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편
<-- Chapter 2 : 호수의 기사 -->
◇
다음 날 아침,
[최근 VR기기를 이용한 청년들의 문란한 성 문화가 사회적인 이슈로 대두가 되고 있는 가운데….]
왜 항상 이런 뉴스인 걸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알람이나 다름없는 뉴스를 껐다. 그로서 현실에 돌아온 걸 실감한 나는, 반쯤 풀리다 만 피로감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길게 하품을 하며 방을 빠져나온 나는 이내 디멘션 커넥터의 프로그램을 하나 실행시켰다.
“쿠우우우….”
의외로 착실하게 잠옷에 나이트캡까지 쓰고 있는 넬의 모습이 허공에 드러났다. 베개를 끌어안은 채 잠에 빠져있는 녀석을 빤히 보던 나는 볼을 쿡쿡 찔렀다. 물론 재킷을 입고 있지 않았기에 허공을 가를 뿐이었지만.
“넬.”
“쿠우우우….”
내버려두자.
한동안 일어날 것 같지 않은 녀석의 모습에, 나는 잠을 쫓아내는 용도로 기지개를 펴며 샤워실 안으로 들어섰다. 조금 덜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섹스의 여파로 끈적끈적해진 몸을 차가운 물에 씻어 내렸다.
그래, 섹스인 거다.
“…. 끄응.”
뉴스에서는 그것이 제대로 된 성행위가 아니라고 했지만, 나는 그 무게감을 새삼 느꼈다. 마찬가지로 부끄럽다 못해 죽을 것 같아서 반나절 정도는 유하와 얼굴을 마주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잠깐 쥬브나일 포르노라도 다녀올까.
그렇게 생각하며 머리를 감던 중, 갑작스레 메시지가 도착했다. 모르는 번호로부터, 인데….
- 청강생 시험 합격하셨습니다. 개강 전까지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하시면 됩니다.
“다행이군.”
나는 무덤덤하게 감상을 내뱉으며 가볍게 숨을 내뱉었다. 정정당당한 합격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이로서 유하의 걱정을 좀 덜어줄 수 있게 되었다.
그럼 일단 린슬렛에게 연락을 해볼까.
그런 식으로 하루의 일과를 정하며 나는 적당히 그 첫 번째가 될 일을 시작했다. 넬이 자는 틈을 타 조용해진 카페를 즐기며 쓸고 닦고, 각종 쓰레기들을 모아다 버린 뒤 빵과 계란, 베이컨을 동원해 아침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유하의 방문 앞에, ‘합격했어.’라는 말이 남긴 쪽지를 남긴 뒤 조심스럽게 카페를 빠져나왔다.
“….”
뭔가 좀 홀가분한 아침이로군.
그렇게 생각하며 막 뜬 해를 보던 중, 나는 뒤쪽에서 요란한 소리를 들었다. 지저귀는 새 소리가 조용해지더니, 잠금장치 같은 걸 다급히 푸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 준! 주운!”
“….”
얼굴 보지 말자면서.
어쨌든 그런 소리에 뒤를 돌아본 나는, 2층 창문을 활짝 연 채 손을 흔들고 있는 유하를 발견했다. 꽤나 떨어져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손에는 내가 쓰고 나온 것처럼 보이는 쪽지가 들려진 상태였다.
“잘 다녀와요!”
그 말에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뒤로 돌아서 다시 걷기 시작했다. 스스로의 얼굴이 붉게 물든 기색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으하암…. 주인님. 일어나셨어요오…?”
바로 그때, 넬이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깬 듯 길게 하품을 했다. 그리고 금새 또 원래의 그 천 조각으로 뒤바뀌어 나는 힐끔 녀석을 바라보았다.
“어제 뭐하셨기에 유하님이 저렇게….”
“….”
“저렇게에….”
하고 긴 머리를 땋아서 묶던 녀석은 이내,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앗!!!”
버럭 비명을 질렀다.
“까, 깜짝이야….”
“네, 넬찡은 약속 지켰는데! 주인님이 보지 말라고 해서 열심히 잤는데!”
분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소리친 넬은 내 앞으로 부웅 날아와 발을 동동 구르며 분해했다. 커다란 눈동자에는 눈물마저 맺혀, 나는 시선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
“아, 아무 일도 없었다구우?”
“…. 주인님 되게 거짓말 못하는 거 아세요?”
“미안하다.”
나는 솔직하게 사과했다. 그리고 이내 붉어진 기색을 다시 감추려 녀석에게서 몸을 돌린 채 벽에 머리를 쾅쾅 박아댔다. 어떻게든 진정하자고 생각했지만 할수록 어제 유하가 마지막으로 해보자고 했던 자세는 무슨 사인펜으로 새긴 것 마냥 뇌에 머물러서….
“야한 생각하고 계시죠.”
“아, 아니거든.”
어떻게 여자는 허리가 그렇게…. 아니 이런 생각을 하고 싶지 않은데.
“변태.”
“으윽!”
심장에 사무치는 폭언이었다.
“어, 어쨌든 넬?”
“말씀해보시죠. 주인.”
넬은 팔짱을 낀 채 나를 노려보았다. 차가운 목소리에서 실제로 그 주변이 파직 얼어붙는 이펙트가 보였다.
“아, 앞으로도…. 좀 부탁한다. 아무리 그래도 너도 여자애인데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아서….”
“앞. 으. 로. 도?”
“….”
“앞. 으. 로. 도. 하시겠다는 건가요? 주인님?”
“죄, 죄송합니다.”
나는 왠지는 모르겠지만 사과를 했다.
“흐흥…. 여자애라고 불러준 건 기쁘지만.”
“?”
그게 뭐가 기쁘다는 건지 모르겠군.
“그래서 어제 몇 번 하셨어요?”
“….”
나는 손가락으로 세어보다가 포기했다.
“아무리 VR이라고 해도 너무한 거 아닌가요! 그러다가 말라 죽는다고요!”
나는 그렇게 넬의 잔소리와 구박을 견뎌내며 학교로 향했다.
목덜미와 입안에 진한 커피 향을 남긴 채.
◇
오리엔테이션은 적당히 한 시간 정도 학교의 청강생 시스템과 관련된 비디오를 보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촬영한지 10년은 족히 넘어 보이는 비디오의 강사가 하는 말에 의하면, 국법 몇 조 몇 항에 의거하여 나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전반적인 학비를 면제받으며…. 그쯤부터 적당히 눈을 감고 졸았다.
눈을 뜨니 오리엔테이션은 끝난 상태였다.
“주인님, 중간에 조셨죠.”
“….”
적당히 점심쯤 되어 나는 속이 텅 빈 것을 느끼며 이름 모를 학교 건물에서 나왔다. 마지막으로 나온 나를 보고 지난번의 그 깐깐해 보이는 여자 선생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배고프다.”
“수업은 뭐 들으실지 정하셨어요?!”
“네가 정해.”
“아이 참….”
나는 우려하듯 볼을 부풀리는 넬을 두고 적당히 교정을 거닐었다. 적당히 선선한 날씨에 앞머리가 휘날리는 것이 느껴져, 나는 일단 밥이라도 먹어둘까. 하는 생각을 했다. 잠이 덜 깼을 때는 곧장 린슬렛을 찾자 싶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녀석 역시 생활이 있을 테니.
바로 그때, 어디선가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도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의.
“…?”
“아, 토끼네요.”
넬의 말에 고개를 돌린 나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발견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른편에 있던 조그마한 연못의 안, 토끼 한 마리가 판자에 올라선 채 바들바들 떨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토, 토순아! 거기 가만히 있어!”
“곧 엄마가 올 테니까! 응?!”
의사 가운을 입은 여자애들이 연못의 반대편에서 소리를 질러댔다. 숫자는 다섯 명 정도. 학생들인 걸까. 안타까워하면서도 차마 연못에 들어가지 못하는 모습에, 나는 가만히 바라보다 이내 뒤로 돌아섰다.
“음, 안 도와주세요?”
“엄마가 온다잖아.”
그렇게 중얼거리며 신경 끄고 갈 길 가려던 나는, 이내 ‘의사 가운’과 ‘동물’이라는 조합을 통해 한 여자애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걸 느꼈다.
“….”
“아, 토, 토순아! 움직이면 안돼요!”
넬이 당황한 듯 목소리를 냈지만 도와주지는 못하고 있는 상황,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셔츠를 벗었다. 연못의 깊이가 짐작이 되질 않았으므로.
“아, 주인님?”
“나와 봐.”
무뚝뚝하게 중얼거린 나는 신발까지 벗고는 연못 속으로 들어섰다. 슬쩍 차갑고 끈적거리는 느낌과 함께 적당히 허리까지 오는 깊이임을 알아챘다. 단순히 청소를 안했을 뿐인 건가.
“아….”
반대편의 여자애들은 비명을 지르던 걸 멈추고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얼굴이 붉어진 채라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조심스럽게 토끼에게 다가갔다. 물살을 가르자 토끼가 앉아있는 판자가 흔들렸고 삐익! 삐익! 하는 비명소리가 났다.
“넌 왜 여기에 있는 거냐…?”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토끼의 귀를 잡고 들어올렸다. 추욱 늘어진 검정색 점박이 문양의 흰 토끼는 불안한지 연신 코와 입을 우물거렸다.
“아 저기….”
“너희들 것이지?”
“네, 네에에.”
중앙에 서있던 여자애가 무어라 말하려 했으나 내가 되묻자 볼이 붉어져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면홍조증이라도 있나 싶어 나는 별 신경 안 쓰고 토끼의 귀를 쥔 채 물 밖으로 나가려 했다.
하지만 바로 그때,
“토, 토순아아아!!”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싶어 고개를 든 나와, 양쪽으로 갈라지는 여자애들. 그 틈에서 금발을 하나로 묶은 린슬렛이 모습을 드러냈다. 재킷을 사용했나 싶을 정도로 엄청난 속도에 나는 멍하니 굳어져버리고 말았다.
“….”
“토순아!”
반쯤 날듯이 얇은 구두를 벗어던지고 물속으로 뛰어든 린슬렛이 내게서 토끼를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창백해진 얼굴로 토끼를 진정시켰다.
“으앙! 엄마가 미안해! 미안해! 계속 지켜봤어야 하는 건데! 토순아!”
이쪽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녀석은 열심히 토끼를 쓰다듬었고, 이내 쫑긋 서있던 귀가 아래로 내려갔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린슬렛은 토끼의 귀를 마사지하듯 살며시 누르다 날 휙 돌아보았다.
“저, 저기요! 구해주신 건 고마운데! 토끼를 귀부터 잡으시는 건 무슨 사냥꾼이라도 되서 하는 짓이에…! 아.”
아무래도 린슬렛은 토끼에 정신이 팔려서 나라는 걸 눈치 채지 못한 듯싶었다. 당황해 눈을 동그랗게 뜬 녀은 이내 내 몸을 위아래로 스캔하더니 얼굴이 빨개졌다.
“왜, 왜 네가 여기에?!”
“글쎄에.”
상황이 이토록 잘 풀릴 거라고 생각하진 못했던 터라 나 역시 슬쩍 당황스러운 기분이 드는 걸 느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내게는 허리까지 오는 높이가 린슬렛에게는 가슴 밑까지 닿는다는 사실을 알아채고는 입을 열었다.
“일단 나가자.”
“아, 알았어.”
토끼를 안전하게 받쳐 든 린슬렛을 이끌듯 먼저 나간 나는 이내 안전하게 바닥을 디디고 섰다. 물을 먹어 무거워진 바지를 느끼며 서있자니 린슬렛은 가까이 다가온 다른 여자애 중 하나에게 토끼를 건네고 하늘하늘한 치마를 짜내기 시작했다.
“무모하신 구석이 있다니까요.”
“그런가.”
“히히. 그런 주인님을 좋아하지만요.”
어느덧 뒤쪽에 다가온 넬을 아무렇지도 않게 바라보며 나는 허리를 숙여 바짓단의 물을 죽 짜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선을 느껴 고개를 드니….
“….”
얼굴을 붉힌 여자애들이 날 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당황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고개를 갸웃거렸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린슬렛이 내 앞을 가리듯이 서고 여자애들을 바라보았다.
========== 작품 후기 ==========
설정 상으로 있는 내용이라 크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지만... 주인공은 일단 영화 '비트'에 나오던 시절의 정우성 씨를 닮았다는 설정입니다...
죽창... 죽창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