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편
<-- Chapter 2 : 호수의 기사 -->
◇
어디선가 디멘션 커넥터를 착용하게 된 현대인은 현실과 가상의 분간이 어려워져 꿈을 실제처럼 꾸게 된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났다.
“….”
그 말대로, 나는 현실과 무척이나 분간이 가지 않는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일어나.”
린슬렛이 내 위에 올라탄 상태였으니까.
“일어나라고.”
꿈은 몹시도 정교해, 디멘션 커넥터의 인터페이스가 그녀를 ‘린슬렛’이라는 표기까지 해둔 상태였다. 거기에 뒤쪽에서 3D 선글라스와 팝콘을 와작와작 먹고 있는 넬이 부웅 날아다녀 나는 눈을 깜빡거리며 입을 열었다.
“너, 왜…?”
시간을 확인하니 새벽 2시가 약간 덜된 시각. 나는 적당히 느껴지는 무게감에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녀석은 인상을 찌푸린 채였다.
등 부근에 머무는 금발이 가볍게 흔들렸고, 짓궂은 미소를 지은 채 녀석은 내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목 부근에 털이 달린 검붉은색 가죽 재킷, 고양이 가면은 쓰지 않은 상태로 큰 눈동자에는 내 얼굴이 비치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순간적으로 과일향이 풍겨와, 분홍색 입술이 복숭아를 연상케 해 나는 저도 모르게 예쁘다는 생각을 했다. 잠깐 내 턱 아래로 얼굴을 내린 녀석은 이내….
“일어나라고!!”
“크헉?!”
무지막지한 펀치를 먹였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 통증을 견뎌내듯 옆으로 몸을 돌린 나는 침대에서 곧장 떨어졌다. 이미 제대로 된 펀치를 먹이기 위해 일어나 있던 녀석을 돌아보며 나는 저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꾸, 꿈이…?”
“아니었지! 당연히!”
“아, 주인님. 야한 꿈인 줄 아셨던 거죠!”
“…? 야해?”
린슬렛은 이해가 가지 않는 얼굴로 옆에 떠오른 넬을 돌아보았다. 내가 통증이 있는 복부를 움켜쥔 채 있자니 넬은 이내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린슬렛의 귀에 대고 뭔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뭔가 불안한데.
“…. 뭐? 어디에, 피가?”
“넬?”
“하반신에 피가 몰려있었다니 그게 무슨…. 아.”
이야기를 듣던 린슬렛의 깨달음을 얻고는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그 옆에서 악마의 꼬리와 뿔 같은 게 돋아난 채 무거운 사실을 이야기하는 넬의 모습에 나는 불안한 기색을 느끼며 손을 뻗었으나, 이미 린슬렛은 모든 사실을 깨달은 것 같았다.
“지, 진정해.”
나는 침착하게 방패를 소환해드는 린슬렛을 향해 이야기했다. 하지만 녀석은 반쯤 이성을 잃은 채 천천히 다가왔고, 나는 당황해 엉덩방아를 찧은 채로 기어서 문을 열고 복도까지 물러섰다.
“이, 이건. 남자라면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
“딱히 너를 보고 그런 현상이 발생한 건 아니야.”
“….”
“저, 정말이야. 너를 보면서 그런 생각은 전혀 들지 않으니까. 그, 그렇다고?”
“….”
“넬은 린슬렛님이 더 화가 나신 것 같아요.”
그 말대로 이마에 빠직, 힘줄이 돋아났다. 나는 반대편에 있는 유하의 방문에 기대어 서서 당혹스러운 얼굴로 린슬렛을 바라보았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벌컥 문이 열려 나는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아함…. 준? 무슨 일 있어요오?”
“드, 들어가 있어!”
나는 당황해서는 돌아보았다가 유하가 깜짝 놀랄 정도로 야한 네글리제 차림인 걸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슴에 걸린(?) 네글리제의 그, 뭐랄까. 남자인 나로서는 명확히 설명할 수 없는 불투명한 천이 커튼처럼 떨어져…. 아니, 잠깐만. 아, 안 돼…!
“주인님 하반신에 다시 혈류가!”
“그래. 그렇게 완벽하신 분 옆에 있으니 그렇단 거지?”
유하의 등장에 잠깐 당황하던 린슬렛은 넬의 말에 다시금 이성을 잃고 방패를 들었다.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유하를 지켜야겠다는 생각에 팔을 들었으나, 이내 제지를 당했다. 유하는 비틀거리며 린슬렛에게 다가가,
“유, 유하 누나?!”
훌쩍 끌어안았다.
“어머나아, 이 귀여운 분은?”
“…?”
그녀는 잠에 취해선지 지금 상황에 대해서 아무런 의문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저건 좀.
“수, 숨 막…. 혀.”
“준, 새로운 네비게이터에요오?”
가슴에 파묻힌 린슬렛이 괴로운 소리를 내자 유하가 웃으며 내 쪽을 돌아보았다. 그런 쪽으로 생각하는 건가 싶어 나는 상황을 깨닫고 입을 열었다.
“으, 응! 마, 맞아!”
“어라아? 하지만 왜…. 감촉이…?”
“자, 잠이 덜 깨서 착각하고 있는 거야!”
“그렇겠네요오….”
반쯤 눈이 풀려 있던 유하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살짝 안심을 하고 있던 나는 이내 짓궂은 표정을 다시금 짓기 시작한 린슬렛을 발견했다.
“헤에, 네 여자친구?”
“그런 거 아니거든.”
“준? 빠알리 소개해줘요오.”
“…. 자, 잠시만.”
나는 볼을 부풀린 채 칭얼거리는 유하를 뒤로 한 채 린슬렛의 팔을 잡아 방으로 끌었다. 그리고 살짝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녀석을 벽에 몰아붙였다.
“여기는 어떻게 알고 온 거야…?”
“뭐, 얼굴하고 이름만 알면 다 알 수 있는 시대니까.”
“…. 빌어먹을.”
나는 가볍게 혀를 차며 가슴보다 더 아래에 오는 녀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자니 린슬렛은 주머니를 뒤적거려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데이터 덩어리.
거기에 액세스를 하자 녀석의 개인 신상 정보가 이미지의 형태로 표시되었다. 주다연이라는 이름부터 시작해 서울 중심부의 펜트하우스에 살고 있다든가…. 가족 관계나 전화번호, 그 외에도 다양하게.
“이러면 공평하지?”
“….”
“뭐 난, 행여나 너와 틀어진다 하더라도, 그럴 마음은 전혀 없지만…. 그래도 불안하잖아? 파트너 아저씨.”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서로에게 족쇄를 채워두는 녀석의 모습을 보며 어이가 없어지는 걸 느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주머니에 꽂아 넣었던 손을 뽑은 린슬렛은 가볍게 내 코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정말로 우리 사이가 틀어진다고 해도…. 그건 게임 상에서 해결하는 게 맞다고 보지만.”
“…. 동감이야.”
“후후, 그런데 안 그런 놈들도 많거든.”
가볍게 어깨를 으쓱한 녀석은 이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나는 게임에 정말로 빠져 있기 때문에, 도리어 린슬렛의 말에 신뢰가 가는 걸 느꼈다.
“그래서, 왜 온 건데?”
약간 성질을 누그러뜨리며 묻자 녀석은 씨익 웃었다.
“왜냐니. 언제든지 연락하라며?”
“이건 연락이 아니라 주거 침입인데.”
“나가자. 우리 할 얘기도 있었지?”
“…. 새벽 두 시라고.”
“어머어~ 새 나라의 어린이였어?”
빠직.
“넬은 어때? 밤거리를 보고 싶지 않아?”
“오, 오오! 보고 싶어요! 주인님! 보러 가요! 네?!”
“….”
린슬렛의 말에 순식간에 넬도 동화되어 턱 밑에 주먹을 말아쥔 손을 붙인 채 나를 바라보았다. ‘자 어떻게 할래?’라고 묻는 듯 허리에 손을 올리는 린슬렛.
어차피 잠은 다 깬 상태였다.
“그러면 일단, 유하를 좀 재우고….”
“나 소개해야 돼? 음, 인공 지능이라는 설정으로?”
“그건, 음.”
내가 머뭇거리며 입을 다물자 린슬렛은 삐빕, 삐빕, 하는 소리를 입으로 내기 시작했다.
“삐비빕, 나는…. 돈으로 움직인다….”
“그런 소리 하지 말고.”
유하라면 정말로 기뻐하며 돈을 넣을 사람이니까.
나는 진땀이 나는 걸 느끼며 린슬렛을 만류하고는 슬쩍 고개를 내밀어 바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설명을 할 필요가 없어진 걸 깨닫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쿠울….”
유하는 이미 방문 앞에 기대 잠든 상태였던 것이다.
◇
우리는 밤거리를 날듯이 질주했다.
“너 그런데, 레벨은 몇이야?”
“….”
파쿠르를 하듯 건물 위를 날고 달리던 중, 린슬렛이 가볍게 질문을 던졌다. 여유롭게 내 쪽으로 몸을 돌려 높이뛰기 선수처럼 날아오른 녀석은 이내 응? 하고 되물으며 씨익 웃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데.
“그러는 너는?”
“흐음~ 내가 먼저 물어봤는데!”
“무슨 애냐.”
내가 적당히 대답하자 녀석은 철골 구조물 사이를 뛰어넘으며 무언가를 집어던졌다. 그 권한을 받아들인 나는 눈앞에 떠오르는 스테이터스를 눈으로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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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S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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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 린슬렛
Lv : 157
Knightage : Lacus
JACKET : Guardian
Exp : 6,370,000/11,796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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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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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력 : ?
방어력 : ?
민첩성 : ?
정신력 : ?
연산 속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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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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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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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일단은 그 정도만. 됐지?”
“….”
157의 경험치 테이블은 무시무시할 정도로군.
“요새는 레벨이 잘 안 올라서. 너는 어때?”
“별반 다르지는 않은 상황이지.”
나는 무뚝뚝하게 중얼거리며 린슬렛과 함께 좁은 골목 아래로 내려섰다. 6층 높이의 옥상에서 착지했으나 재킷이 부드럽게 충격을 줄여주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상황에 좋은 레벨업 수단을 찾았단 말씀!”
“…?”
“일단 그 전에, 이야기부터 끝내자고. 티티.”
그렇게 중얼거린 녀석은 검지로 날 가리키며 대답하라는 듯이 몰아붙였다. 슬쩍 시선을 피하듯 맨홀 쪽을 바라보던 나는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이겼어.”
“뭘.”
“그때 너 보내놓고….”
다시 했거든.
나는 슬쩍 얼굴이 붉어지는 걸 느끼며 린슬렛에게 그런 사실을 전했다. 녀석을 보낸 뒤 따로 쥬브나일 포르노에 가서 빼빼로와 술로 대결을 벌여 에픽 퀘스트의 독점 권한을 따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사실을 알게 된 린슬렛은.
“정말?”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눈동자를 반짝이던 녀석은 이내,
“야호! 야호! 야호오오오오!”
큰 소리를 내며 대롱대롱 내게 매달려왔다. 무게감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마른 린슬렛은 내게 안겨서는 꾹 끌어안으며 감정을 표출했다. 적당히 봐줄까 싶었던 나는, 이내 녀석이 볼에 입을 맞추려 하자 얼굴을 손바닥으로 잡고 쓱 밀어냈다.
“기뻐하지 마.”
“응응! 기뻐하지 않을게!”
“….”
기뻐서 거의 울기 직전으로 보이는데.
그 활달한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녀석은 땅에 내려온 뒤에도 몇 번이고 방방 뛰며 기쁨을 표출했다. 한숨을 내쉬며 앞머리를 매만진 나는 이내 말을 이었다.
“딱히 널 위해서 한 건 아니니까.”
“사랑해! 나랑 결혼하자!”
“….”
“혼인 신고라면 지금도 가능하세요!”
“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