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편
<-- Chapter 2 : 호수의 기사 -->
“실례야.”
“으, 으응…. 아, 아는 사이니?”
“그렇다고 볼 수 있겠네.”
하고 힐끔 이쪽을 돌아본 린슬렛은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나 역시 이런 장소에서 그녀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해 같은 기분이었지만.
“저, 저어. 소개 좀 시켜줄 수 있어?!”
“아! 새치기하지 마! 나부터! 나부터!”
“가위 바위 보로 정해!”
“….”
무슨 상황인지 잘 모르겠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서로 다투기 시작하는 여자애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린슬렛과 넬은 이해한 걸까.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내 쪽을 돌아보았다.
“죄 많은 남자네. 너도.”
“그러게요오….”
“? 뭐가.”
“일단 따라와. 몸부터 말려야지.”
아무렇지도 않게 내 손을 잡아끈 녀석은 이내 어디론가 걷기 시작했다. 그런 이쪽의 상황을 눈치 채지 못한 채 기어코 가위 바위 보에 돌입한 여자애들을 보던 난 정말로 상황이 이해되질 않는 걸 느꼈다.
“린슬렛, 소개 시켜준다니….”
“주다연이라고 해.”
“주, 주다연.”
어쩐지 부끄럽단 말이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슬쩍 시선을 피한 채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그리고 조금 걸어, 셔츠를 주운 뒤 여자애들이 보이지 않는 모퉁이까지 나를 데려간 린슬렛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애들이 물어보면 일단 내 남자친구라고 해둘게….”
“으음.”
지난번에 어머니한테 소개했을 때랑 비슷한 상황인 건가. 나는 그렇게 이해하기로 했다.
“그래서, 합격했나봐?”
“응.”
“행여나 우리 수업에 들어오진 말고.”
“그렇게 하지.”
지난번에 서로 합의해둔 것이 있었으므로 나는 적당히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런 내 대답에 우뚝 멈춰선 린슬렛은 이윽고 목까지 새빨갛게 물들어서는 뒤를 돌아보았다.
“네, 네가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
“네가 다른 여자들한테 보이는 게 싫다고!”
“…?”
“…. 뭐!”
“아, 아니. 아무것도.”
거의 분노에 가까운 린슬렛의 일갈에, 나는 적당히 대답하며 다시금 그녀에게 팔이 이끌려 걷기를 시작했다. 한참을 걸은 끝에 지난번에 린슬렛이 어머니를 피해 도망쳤던 탈의실로 다시 들어선 나는 슬쩍 한기가 도는 걸 느끼고는 숨을 삼켰다.
“씻어.”
“마, 막 써도 되는 거냐?”
들어올 때 팻말에 남자 축구부라고 적혀진 것을 기억 해 지적했으나,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게 사물함 중 하나에서 수건을 꺼내 던졌다. 얼떨결에 받았지만 과연 이래도 되는 걸까. 싶은 마음이 슬쩍 들었다.
“뭐 어때, 어차피 다 공짜로 쓰는 건데.”
“담이 큰 건지 그냥 무신경한 건지….”
“아, 그게 네가 할 말이야?!”
“? 내가 뭘.”
“주, 주인니임….”
뒤쪽의 넬 역시 동감한다는 듯 한숨을 내쉬어, 두 여성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모르는 다른 세계를 보이는 모습에, 나는 신경 끄자고 생각하며 샤워실 안으로 들어섰다.
“호오.”
저도 모르게 입으로 소리가 나올 정도로 훌륭한 시설이었다. 불투명한 칸막이마저 충실하게 갖춰져 있는, 최상급 호텔 수영장을 연상케 하는 샤워실. 나는 적당히 몸에 붙어 있던 바지와 속옷을 벗고는 찝찝하게 들고 바라보다 바깥쪽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주다연, 옷은 어떻게 하지…?”
“아, 거기에 둬. 탈수기 돌릴 테니까.”
믿음직스러운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옷을 바깥쪽에 놓고 칸막이 안으로 들어섰다.
따뜻한 물을 맞으니 어쩐지 여러 상념이 떠오르는 듯해, 나는 차갑게 식었던 몸을 다시 덥혔다. 넬 녀석은 린슬렛과 함께 있는 건지, 오른쪽 위에 통화 버튼이 들어온 게 보였다. 시험을 봤을 때와 같은 방식인 걸까.
“들어갈 테니까 보지 마.”
“뭐?!”
거기에 대해 좀 생각해보던 중, 갑작스레 문이 열리는 소리에 나는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예상한 바였다는 듯 비누갑이 날아와 콧등을 강타했다.
“큭!”
“보지 말라고 했잖아.”
인상을 찌푸린 채 중얼거린 린슬렛은 곧이어 크게 헛기침을 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이미 샤워실 안은 수증기로 가득 찬 상태였으나 나는 가녀리고 조그마한 실루엣을 보자 당혹스러움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자, 잠깐! 린슬렛! 진정해!”
“…. 하아, 뭘 진정하라는 거야. 괜찮잖아? 주변에는 아무도 없고, 요새는 다들 가볍게 하니까.”
이, 이건 예상치 못한 상황이다.
흐릿한 연기가 걷히며 린슬렛의…. 아니 주다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새하얗게 드러난 허벅지와 큰 수건으로 몸의 일부만을 가리고 있는 모습에 나는 숨을 삼켰다. 상기된 볼에서는 진심이 느껴졌다.
“주다연! 진정해! 우리는 뭔가 그, 그러니까! 정식으로 결혼을 약속한 사이도 아니기 때문에!”
“뭐어…? 그건 뭐 어때. 즐거우면 됐잖아?”
“네, 넬?! 네가 뭔 짓을 한 거지?!”
주다연이 이럴 리가 없다는 생각에 나는 당황해 중얼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요염한 얼굴로 다가온 녀석은 칸막이 끝을 붙잡고는 입술을 핥았다. 그리고 그 뒤쪽에서 떠다니는 넬이 느긋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넬은~ 아무것도 몰라요~.”
모르긴 개뿔!
“으윽!”
“저기, 준♡ 나 좋아해…?”
“….”
“푸훕…. 아하하! 모, 못 참겠어!”
“?”
내 침묵에 한순간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쉰 린슬렛이 갑작스럽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뒤로 물러서더니 입고 있던 수건을 휙 걷었다.
“바, 바보야! 옷 입…!”
“너야말로 바보잖아. 당연히 안에 수영복 입었지.”
“…. 뭐?”
그 말에 나는 눈을 감추던 걸 멈추고 다시 그녀를 보았다. 확실히 평범한 남색 수영복을 입은 채였고 나는 뒤통수를 쿵, 하고 얻어맞은 듯한 감각에 휩싸였다.
“너, 너어!”
“메롱, 속는 사람이 바보지.”
“바보네요오~.”
“넬, 너마저….”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사이 웃으며 바로 옆의 칸막이로 들어온 린슬렛은 온수를 맞으며 길게 콧노래를 불렀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니 녀석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직 빼앗기에는 좀 모자라나?”
“? 뭐가.”
“아무것도 아닙니다아.”
“….”
영문을 모르겠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샤워를 했다. 뭐, 얼굴 하나도 넘어오기 힘든 공간이었기에 보이지는 않으리라.
“그건 그렇고, 고마워. 토순이 구해줘서.”
“널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구한 것뿐이야.”
“…? 왜왜? 왜 날 만나고 시퍼쪄어?”
“이 멍청아! 얼굴 내밀지 마!”
아무 생각 없이 한 대답에 린슬렛이 눈을 반짝이며 칸막이 위에 얼굴을 올려, 나는 당혹스러운 기색을 느끼며 소중한 곳(?)을 가렸다. 하지만 보이지 않기 위해 가까이 다가간 탓에 우리는 거의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
“왜 다여니 보고 시퍼쪄?”
그리고 녀석은 씨익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웃는 이유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던 나는 이내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퀘, 퀘스트 어떻게 해야 하나 해서.”
“오구오구, 그래쬬요?”
“…. 너 말투 되게 기분 나쁜데.”
“히히, 끝나고 이야기하자. 잠깐 어디 가있을 수 있어? 수업이 세 시에 끝나는데.”
“중간에 빠져나와도 돼?”
“뭐, 토순이야 애들이 잘 봐주겠지.”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라….”
적당히 대답하며 젖은 앞머리를 매만지던 나는, 신경이 쓰이는 사실을 느끼고는 입을 열었다.
“그 토끼는 네 애완동물인 거냐?”
“? 아니. 실습실에서 같이 키우는 거야.”
“그렇군.”
가볍게 중얼거린 나는 어쩐지 그 대답의 뒷맛이 좋지 않은 걸 느끼고는 녀석을 바라보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샤워를 하지만 약간, 음 그러니까….
힘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내 착각일까.
“왜?”
“아니야.”
“뭐, 묻고 싶은 거 있으면 물어. 네 앞에서는 나도 편하게 하고 있으니까.”
“그 말은….”
다른 사람 앞에서는 편하지 않다는 건가.
“너 가끔, 되게 깊이 생각하는 거 알아?”
“그런, 가?”
“중이병 주제에.”
“정확히 뭔데, 그 중이병이라는 게.”
“…. 모르니?”
“정확히는.”
중학교 2학년에 걸리는 무슨 마음의 병 같은 거라고만 알고 있지, 딱히 그 외에는…. 관심도 없고 해서 어쨌든 좀 멀게 느껴지는 단어였다.
“하아, 너 2008년생 맞는 거지…?”
“일단은.”
그렇게 대답하자니 린슬렛은 약간 의심하는 듯한 눈초리로 날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 역시 그것을 빤히 보다, 이내 캔버스 같은 눈동자에 물감처럼 번진 붉은 기운을 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난 사실, 네가 무슨 도구를 들고 오나 했거든.”
“뭐어?”
“왜 있잖아. 뜰채 같은 거. 그래서 여자애들이 다 손 놓고 구경하고 있는가 싶었어.”
“난 또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나 했네….”
가볍게 웃은 린슬렛은 이내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아주 잠깐이었지만 쓸쓸한 미소를 입에 머금었다.
“뭐, 언제나 그런 역할은 내 몫이니….”
“네 몫이라고?”
“응 뭐, 실습실 쓰레기를 버린다던가. 배설물 청소 같은 건 나눠서 하지만…. 아무래도 이런 갑작스러운 상황에서는 내가 나서야 하는 법이라.”
그런 말에 나는 가볍게 앞머리를 매만지며 녀석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녀석은, 활동량이 왕성해 그런 쪽으로 믿음직하게 여겨지고 있는 걸까.
하지만 만약, 내가 그때 타이밍 좋게 지나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린슬렛이 오는 게 늦었다면?
“어쩔 수 없잖아. 지켜야하니.”
“누구를?”
“관계?”
약간 공허한 눈으로 중얼거린 린슬렛은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웃으며 내 쪽을 돌아보았다. 그 두 감정의 간극이 몹시도 적어, 나는 그 웃음이 꾸며낸 것임을 쉽사리 알아챘다.
“아니, 잠깐! 갑자기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묻지 좀 마! 분위기가 어색해지잖아!”
“미, 미안하다.”
너무 깊숙이 파고들어갔나 싶어, 그리고 또 그런 행동을 해버린 자신에게 이상한 기분을 느껴 나는 가볍게 앞머리를 매만졌다.
“너랑 있을 때는, 그냥 즐겁기만 하고 싶은걸.”
어쩐지 ‘관계’라는 말을 할 때의 린슬렛이 조금 애처로워 보인다고 느끼는 것은, 그녀에게 굉장한 실례일까.
“….”
재킷은 그 사람의 내면을 반영한다고 했던 엘레노어의 말이 머릿속을 스치는 순간이었다.
◇
========== 작품 후기 ==========
주다요니
히로인 셋 중에 누가 제일 인기가 많을까.. 생각 중입니다.
후보에 들지 못한 히로인으로는 주인공이 있습니다.
둔감 츤데레 무뚝뚝 열혈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