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편
<-- Chapter 2 : 호수의 기사 -->
◇
좁은 방안은 차갑게 얼어붙은 상태였다.
“당신…! 내가!”
히스테릭한 목소리와 함께 비비안은 뒤편으로 팔을 뻗어 잡히는 물건들을 마구잡이로 던져댔다. 책, 꽃병, 전등 따위가 날아가 묵묵히 서있는 가웨인의 몸에 얻어맞았다. 하지만 그런 공격에도 가웨인은 묵묵히 그것을 견뎌내듯이 서있을 뿐이었다.
남에게는 절대 보여주지 않는 슬픈 얼굴로.
“마담, 그만해.”
“내가 말했잖아요! 함부로 들여보내지 말라고!”
“미안해. 내가 사과할게.”
인상을 찌푸린 가웨인의 수려한 눈썹에 깊은 오래 전의 기억을 도려내 붙인 것처럼 슬픔이 깃들었다. 하지만 흥분한 비비안은 좀처럼 진정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물건을 던졌고 그는 얼굴을 향해 날아드는 하드커버 책을 잡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애초에 왜…? 이제는….”
하지만 스스로 그런 말을 하다가, 가웨인은 큰 실책이었다는 걸 깨닫고 이내 입을 다물어버렸다. 하지만 말에는 흐름이 있기에, 비비안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깨닫고 손을 멈추었다.
“당신! 이게 다 당신 때문인데!”
“미안, 해.”
저도 모르게 꾹 쥔 책이 구부러졌다. 거기에 비비안은 그것이 자신의 ‘소중한 책’임을 깨닫고 손을 뻗었으나, 이내 의자가 흔들리며 앞으로 쓰러졌다.
“꺄악?!”
“수현아!”
놀라 달려간 가웨인은 비비안의 자세를 바로 해 품에 안았다. 하지만 비비안은 크게 인상을 찌푸리며 동시에 그의 팔을 꾹 쥐었다. 손톱이 파고들어 피가 났다.
“날, 부르지 마…!”
“비, 비안….”
“날 그런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고!”
비비안은 분노한 채 가웨인을 노려보며 가슴을 밀어냈다. 하지만 가웨인은 아랑곳 않고 그녀를 안아든 채 일어서 침대에 눕혔다. 저항하듯 뿌리치려는 비비안의 손을 힘으로 고정시키던 그는, 이내 눈이 마주치자 몹시도 괴로운 얼굴을 해보였다.
“마담….”
“….”
그리고 그런 호칭에 비비안 역시 진정한 듯 길게 심호흡을 하며 이내 눈을 감았다. 하지만 서로의 신체가 닿은 것에 불쾌감을 느끼는 걸까. 파르르 깨물어버리는 입술에 가웨인은 뒤로 물러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명령을.”
“…. 당신은 그러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군요.”
“명령을.”
“좋아요.”
그게 당신이 원하는 거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목소리를 읊조린 비비안은 이내 묵묵히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가웨인은 거기에 충성스럽게 응답하고는 천천히 바깥으로 나갔다.
“어차피, 듣지도 않을 거면서.”
비비안은 슬픈 기색을 담아 중얼거리고는 바닥에 꺾여져 있는 ‘좋아하는 책’을 바라보았다.
◇
우연찮게 집 근처를 지나던 나는, 유하와 함께 점심이라도 먹을까 싶어 잠시 카페에 들리기로 했다. 어쨌든 유하가 해주는 밥은 맛있었으므로.
“….”
안에는 손님이 한 사람.
나는 그 인영에 신경을 거둔 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유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아, 혹시 주방에 있을까싶어 나는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음, 주인님?”
“주, 준. 왔어요?”
넬이 부르는 소리와 유하가 주방에서 나오는 소리가 거의 동시에 들려, 나는 일단 유하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앞치마 차림인 채 살짝 당황한 기색이어서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있어?”
“아, 아뇨. 꿈이라고 생각했는데.”
“꿈이 아니었단 말씀!”
“….”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싶어 가늘게 눈을 뜬 채 뒤를 돌아본 나는 익숙한 금발을 발견하고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걸 느꼈다. 카페에서 초등학생을 주된 대상으로 판매하는(그렇기에 결코 판매될 일이 없었던) ‘하이퍼 초콜릿 우유’를 마신 린슬렛이 씨익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여어! 히사시부리!”
“….”
“번역할까요?”
“아니.”
뒤쪽에서 충실하게 네비게이터의 룰을 따르려는 넬을 제지한 나는,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며 린슬렛에게 다가갔다. 털 달린 가죽 재킷에 스키니 진. 입술 위에는 둥그렇게 하이퍼 초콜릿 우유의 자국이 남은 상태였다.
“입 좀 닦아.”
“…!! 크, 크흠.”
내 지적에 얼굴을 붉게 물들인 녀석이 이내 냅킨으로 입술을 닦아냈다. 그 위에 살짝 묻어나오는 붉은 입술 자국을 확인한 나는 앞머리를 매만지며 말을 잇….
“자아, 일단 앉아봐!”
지 못한 채로 팔을 당겨져 린슬렛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녀석은 말 더럽게 안 듣는 천진난만한 초등학생 같은 얼굴로 웃으며 손을 번쩍 들었다.
“언니! 달달한 거 한 잔 더 주세요!”
“네?!”
갑작스러움 외침에 놀랐는지 화들짝 눈을 뜬 유하가 이내 나를 돌아보았다. 정확히는 린슬렛이 팔짱을 끼고 있는 부분을.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입술을 질끈 깨문 유하는 앞치마 끝을 말아 쥔 채 테이블 쪽으로 천천히 걸어와 우리 앞에 섰다.
“주, 준은…!”
“네?”
“준은 에스프레소를 좋아해요!”
단정한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소리친 유하는 이내 단호한 표정으로 꾹 입을 다물었다. 나한테 청강생 등록을 하라고 할 때나 짓는, 그러니까…. 웬만해서는 하지 않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호오.”
그리고 그런 우리를 지켜보던 넬이 뭔가 깨달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끄덕. 린슬렛 역시 그런 유하의 반응에 흥미롭다는 듯이 눈썹을 치켜떴다.
설마 나만 상황을 이해하고 있지 못한 건가.
“‘이모님’의 초코 우유가 너무 맛있어서 그러는 건데?”
“이, 이모…!”
“유하님 방어력 수치가 하락하셨어요!”
“거, 거기 학새앵? 커피에는 ‘애’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어른’들만의 세계가 있는 거예요.”
“애, 애라고…!”
“아아, 린슬렛님 통한의 1패에요!”
쏜살같이 이어진 두 사람의 대화에, 나는 영문을 모른 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평소처럼 상냥한 미소를 지은 유하는 어쩐지 이마에 힘줄이 돋아난 채였고 그것은 린슬렛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웃고 있음에도 어쩐지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
모르겠다. 왜들 이러는 건지.
“네, 넬! 너는 어떻게 생각해?!”
“네넬?!”
“넬을 볼 수 있어요?! 주, 준! 어떻게 이런 불량스러운 분에게 넬을 볼 수 있도록 권한을…!”
아무래도 유하의 뇌에서 ‘금발 = 불량’으로 코드가 짜여져 있는 모양이었다.
“아, 아니 그게….”
“흐흥~ 티티하고 나는 무척이나 친밀한 사이니까!”
당황한 채 변명을 하려던 내 말을 끊은 린슬렛이 더욱 강하게 팔짱을 꼈고, 유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목소리를 냈다. 무척이나 흥분한 상태로.
“치, 친밀…?! 어느 정도로 말이죠?!”
“새벽이 넘어서까지 단 둘이서 뜨거운 밤을 보낸 사이라고 이야기하면 될까?”
“주, 준! 그게 정말이에요…?”
“? 뭐, 그렇지.”
송전탑 위에서 꽤 오래도록 어울리긴 했으니.
“아, 아아….”
“유, 유하님이 다운되셨어요!”
넬의 외침대로 반쯤 무너져 내린 유하가 테이블에 손을 짚었다. 그리고 잠시 비틀거리던 그녀는 마찬가지로 내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죄, 죄송해요. 준…. 잠깐 현기증이.”
“괜찮아.”
“그, 그래서 저 분은 누구…?”
거기에는 무어라 대답하면 좋을까.
침을 삼키며 옆을 돌아보니 린슬렛은 어깨를 으쓱 하며 별 거 아니라는 듯 웃었다. 그리고 어쩐지 전전긍긍해하고 있는 유하를 향해 대답했다.
“대학 친구, 비슷한 거랄까?”
“…? 아, 준. 얼마 전에 사귄 건가요?”
“어머~ 언니. 사귀다니. 그건 아직이에요!”
“저, 저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닌 데요!”
부끄러운지 몸을 베베 꼬는 린슬렛과 거기에 발끈해 다시금 목소리를 높이는 유하. 린슬렛이 또 장난을 치는 건가 싶어 나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주다연, 장난은 적당히 해.”
“뭐, 뭣?!”
하지만 그런 부름에 녀석은 화들짝 놀라며 얼굴을 붉혔다. 입술을 파르르 떨던 녀석이 이내 내 팔을 잡아당겨 귓가에 입을 가져다댔다.
“너, 너…! 갑자기 이름으로 부르면 어떻게 해!”
“어쩔 수 없잖아.”
“우, 우으으으으….”
내 말에 잠깐 우는 소리를 내던 녀석은,
“나, 나도 불러도 돼?”
큰 눈망울로 이쪽을 올려다보며 간청하듯 이야기했다. 나는 뭐가 문젠지 싶었지만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이주운….”
“…. 그래, 주다연.”
대체 뭐가 부끄러운 걸까.
여자들의 습성이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걸 느끼며 나는 가볍게 앞머리를 매만졌다. 그리고 잠시 후, 유하에게 설명이 덜 되었다는 걸 깨달은 나는 고개를 돌렸다.
“유하, 이쪽은 주다연이라고…. 대학 시험 도중에 알게 된 사이야. 주다연. 이쪽은 송유하….”
“반가워요! 언니! 이준의 친. 누. 나. 같은 사람이라고 들었어요오!”
소개를 하던 내 말을 끊은 주다연이 활짝 웃으며 더 몸을 밀착했다. 그리고 무슨 이유에선지 눈을 동그랗게 뜬 유하 역시 팔짱을 꼈다.
“가. 족. 같. 은. 사이죠! 가. 족!”
“아하아~ 엄마와 아들 같은 가족이요?”
“그, 그게 아니라! 부…!”
“부?”
“우으….”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유하는 얼굴이 빨개져서 입을 다물었다. 잠깐 고민을 하던 나는 어쨌든 그 가족이라는 어감에 안심이 되는 걸 느끼며 살짝 웃었다.
“티, 티티! 그래서 선택해! 단순히 쓸 뿐인 에스프레소야? 아니면 달고 맛있는 하이퍼 초코우유야!”
바로 그 순간, 놀란 린슬렛이 눈을 치켜뜬 채 소리쳤고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유하가 말했다시피 에스프레소다만….”
“키, 키이이이이잇!!”
화난 고양이처럼 털(?)을 곤두 세워 화를 내는 녀석. 그리고 반대로 옆에서 부끄러워하던 유하가 반색했다.
“후후♡ 역시 그렇죠? 그럼 에스프레소를….”
“아니, 괜찮아.”
“네?”
밝게 웃으며 대답한 유하를 제지한 나는 이후 린슬렛을 팔을 잡은 채로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이준?”
그런 행동에 얼굴을 붉힌 린슬렛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 나는 유하를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점심은 바깥에 나가서 먹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주, 준?”
“미안, 잠시 이 녀석이랑 나갔다올게.”
말을 더듬으며 이쪽을 보는 유하를 향해 이야기한 나는, 린슬렛의 팔을 잡고 카페를 빠져나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