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편
<-- Chapter 2 : 호수의 기사 -->
“꼬마, 야…. 도망, 쳐…!”
“무슨 알량한 짓거리를 하나 했더니…?”
그리고 다음 순간, 또각또각 하는 하이힐 소리와 함께 목에 검이 드리워졌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었고 어이가 없다는 듯 서있는 우아랑과 눈이 마주쳤다.
차갑게 굳어진 표정에 환멸감이 서렸다.
“범죄자 주제에 위선을 떨고 앉았군.”
“….”
“시민은 모두 대피시켜두었다. 할 킬러즈가 그 정도 시스템도 갖추고 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
“그럼 내가 헛것을 보고 있는 모양이군.”
“그렇지.”
내 비아냥대는 소리를 단칼에 잘라내며 우아랑은 순간적으로 목에 닿아 있던 검을 휘둘렀다. 깜짝 놀란 나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직이려 했으나 이내 눈앞에 뜬 메시지를 확인하자 굳어지고 말았다.
- 불행한 사고 막기 (1/3)
“퀘스트, 라고?”
그 말대로 여자애는 이윽고 픽셀이 흩날리는 이펙트와 함께 눈앞에서 사라졌다. 나는 잠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안이 벙벙해져 고개를 돌렸다.
“퀘스트의 몰입을 돕기 위한 장치니 뭐니…. 가당찮은 짓거리일 뿐이다. 안 그런가? 에스콰이어.”
“….”
“그런데도 너 같은 놈들은 속는군. 왜일까? 이것이 퀘스트라서인가? 게임이라고 생각해 지금 네가 처한 상황의 심각성이 이해가 되질 않는가? 스컬.”
“주, 주인니임….”
상황이 그렇게 되자 넬과 린슬렛이 말리는 기색으로 날 불렀던 것이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나는 걱정스러운 듯 이쪽을 바라보는 넬의 모습에 이를 빠득 갈며 우아랑을 노려보았다.
“현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 거다!”
“웃기는군.”
“어떻게, 확신할 수가 있는 거지!”
눈앞의 여자애가 현실이 아닌 가상의 것이었다고. 정말로 모든 시민을 대피시켰노라. 귓바퀴에 부착되어 현실을 조작하는 이 엿 같은 장치의 통제 하에서…!!
“…. 웃기는 사내로군. 너는.”
나는 점점 온몸에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망령 신체가 해제되었고 이내 완전히 바이킹에 짓눌리기 직전까지 내몰린 내 앞에 다시금 우아랑이 검을 들이밀었다.
“애초에 네놈들이 있기 때문에 ‘시민이 위험에 처할 수 있는 상황’이 나오는 것이다. 범죄자.”
“큭!”
우아랑의 말에 반박할 거리가 없다고 느낀 나는 이윽고 복부를 걷어차여 반대편으로 나가떨어졌다. 쿵, 하고 바이킹의 나머지 부분이 땅과 충돌하며 크게 먼지가 피어올랐다. 흐릿해진 시야,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아랑이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괴물처럼.
“빌어먹을….”
회전목마에 처박혀 부서진 말 머리를 붙잡고 있던 나는 희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몸이 움직이지 않는데다가 뭔가 오류가 생겼는지 정신만 멀쩡한 상황.
“끝이다! 스컬!”
우아랑이 내게 도약해 검을 휘둘렀다.
“큭!”
비틀듯 목소리를 쥐어짜내며 눈을 감은 나는, 다음 순간 챙! 하고 무언가 부딪치는 소리를 들었다. 충격이 없는 것에 의아해 천천히 고개를 든 나는,
“이 바보! 바보 멍청이가!”
방패를 들어 우아랑의 검을 막아내고 있는 린슬렛의 뒷모습을 보았다. 녀석이 나에게 일갈하는 목소리와 떨리는 어깨에서 나는 화를 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우아랑과 내 사이를 가로막은 녀석이 방패를 들었다.
[리, 린슬렛! 이 녀석들 전부 내 쪽으로 왔다고?!]
가웨인의 우는 소리에도 린슬렛은 눈앞의 우아랑을 바라보며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그런 반응에 도리어 우아랑은 피식 웃으며 검을 쥐었다.
“오랜만이군! 우 대위!”
“린슬렛. 그렇군. 스컬은 네 기사단에?”
“그걸, 말해줄 것 같아…!”
우아랑의 말에 검을 튕겨낸 린슬렛은 이내 방패를 팔뚝에 장착하고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나 열 받았어. 우아랑.”
“오늘에야말로 널 붙잡겠다.”
“어머, 무능한 주제에 허세만 부리는 네가?”
독설을 내뱉은 린슬렛이 이내 숨을 몰아쉬며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방패의 주변에 지난번처럼 불투명한 형태로 원형의 방어막이 피어올랐다.
“트리니티. 커맨드 폼.”
우아랑은 검을 얼굴 앞에 양손을 쥔 채 들어보이고는 펼쳐들었다. 그러자 다시금 세 자루로 나뉜 검이 그녀의 주변에 부유하기 시작했다. 그걸 가만히 지켜보던 린슬렛은 이내 자세를 낮춘 채 접근했다.
다시금 두 사람 사이에서 불꽃이 튀었다.
한 손에 검을 쥔 채 공격을 막아낸 우아랑은 뒤로 물러서며 검을 부유시켜 각각 다른 방향에서 린슬렛을 향해 돌진시켰다. 하지만 린슬렛은 인상을 찌푸린 채 달려들어 곧장 인파이트로 다시 싸움을 몰고 갔다.
“큭!”
커다란 방패에 의해 들고 있던 검이 봉쇄된 상황, 유효 타격을 허용하며 뒤로 밀려난 우아랑의 검이 뒤쪽에서 린슬렛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린슬렛은 예상한 바였다는 듯 몸을 숙이며 동시에 우아랑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넘어진 상태에서 우아랑은 검을 휘둘렀으나 방패에 막히고는 옆으로 구르며 린슬렛이 짓밟는 걸 피해냈다. 그리고 뒤로 크게 도약한 우아랑은 다시금 검을 불러들여 하나로 합쳤다.
“역시 이 폼은 더 이상 네게 통하지 않는군.”
“이제 깨닫다니 너무 늦었는데?”
여유롭게 대답한 린슬렛이 다시금 가까이 접근해 인파이트를 시도하려 했다. 하지만 우아랑은 간격을 벌리며 검으로 방패를 내리쳤다. 아까와 같은 방식. 그리고 검은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방패를 반쯤 잘라냈다.
“역시, 이건 성가셔!”
찰나의 순간, 방패가 잘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린슬렛이 팔을 비틀었다. 검의 궤적이 바뀌었고, 린슬렛은 팔목에서 방패를 떼어내며 동시에 옆으로 돌아 주먹을 휘둘렀다.
“…!!”
거기에 얻어맞은 우아랑이 뒤로 나가떨어졌다. 동시에 방패를 잡아낸 린슬렛은 맞물려 있던 검과 방패를 떼어내고는 휘두르듯이 집어던졌다.
우아랑이 처박힌 매점에 방패가 날아들었다. 하지만 그 안으로 파고들려던 방패는 이내 써걱! 하는 소리와 함께 반으로 갈라져 양쪽으로 날아가 각각 다른 방향에 처박혀 먼지를 일으켰다.
“이런 수가 통할 거라고 생각했냐!”
“체엣, 아끼던 방패였는데.”
가볍게 중얼거린 린슬렛은 품안에서 다른 방패를 꺼내들었다. 나는 이어지는 두 사람의 싸움을 숨을 죽인 채 지켜보았다. 극도로 짧은 간격의 인파이트에 유리한 린슬렛과, 반대로 간격을 벌리는 우아랑의 싸움.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싸움이 이어지던 중,
[아, 무뚝뚝이. 들려?]
“가웨인…?”
팝업창이 떠오르며 가웨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도 모르게 아까 넬이 띄워놓았던 팝업창을 돌아본 나는, 여유롭게 남은 할 킬러즈를 상대하는 가웨인을 발견했다.
[어이쿠, 어딜 가시려고.]
그런 목소리와 함께 화면 속의 녀석은 혼자임에도 남은 요원들을 몰아붙였다. 나는 도와야 한다는 생각에 몸을 일으켜 세우려고 했지만 다시 추욱 늘어졌다.
[음, 못 움직이는 거야?]
“1분만 줘.”
나는 그렇게 중얼거린 뒤, 넬을 돌아보았다. 전전긍긍해하며 린슬렛과 우아랑의 싸움을 지켜보던 녀석이 반응해 나를 바라보았다.
“넬, 너 내 재킷 조종할 수 있지.”
“…. 주, 주인님?”
그 말의 의미를 파악한 녀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나는 어떻게 해서든 자유롭게 된 지금 시점에서 내가 퀘스트를 완수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네가 의식 조종을 한다고 생각해.”
“으, 으음…. 가, 가능할지 모르겠는데요.”
“부탁해.”
나는 짧게 중얼거리고는 가볍게 숨을 몰아쉬며 최저한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손가락이나 발가락 같은 세밀한 부위는 움직일 수 있었지만, 다른 부위는 아예 맛이 가버린 것 같았다. 아까부터 코피가 멎질 않는 걸로 봐선 내장이 상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재킷은 내 몸을 안전하게 보호해주는 상황.
“움직일 수 있어. 싸우는 건 무리지만.”
[음, 청룡열차 보이지?]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들어 아까부터 최고 속도로 회전하고 있는 청룡열차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웨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조종석 쪽에 가면 속도를 조절하는데 쓰이는 레버가 있을 거야. 그걸 당겨줄 수 있어?]
그로서 ‘불행한 사고’를 막는다는 건가.
“해볼게.”
[무리하진 말고. 돌아오면 결혼하자.]
“….”
미친놈.
나는 그런 말을 삼키며 넬을 바라보았다. 머뭇거리던 녀석이 이내 눈앞에 각종 인터페이스를 띄워 내 몸을 조종하기 시작했다. 나는 삐걱거리는 거대로봇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잔해를 밀어내며 앞으로 도약했다.
“스컬…! 큭!”
“어딜 한 눈을 파는 거야!”
“?!”
우아랑이 그런 내게 달려들려고 했으나 린슬렛이 회심의 일격을 먹였다. 방패에 복부를 얻어맞은 우아랑은 뒤쪽으로 날려져 부서진 바이킹에 처박히고는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땅바닥에 떨어졌다.
내 몸은 비틀거리며 청룡열차의 조종석 내부로 들어섰다. 가속을 거듭해 잔상을 남기고 회전하고 있는 열차는, 조종석 내부를 지진이라도 난 양 휘청거리며 떨리게 만들었다. 넬의 조종에 따라 앞으로 나아간 나는 속도를 조절하는 레버를 잡아 천천히 내리기 시작했다.
“윽?!”
하지만 다음 순간, 폭음과 함께 열차가 선로에서 탈선해 허공으로 치솟았다. 커다란 충격에 뒤쪽의 벽에 처박힌 나는 눈앞을 스쳐 날아가는 열차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낙하지점에는 사람이 서있는 상태였고 나는 순간적으로 몸이 굳어지는 걸 느꼈다.
“제, 길…!!”
찰나의 순간, 남자의 앞으로 검은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내 열차를 받아냈다. 뒤로 밀려나지도 않은 채, 그 운동량을 단숨에 제로로 되돌린 남자는, 크게 웃음소리를 내며 자리에 열차를 내려놓았다.
“가웨인….”
나는 어이가 없어 중얼거렸다. 가웨인은 슬쩍 너스레를 떨며 손바닥을 휘저었다. 마치 그게 아프다는 듯. 도저히 10명 이상의 할 킬러즈와 싸워서 네 명을 쓰러뜨린 이후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아야야야, 이걸로 두 개짼가?”
“다른 할 킬러즈는?”
나는 여유로운 가웨인의 모습에 고개를 돌려 주변의 상황을 확인했다. 상처 하나 없는 녀석과는 달리 도리어 다수로 상대를 했던 할 킬러즈 쪽은 거의 전멸하기 직전으로 보였다. 나는 어이가 없어지는 걸 느꼈다.
대체 얼마나 강한 거냐. 기사란.
“대위님, 퇴각 명령이….”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요원 중 하나가 비틀거리는 우아랑을 부축하며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 말에 우아랑은 거의 경기에 가까울 정도로 거부 반응을 보였다.
“뭐?! 아직 눈앞에 범죄자들이…!”
“상부에서 무단 출격이라는 걸 알아 화가 난 모양입니다. 부대장님께서 빨리 복귀하시라고….”
“큭! 백 대령님은 왜?!”
내부 분열인가.
얼마 지나지 않아 비통한 표정으로 중얼거린 우아랑은 남은 할 킬러즈를 집결시켜 높은 곳으로 도약했다. 그리고는 못내 아쉬운 듯 린슬렛을 내려다보았다.
“…. 오늘 일은 기억해두겠다. 린슬렛. 그리고.”
그리고 녀석은 나를 돌아보며,
“스컬.”
한순간 강한 분노를 내보이더니 이내 사라졌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어쩐지 이질감이 드는 것을 느끼며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문득, 지하철역에서 우아랑과 처음 만났던 순간이 떠올랐다.
내가 알고 있는 국가 기관이 맞…. 는 거지?
경찰과 군 권력조차 아래에 두고 있는 할 킬러즈가?
“다, 다행이네요오. 주인님.”
“뭔가 이상해.”
“네넬?”
“…. 아니, 아무것도.”
그렇게 중얼거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종석에 처박혀 있던 나는 누군가 손을 내미는 걸 알아챘다. 고개를 드니 붉은 머리를 한 남자가 상쾌한 미소를 지으며 서있었다. 얼굴의 바이저를 벗자 선한 눈동자가 드러났다.
“수고했어. 스컬.”
“너까지 그렇게 부르냐.”
“이제…. 행복한 미래만 남았다고?”
무시하자.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가웨인의 손을 잡았다. 몸은 조금 회복된 상태인 것 같았으나, 이내 감각이 없어 중심을 잡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져 가웨인에게 안기는 꼴이 되고 말았다.
“어이쿠, 괜찮아? 많이 다친 것 같은데.”
“…. 괜찮아. 퀘스트는?”
“저어기.”
가볍게 웃으며 가웨인이 고개를 들었고, 나는 따라서 시선을 향했다. 위아래로 미친 듯이 춤을 추고 있는 디스코 팡팡, 허나 조종석에 있던 린슬렛이 패널을 조작하자 천천히 잦아들었다. 다행히 청룡열차처럼 탈선하지는 않는 모양이었으나…. 나는 방금 전의 싸움으로 엉망이 된 놀이공원을 돌아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눈앞에는 게임의 결과창이 떠올랐다.
- 불행한 사고 막기 (3/3)
- 파편 A를 획득하였습니다.
- 원판 조각 획득 (1/3)
- 전투에서 승리하여 경험치를 획득하였습니다.
-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범죄자’라고 우리를 칭했던 우아랑의 말이 머릿속을 스쳐, 나는 그 말에 반박할 수가 없어지는 걸 느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