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네크로맨서 재킷-46화 (46/321)

46편

<-- Chapter 2 : 호수의 기사 -->

늦은 밤이었으나 비비안이 소집 명령을 내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기사단원들이 모여들었다.

이번이 세 번째 방문인가.

나는 거대한 기둥에 기대어 선 채, 피로감을 쫓아내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레벨의 상승에 따라 적당히 생각한 뒤 스테이터스를 분배했지만 그래도 아직 주변은 어수선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무언가 회의를 진행하고 있는 듯, 안쪽 방에 비비안, 가웨인과 함께 들어간 린슬렛은 도통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우리는 증기 기관을 앞세워 서부 개척 시대를 열었소만, 안타깝게도 해신에 대한 인신 공양을 잊는 바람에 거대한 뱀장어의 저주로 말을 못하게 되었소.”

그리고 눈앞에는 바가 있었다.

덧붙이자면 몹시 막 되먹은 설정까지. 희미한 조명 아래로 드러난 테이블을 본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톰슨 기관단총과 중절모. 거기에 너구리. 몹시도 이질적인 설정들이었다.

“모두 대통령인 내 책임이지.”

한참동안 자기 나라의 역사를 설명한 대통령은 쓰게 웃으며 브랜디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그 귀여운 얼굴을 찌푸리며 크으, 하는 소리를 냈다.

“그, 그랬군요! 참으로 기구한 사연이네요!”

반대편의 넬은 흥미로운 듯 의자에 앉아 열심히 이야기를 경청했다. 너구리의 두툼한 꼬리가 높은 의자 밑으로 추욱 늘어지는 모습을 보며 나는 어이가 없어 웃었다.

“자네도 한 잔 하시게. 좋은 술이니.”

“그, 그럴까요? 주, 주인님?!”

“마음대로 해.”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고 넬은 약간 흥미로운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술을 한 잔 받았다.

“술이란 여인이 입술에 발려진 독이지….”

“어떤 부분에서 그런가요?!”

“독이라는 것밖에 알면서도 먹을 수밖에 없으니.”

“크으~ 고건 몰랐네~.”

“….”

두 사람(?)은 잘 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뒤를 이어 속속들이 기사단원들이 엘리베이터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한 번 주변을 크게 둘러본 녀석들은 이내 중후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너구리를 보고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모인 인원은 총 열 명 정도.

“그쪽의 신사 분은 어떠신가. 한 잔 대접하지.”

“…. 술을 잘 못해서.”

“그렇군. 이런 건 배우지 않는 게 낫네.”

“호오, 호오.”

이제는 아예 시가까지 피우기 시작했다.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너구리 대통령과 그를 신기한 듯이 보고 있는 넬. 내가 슬슬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다고 생각할 즈음, 왕좌 아래의 문이 열렸다.

“티티♡”

아마도 증강 현실 디바이스를 너무 사용한 후유증이겠지만, 나는 아까부터 린슬렛의 과도한 애정이 담긴 목소리가 하트처럼 떠오르는 걸 느꼈다.

“뭐래?”

“일단 나오면 설명할 거야. 깜짝 놀랄 준비하라고.”

“…. 떨어져.”

가볍게 웃은 린슬렛이 애정을 담아 팔짱을 껴와, 나는 몸이 굳는 걸 느끼며 말했다. 그러자 녀석은 그 귀여운 얼굴 가득, 순수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서비스!”

“…. 뭐가?”

대체 뭐가 서비스라는 거지.

“윽…! 미안하네. 유하 씨나 발렌타인 같지 않아서.”

하지만 내 물음에 린슬렛은 약간 원망하듯 눈을 치켜 떴다. 무슨 이유에선지 몰라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나는 이내 녀석이 언급한 유하와 발렌타인의 공통점을 깨닫고는 입을 열었다.

“아, 가ㅅ….”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코를 얻어맞았다.

“아, 아프잖아.”

“시끄러워.”

볼멘소리를 낸 린슬렛은 이내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서는 입을 다물었다. 단순히 기대는 식으로 쓰려는 건가 싶어 나는 납득하고는 왕좌를 올려다보았다. 언제부턴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비비안은 거기에 앉아 좌중을 둘러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두 모여주세요.”

디멘션 커넥터로 증폭된 목소리에, 알현실 내부에 있던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너구리 대통령이 작은 목소리로 ‘All Your Highness’라는 중저음의 목소리를 냈을 뿐.

“나 저 목소리 싫어.”

린슬렛은 그런 감상을 내놓았다. 약간이지만 재미있다고 생각해 피식 웃은 나는 녀석과 함께 왕좌의 밑으로 다가갔다. 이제는 괜찮은지 린슬렛이 살짝 떨어졌고 에스콰이어들이 모여들자 비비안이 입을 열었다.

“일단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랜슬롯의 에픽 퀘스트를 진행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 말에 에스콰이어들 사이에서 가볍게 동요가 일어났다. 누군가 휘파람을 부는 소리, 박수를 치는 소리. 하지만 비비안이 손을 들자 금방 조용해졌다.

“수고했어요. 린슬렛. 타나토스님도 감사합니다.”

그 말에 나는 살짝 목례를 해 인사를 했다. 뒤쪽에서 느껴지는 시선이 슬쩍 신경 쓰였다. 경계를 하는 것일까.

“다른 기사단에도 에픽 퀘스트를 진행 중이라는 보고를 받기는 하겠지만, 먼저 시작한 만큼 이쪽이 더 유리한 셈이네요. 자 그럼…. 거기 신사 분을 뭐라고 부르면 될까요?”

“아이젠하워. 라고 불러주게. 예쁜 아가씨.”

너구리는 그렇게 자신을 소개하며 에스콰이어들 사이를 거쳐 앞으로 나왔다. 더할 나위 없이 매너가 있는 시늉을 하는 한편…. 무척이나 마초적인 대사였다.

“어머, 고마워요. 아이젠하워 씨.”

능숙하게 대처한 비비안의 앞에 아이젠하워가 멈춰 섰다. 린슬렛이 가볍게 꼬리를 발로 건드렸지만 그는 눈치 채지 못한 채 시가를 손에 들고 좌중을 돌아보았다.

“자 그럼, 영웅들이여.”

그 말과 거의 동시에 눈앞에 퀘스트창이 떠올랐다. 아까와 거의 비슷한 내용이었지만, 조금 변화가 있었다.

==============================

에픽 퀘스트

==============================

제목 : 랜슬롯의 여정 5/10

난이도 : ★★★★★★☆☆☆☆

내용 : 3개의 원판 조각을 모두 획득하세요.

제한 시간 : 없음.

보상 : 경험치 1,000,000

==============================

원판 조각이라고?

“모쪼록 부탁하는 내 입장에서도 무례하다는 건 알고 있네. 하지만 도움을 주었으면 하네.”

“…. 한 가지 질문이 있는데.”

“말해보게.”

“무슨 원판 조각이야?”

“티, 티티?”

“…?”

궁금해 질문을 던진 나는 이내 어이가 없다는 듯 웃는 린슬렛을 보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녀석들도 황당하다는 듯한 태도여서 나는 점점 의문감이 드는 걸 느꼈다.

“아 그건, 말하자면 꽤나 길어지는 이야기여서…. 서부 개척시대의 이전이라고 할 수 있는 인디언 학살 시절부터 설명을 시작해야 하는데 괜찮겠나?”

정말 인종차별의 끝을 달리는 너구리로군.

“아, 아니 그거라면 나중에 듣지.”

“그럼 그런 걸로 알겠네.”

대충 다른 녀석들의 반응을 이해한 나는 식은땀이 나는 걸 느끼며 조심스럽게 거절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젠하워는 다시금 설명을 시작했고, 나는 린슬렛이 귓속말을 걸어오는 걸 느꼈다.

“게임 스토리를 누가 신경 써?”

“….”

너 분명히 비비안을 ‘부인’하면서 따르지 않았냐.

“어쨌든, 뭐 궁금한 거라도?”

“딱히….”

“그럼 이만, 여러분의 건투를 기원하겠네.”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사이, 아이젠하워 역시 퀘스트의 설명이 대강 끝난 듯 중절모를 들고 인사했다. 마찬가지로 뒤쪽의 비비안에게도 매너 있게. 그리고 녀석은 꼬리를 뒤뚱뒤뚱 흔들며 걸어가 벽 건너편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나는 이내 비비안이 가볍게 헛기침을 하자 다시 옥좌로 시선을 향했다.

“네 개 조로 나눌게요.”

비비안은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을 펼쳐보였다. 그리고 각자 원판 하나씩을 맡도록 조와 조원들을 배치하고는 나머지 한 조를 쥬브나일 포르노와 인근의 감시를 맡도록 했다. 나와 린슬렛은 서해안 쪽에 마커가 위치한 원판을 맡게 되었다. 거기다 가웨인도 함께.

“괜찮으시죠? 타나토스님.”

“….”

반쯤 형식에 가까운 비비안의 질문에 나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가웨인이 웃으며 내 뒤에 섰다.

“그럼 이로서 회의는 끝. 모두 잘 부탁해요.”

비비안의 말을 끝으로 회의를 끝나고, 각 조마다 적당히 구석으로 모여서 회의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걸 빤히 바라보다 이내 린슬렛이 팔을 잡아당기는 감각에 따라갔다. 미리 벽쪽에 있던 가웨인이 나를 반겼다.

“내가 특별히 부탁했어.”

“뭐?”

“티티랑 하고 싶다고.”

“…. 너도 그런 별명으로 부르는 거냐.”

게다가 그 특유의 손짓까지.

“가웨인. 넌 그렇게 부르지 마. 티티는 내가 부르니까 티티인 거라고!”

부우, 볼을 부풀린 린슬렛이 나와 가웨인의 사이에서 중재하듯이 섰다. 아쉬운 듯 초롱초롱한 눈망울에 그리움을 담는 가웨인의 모습에…. 아니 난 녀석의 표정에서 그런 것을 느끼는 거지.

설마 저 녀석‘도’ 날 좋아하나.

“어쨌든, 언제가 좋아?”

“뭐?”

상황을 환기하듯 뜬금없이 말을 꺼내는 가웨인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해안 쪽, 이잖아? 우리 조각. 가는 김에 바다도 보고 오면 어떨까 싶었지.”

“….”

“내일?”

“아, 내일은 안 돼.”

재촉하는 듯이 이야기하는 가웨인의 모습에 린슬렛은 고개를 내저었다.

“무슨 일이라도?”

“그건…. 개인적인 일이라 말해주기 곤란해.”

그렇게 이야기한 린슬렛은 곧이어 나를 바라보며 윙크를 했다. 하지만 짐작이 가는 바가 없었던 나는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고, 뒤쪽을 맴돌던 넬이 다가왔다.

“내일 시험 결과 나와요. 합격하시면 바로 오리엔테이션이….”

아, 그렇군.

“뭐야, 너희들만 개인적인 거 공유하기야?”

“….”

약간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는 가웨인의 모습에, 나는 어쩌면 정말로 이 녀석이 날 좋아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쳤다.

나는 그런 기색을 느끼며 터벅터벅 걸어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벌써 열두 시가 넘어 카페의 불은 꺼진 상태였고, 나는 잠가진 문을 커넥터로 인증하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고요하다 못해 싸늘했다.

유하는, 자고 있나.

“….”

낮에 있었던 일이 신경이 쓰였다.

“주인님, 식사는요?”

“생각 없어.”

“흐으음.”

“그보다 한 가지 부탁 좀 해도 될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공중을 맴돌고 있는 넬을 바라보았다. 스스로 이런 어처구니없는 부탁을 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지만….

“그 지난번처럼, 혹시 가능할까?”

“네? 어떤?”

“모텔에서 했던 것처럼. VR로.”

“…. 주인님?”

살짝 혐오스러운 넬의 시선에 가슴이 아파왔다.

“그런 게 아니거든.”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짐승도 아니고, 지난번처럼 꿈이라고 착각한 것도 아닌 시점에서 설마 무슨 일이 벌어지랴 싶었다.

“단지 조금 이야기가 하고 싶을 뿐이야.”

“흐음, 뭐 주인님이 그렇게 생각하신다면야. 그럼 일단 씻고 잠자리에 드시죠! 넬은 준비해둘게요오.”

가볍게 웃은 넬과 함께 나는 계단을 올라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들어서려다 이내 굳게 닫혀져 있는 유하의 방문을 돌아보았다.

확실히 좀 솔직해질 수 있으니까.

그곳에서는.

….

아니 설마 또 그런 일이 벌어질 리는 없겠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