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편
<-- Chapter 2 : 호수의 기사 -->
“뭐가.”
“그냥. 모든 게.”
“왜 저러시는 건데?”
“글쎄에. 처녀는 ‘가치’가 있으니까?”
“…?”
“아, 아무것도 아니야! 카페나 가자…. 아, 미안해. 오늘은 못 갈 것 같네. 방금 급한약속이 잡혀서.”
린슬렛은 스스로도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으며 사과를 했다. 점점 잦아들다 이내 마지막에는 거의 들리지도 않던 목소리에, 나는 입맛을 다셨다.
“그럼 언제.”
“응?”
적당히 묻자 녀석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슬쩍 시선을 내리깔아 시선을 마주친 나는 말을 이었다.
“확실히 정해. 몇 시에 어디서 볼 건지.”
“….”
“왜.”
“에이씨, 진짜. 그러기야?!”
“뭐.”
“이렇게 귀여운 미소녀가 우울해져 있으면 당연히 무슨 일이냐며 위로해줘야지! 물어도 대답 안 할 거지만!”
“알게 뭐야.”
“우으으으으! 이, 이준! 너!”
“왜 그러는데, 다연.”
“…!! 주다연이거든!”
“그래, 주다연.”
나는 무덤덤하게 대답하며 녀석에게서 몸을 돌렸다.
“너, 너! 나중에 연락할 테니까! 바로 나오라고!”
“….”
적당히 손을 들어서 인사.
녀석을 뒤로 한 채 바깥으로 빠져나오자 강렬한 햇살이 몸에 번지기 시작했다. 나는 옆으로 쓰윽 날아들어 가까이 얼굴을 대는 넬을 느끼며 시선을 마주쳤다.
“주인님.”
“…?”
“일부러 그러시는 거예요?”
“뭐가.”
◇
사실 따로 약속이 없던 것도 아니었으니.
“괜찮은 퀘스트를 소개해줘.”
나는 새삼 정화 필터의 우수함을 느끼며 의자에 앉아 반대편의 발렌타인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재즈 음악들로 가득한 이곳, 쥬브나일 포르노에는 오늘도 손님들로 가득했다. 대부분이 NPC인 것 같았지만.
“이른 시간에 오셨네요. 타나토스님.”
‘게임 상의 시간’으로 지금은 낮인 모양으로, 덕분에 내 앞에는 딱히 좋아하지도 않는 술이 아니라 에스프레소가 놓인 채였다. 그걸 가볍게 한 모금 마시는 동작으로 입안에 씁쓸한 맛을 감돌게 한 나는 입을 다문 채 가만히 녀석을 바라보았다.
“….”
마스크를 쓰고 있는데 에스프레소니 참 편하긴 하군.
“괜찮은 퀘스트라니, 어떤?”
“뭐라도 좋으니까.”
“기본적으로 저희는 회원제로 운영이 되어서요.”
“말인즉슨?”
“유저 정보를 공개해주셔야 한다는 거죠.”
“….”
나는 그 말에 슬쩍,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는 척 넬을 바라보았다. 녀석이 고개를 가볍게 내젓는 동작을 취하자 나 역시 거기에 동감해 눈을 깜빡였다.
레벨을 공개하게 된다면, 내가 현재 기본적인 게임 플레이의 안으로 채택하고 있는 ‘블러핑’이라는 체계가 붕괴하기 때문이었다.
현재 시점에서 나는, 상당히 낮은 레벨이었다. 물론 그 성장 속도는 꽤나 빠른 편인 것 같았지만, 어쨌든 가웨인 같은 최상위급 고수들에게는 한낮 찌꺼기에 불과할 터였다. 하지만 내가 그들과 이렇게 이야기라도 할 수 있는 이유란 무척이나 간단했다.
망령 신체의 덕이었다.
30초 간 모든 공격을 무효화 시켜 스스로의 몸을 망자로 만드는 능력. 그렇기 때문에 라쿠스 기사단의 비비안이나 다른 인물들은 모두 내가 외국에서 에스콰이어 생활을 하다온 미지의 고수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그래서 흥미를 느끼는 걸 테고.
“타나토스님?”
그렇기 때문에 이 제안은 나에게 별다른 가치가 없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발렌타인을 바라보며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딱히 그러고 싶지는 않은데, 다른 방법은 없나?”
“어머 저희를 믿지 못하시는….”
“딱히 그런 건 아니야.”
난 아무도 믿지 않기 때문이지.
라는 말을 삼키며 나는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발렌타인과 눈을 마주쳤다. 잠깐 고민에 빠져 있던 그녀는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고 웃어보였다.
“참, 곤란하게 하시는 분이네요.”
“어제도 그랬었지.”
“어머, 자랑스럽게? 하여간 남자아이들이란….”
그로서 슬쩍 어른스러운 티를 낸 발렌타인이 이내 눈앞에 놓인 자줏빛 액체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는 그 와인으로 보이는 음료를 가볍게 흔들었다.
“그래서, 린슬렛하고는 친해지셨나요?”
“…. 뭐?”
“어제 결국, 경쟁 퀘스트에 이기셔서 따가셨잖아요. 에픽 퀘스트 독점 권한. 그것도 혼자서.”
쓸데없는 소리를 다 하는군.
“겸사 겸사였을 뿐이었어. 개인적으로 물어볼 일도 있었으니까…. 뭐 그렇게 봐?”
나는 능글맞게 웃고 있는 발렌타인의 모습을 보며 약간 당황한 채 말을 내뱉었다. 눈 쪽이 어두워 제대로 된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약간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어제 결국, 경쟁 퀘스트 하신 다음에 완전히 취해버리셔서 그냥 집으로 가셨잖아요?”
“….”
“그래서 오늘 다시 오셨고.”
“본론으로 돌아오지.”
나는 얼굴이 붉게 물드는 걸 느끼며 시선을 피한 채 대답했다. 옆에서 넬이 쿡쿡, 웃는 소리를 냈고 발렌타인 역시 후후, 하고 입술을 빙긋이 그렸다.
어쩌라고.
“뭐, 그러시다면 아쉽지만 어쩔 수 없겠네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발렌타인은 품안에서 당기듯 장죽을 꺼내 입에 물었다. 연한 분홍빛의 머리가 물결을 그리듯 어깨 위로 떨어져 내렸다.
“….”
“서로 신뢰하지 않는 시점에서 이 일은 불가능하니까요. 게다가 저희는 정보상으로서 원칙을 지켜야 하는 입장이기도 하므로.”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는 건가.
“시간을 빼앗아 미안하군.”
나는 무뚝뚝하게 중얼거린 후, 망설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단은 쥬브나일 포르노에 관해서는 우선순위를 밀어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굳이 여기만 방법이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아, 타나토스님.”
“…?”
“빼빼로랑 같이 가시죠.”
굳이 그래야할 이유가?
하면서 돌아보니 발렌타인은 희미하게 웃으며 뒤쪽의 바 테이블에 서있던 빼빼로와 시선을 교환했다. 그로서 대화가 끝난 듯, 빼빼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무 판자를 뛰어넘어 내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가시죠. 타나토스님.”
“…? 내 의지는?”
“지름길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그러면서 앞장서 걷기 시작하는 녀석, 앞머리를 매만지며 서있던 나는 이내 한숨을 내쉬며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배 위에서 훌쩍 뛰어오른 녀석은 멀찍이 떨어진 파이프 중 하나에 착지했고 나 역시 그 뒤를 따랐다.
“혹시 이 뒤에 스케줄이 있으십니까?”
“딱히.”
“그러시다면….”
뒷말을 흐린 녀석이 가볍게 눈앞의 패널을 터치했고, 멜빵과 베스트였던 복장의 재질이 변화를 거쳐 운동복이 되었다. 나는 슬며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건 돈 주고 사는 거냐?”
“네, 타나토스님도 하나 사시죠. 여름 옷 같은 걸.”
“…. 돈 없어.”
“저렴한 가격에 명품을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만.”
그러고 보니 녀석의 운동복은 나이키였다. 어쨌든 여름에도 이걸 그대로 입고 다닐 순 없었으므로, 나는 앞머리를 매만지며 나중에 한 번 둘러보기라고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재질이나 색까지 바뀐 녀석의 재킷은 그다지 나빠 보이지 않았으니.
“이쪽입니다.”
“….”
길이 좁았기에, 녀석은 재킷의 능력을 이용해 물 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걷고 있었다. 덩치가 큰 탓에 내가 올려다봐야하는 모습. 얼핏 둔해 보이는 외모와는 다르게 안광에서는 여유로움과 침착함이 슬쩍 엿보였다.
“게임 플레이는 언제부터 하셨습니까?”
“그러는 너는.”
“3년 정도 되었습니다. 타나토스님은?”
“…. 나 역시 그쯤.”
“그렇습니까. 꽤 강하시던데.”
“그런가? 이쪽 유저 기준을 잘 모르겠어서.”
“저와 그때 그 두 사람이 그다지 레벨이 높은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블랙 씨와 화이트 씨의 연계기에 상처 하나 없으신 건 놀라웠습니다.”
뭐 그거야, 스킬의 힘을 빌린 거니까.
“레벨이 높지 않다는 건, 역시 정보상이기 때문에?”
“하하, 바로 맞추셨습니다.”
“흐음.”
나는 젠틀하게 웃으며 계속해서 안내를 하는 빼빼로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리에 우뚝 멈춰선 그가 나를 향해 푸른색으로 빛나는 데이터 조각을 쓱 집어던졌다.
“이건, 서비스입니다.”
“…?”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데이터 조각을 움켜쥐어 받아들였다. 그러자 한순간 크게 빛난 데이터 조각이 나뭇가지처럼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
연계 퀘스트
==============================
제목 : 하수도의 괴물 1/5
난이도 : ★★★★★☆☆☆☆☆
내용 : 마을 사람들을 만나 의뢰를 들어보세요.
제한 시간 : 00:30:00
보상 : 경험치 30,000
==============================
그리고 그 나뭇가지는 점선으로 바뀌어 마치 길 안내라도 하려는 듯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이건?”
“타나토스님의 레벨을 모르니, 일단 적당히 70 정도면 해결하실 수 있는 퀘스트로 준비했습니다만 어떠신지?”
“나쁘지 않군.”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슬쩍 빼빼로를 바라보았다. 가만히 사람 좋은 미소를 지은 채 서있는 녀석의 눈동자가 희미한 푸른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눈은?”
“제 스킬입니다. ‘경로 탐색’ 뭐 보시는 바와 같죠.”
“이유가 뭐지?”
“네?”
“왜 나에게 이런 호의를 베푸는 건가 해서.”
“당신께 흥미가 생겼다고 하면 안 될까요?”
“…?”
“딱히 싫지는 않거든요. 막무가내에 무모한 사람이.”
욕이야 칭찬이야.
“생각이 깊은 사람은 그만큼 오래 머무르기 마련이니까요. 전 제가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그러지 않은 타나토스님께 흥미를 느낀 것…. 일까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
“하하, 어쨌든 나중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가볍게 목례를 한 빼빼로는 이내, 경로와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모습을 감췄다. 한동안 멍하니 서서 앞머리를 매만지던 나는 이내 지도에 떠오른 마커를 확인했다.
그다지 멀지는 않았다.
“10분 정도면 충분히 가겠는데요?”
“재킷의 힘을 이용한다면 말이지.”
물론 그건 이쪽의 기준이었기에, 실제로 지도에 표시된 숫자는 5km정도였다. 가만히 그걸 바라보던 나는 바닥을 박차며 달리기 시작했다.
몇 번이고 생각하는 것이지만 이미 뇌는 스스로 이루어낸 진화처럼 신체의 변화를 무리 없이 받아들였다. 둥그런 벽을 박차고 올라 골목을 꺾어, 나는 질주했다.
◇
========== 작품 후기 ==========
초반파트를 수정 중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