠?”

가볍게 내 쪽을 돌아본 여자가 이내 적당히 말을 걸어왔다. 40대 초반 정도 되었을까. 커리어우먼으로 보이는 여자의 얼굴에서는 어쩐지 관록이 엿보였다.

“네…. 잠깐 일을 하러.”

“그걸 일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모르겠군요.”

“네?”

여자는 이상한 소리를 했다. 그러더니 카운터에 왼팔을 올린 채 기대어 서서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한 나는 그녀의 왼손 약지에 있는 반지 자국을 보며 무슨 말인지 생각했다. 가만히 침묵을 지키던 여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고,

“아서리안.”

나는 심장이 멎는 걸 느꼈다.

“너, 누구야.”

인상을 찌푸린 채 험악하게 중얼거렸지만 여자는 꿈쩍도 하지 않은 채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제대로 된 종이 명함이었다.

“…?”

우한 그룹, 회장 우정현.

회장…?

아니 ‘그’ 회장님?

“시간 나실 때, 개인적으로 뵙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회장님께서 어인 일로…?”

“아서리안과 관련된 일이라고만 해두죠.”

그렇게 중얼거린 우정현의 말에 나는 명함을 천천히 품속에 넣었다. 지금 시대에 종이로 된 명함을 달라는 건 반드시 연락해달라는 의미…. 이기는 했지만, 대체 왜?

“하아, 언니 진짜 무슨….”

시간이 멈춘 것처럼 서로를 바라보며 서있던 중, 문이 열리며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눈앞에 있는 여성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의 미인이었다. 커다란 눈동자에 지친 기색이 엿보였으나 우정현은 도리어 미소를 지었다.

“미안해.”

“뭐 이렇게 많이 샀어? 이거 다 뭐야아아?!”

“하이퍼 초콜릿 우유.”

“하이퍼…? 아, 아니 됐어. 초콜릿이 들어간 시점에서 언니 입맛은 내가 아주 잘 알지.”

잘 아는 사이인 걸까. 가볍게 이야기를 나눈 두 사람은 이내 양손 가득 캐리어를 들고 바깥으로 나갔다. 하지만 수민이라는 여자의 뒤를 이어 나가기 직전, 우정현은 천천히 내 쪽을 돌아보았다.

“꼭 연락 주십시오.”

“….”

딸랑거리는 종소리와 함께 카페는 정적에 휩싸였다.

마당을 가로질러 나오는 사랑채는 불빛이 훤하게 밝혀진 상태였다. 디멘션 커넥터를 매만져 미리 구매해둔 개량 한복으로 재킷의 형태를 설정한 가웨인은, ‘백시호’라는 본명을 머리에 새기며 신발을 벗고 대청마루로 올라섰다. 싸늘한 감촉이 발에 휘감겼다.

“아버지.”

꾸며낸 점잖은 목소리를 내며 백시호는 장지문 앞에서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자 안쪽에서 두런두런 들려오던 목소리가 뚝 멎더니 이윽고 문이 열렸다.

“들어오너라. 시호야.”

“다녀왔습니다. 어르신들도 안녕하셨어요?”

안쪽에 앉은 아버지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였고, 시호는 꾸벅 고개를 숙여 예의바르게 인사했다. 그러자 상석의 아버지를 중심으로 둥글게 앉아있던 다른 어른들이 적당히 웃으며 자신을 반겨주었다.

아버지를 제외한 세 사람.

여당의 차기 대권 후보.

검찰총장.

마지막으로 우한 그룹의 부회장까지.

“시호야, 얼굴이 많이 좋아졌구나.”

“하하, 우리 딸이 너 좀 소개해달라고 얼마나 성환지.”

“이렇게 예의바르게 인사까지 드리러 오고, 요새 참 보기 드문 청년이야.”

“과찬이십니다.”

시호는 몸에 두드러기가 두는 감각에도 태연하게 인사를 했다. 서로 친근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었지만, 네 사람의 눈에서는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결국 이유가 있어 모인 사람들이기 때문일까.

“아버지, 혹시 이야기 나누고 계시던 중이셨나요?”

“음? 아니, 대략적인 이야기는 마쳤다만.”

“죄송합니다만…. 따로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급한 것이냐?”

“네, 정말 죄송합니다.”

깍듯하게 이야기를 하는 모습에 방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 적당히 수긍하는 눈치였다. 뭐 그리 큰일이라고 저렇게 ‘너그럽게 허락한다는’ 태도인지 짜증을 느끼면서도, 시호는 천천히 일어서는 아버지와 함께 바깥으로 나왔다.

“날이 차구나.”

방으로부터 슬며시 떨어져 대청마루 끝까지 걸어와, 아버지는 뒷짐을 진 채 중얼거렸다. 앞장서고 있던 시호는 차가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헛소리하지 말고. 영감.”

“….”

“뭐야, 그 할 킬러즈는. 일 좀 제대로 처리하지?”

“큭큭큭….”

감정이 담긴 독설에 한순간 흥미로운 듯 눈썹을 치켜뜬 아버지는 이내 고개를 푹 숙이고는 웃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아래에서 사악하기 그지없는 표정과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왜 애를 먹었더냐?”

“말 돌리지 말고. 계약 위반이잖아. 이거.”

“뭐 어떠냐. 계획했던 일과 별반 다르진 않을 텐데.”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영감.”

순순히 인정하란 말이다.

네놈이 일처리를 좆같이 해서 터진 문제라고.

그런 감정을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채 시호는 으르렁거리며 눈앞에 있는 남자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당연히 알고 있다. 23년을 보아온 남자였기에.

그는 절대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터.

“내가 자리를 비웠을 때 생긴 일이었다. 그리고 말했다시피, 그쯤이야 별 문제도 되지 않을 거다. 고작 그런 이유로 아비에게 얼굴을 붉히며 이야기하는 거냐?”

“당신이?”

어이가 없다는 듯 이야기하자 아버지는 피식 웃었다.

“이런, 안 통하는 모양이군.”

“개새끼.”

모멸감이 어린 욕설.

“허어, 할아버지는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신 분을….”

“네가 죽인 거겠지.”

“그럴 리가 없지 않느냐.”

뻔뻔한 소리에 시호는 인상을 찌푸리며 돌아섰다.

‘아버지’라는 호칭은 시호에게 있어 보통 사람들의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 그저 눈앞의 남자를 칭하는 말일 뿐이었다.

“제대로 해.”

시호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몸을 돌려 다시금 대청마루 중간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아래로 내려서 신발을 신고는 다시금 아버지의 앞을 지나쳤다.

“그 여자애는 잘 지내고 있느냐.”

금속이 튕기는 소리와 함께 그가 입에 물고 있던 담배에 불이 붙었다. 고급스럽게 음각이 된 라이터를 쥔 아버지를 돌아본 시호는 가볍게 인상을 찌푸렸다.

“뭐?”

“그 여자애 말이다.”

“…. 저기 아버지. 나 지금 좀 짜증이 나있는 상태여서 말이지. 그 사람에 대해 언급하는 건 참아줄래?”

“헛된 꿈을 좇고 있구나. 아들아.”

가웨인은 그 말을 무시하고는 뒤로 돌아섰다.

쓰고 있던 역겨운 백시호의 가면을 벗어던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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