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편
<-- Chapter 2 : 호수의 기사 -->
“까먹었어.”
“뭐?”
“그런 건 관심이 없어서.”
“…. 아니 잠깐, 너 돈으로 움직인다며?”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
까먹고 있던 스스로의 ‘설정’에 나는 약간 당황한 기색을 숨기며 대답했다. 여전히 미심쩍은 눈이던 린슬렛은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천만 원이야. 하나당. 그걸 현금화 시켜서 어떤 식으로든 원하는 장소에서 전해주지. 그게 에픽 퀘스트 후반부에는 10개씩 줘. 그렇다면 그 금액은?”
“….”
“수학 못하니?”
“1억이잖아.”
“그래 1억. 그걸…. 우리는 인원수대로 분배를 해. 난 마음에 들지 않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래, 난 딱히 좋아하지 않거든. 돈 때문에 게임 하는 거.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해. 실제로 다치고 깨지는데. 그래서 뭐, 적당히 마음을 숨기고 있지.”
“….”
나는 거의 죽일 것처럼 짜증을 내던 녀석이.
“그래도 뭐, 너는 어느 쪽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방금 전의 말로는 순수해서 보기 좋네.”
선선하게 대답하는 린슬렛의 모습에 나는 슬쩍 짜증이 나는 걸 느꼈다. 잠깐 악동처럼 웃던 녀석은 이내 대견하다는 듯 훌쩍 뒤꿈치를 들어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지만 나는 가볍게 쳐냈다.
“너 무뚝뚝하다는 소리 많이 듣지? 현실에서.”
“대답할 의무라도?”
“붙임성 없는 녀석이네.”
가볍게 쏘아붙인 녀석이 이내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평범하지만 나에게는 무척이나 작게 느껴지는 키, 목 부분에 털이 달린 가죽 재킷에 푸른색 스키니진..
난 녀석을 따라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몇 번이고 골목을 꺾어 나아가며, 녀석은 많이 다녀본 길인 듯 막힘없이 걸어 나갔다.
오수의 흐름을 따라, 그렇게 걷던 나는 어두운 길목 너머에서 폭포 소리를 들었다. 그곳까지 걷자 각지의 하수가 모이는 처리장이 드러났다.
그곳에,
배가 떠있었다.
“….”
솔직히 놀랐다.
하수처리장은 보통 지역 내의 하수를 이런 식으로 모아서 한 번 저장해두는 장소였기 때문에 크고 넓어 더럽게 오염된 호수와도 같았다. 그리고 그 위에 한 척의 배가 떠있는 광경은 무척이나 이상했다.
역사책에서나 봤던 갤리선(船) 같은 느낌의 배는, 노를 저어 비교적 고요한 호수의 이곳저곳을 음산하게 맴돌고 있었다.
“저곳까지 뛰는 건가?”
“그 전에 접근 허가를 받아야지…. 안 그랬다가는 들어가자마자 튕겨져서 저 더러운 물에 빠질걸?”
그건 질색이다.
“헤에, 평범한 사람 같은 부분도 있네.”
“…. 그럼 아니겠냐.”
적당히 대답하며 나는 패널을 조작하는 린슬렛의 뒤에서 묵묵히 서있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넬이 흥미로운 눈으로 호수를 떠도는 배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와아, 이런 건 처음 봐요! 호수 위에 거처를 세우다니! 유저님들의 상상력이란 정말 대단하네요!”
“…? 드문 건가.”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녀석은 밝게 웃으며 돌아보았다. 무슨 세상에 처음 나와 본 여자애처럼.
“네넬! 와아….”
“하지만 분명 그 합금으로 이루어진 거겠지?”
내가 묻자 넬은 배에 시선이 빼앗긴 상태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지간히도 대단한 놈들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혀를 내둘렀다.
“뭘 그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려?”
그리고 린슬렛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나는 녀석의 시선을 피하며 벽에서 등을 뗐다.
“아무것도.”
“허가가 떨어졌어. 들어가자.”
그리고 녀석은 대답도 기다리지 않은 채 앞으로 도약했다. 커다란 호수를 단숨에 뛰어넘어 배 위에 무사히 착지하는 녀석을 보며 나 역시 큰 파이프처럼 된 처리장의 끝에 서서 재킷의 힘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단숨에 점프.
- 쥬브나일 포르노를 발견했습니다.
- 경험치가 5,000 상승했습니다.
- 레벨이 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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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S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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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 타나토스
Lv : 35
Knightage : -
JACKET : Necromancer
Exp : 800/2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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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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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배 가능 스탯 : 10
공격력 : 80
방어력 : 50
민첩성 : 110
정신력 : 60
연산 속도 :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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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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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불신 : F
망령 신체 : F
의식 조종 : 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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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테이터스를 확인하고는 창을 닫았다.
“야호오오~!”
넬이 환호성을 내지르며 허공을 단숨에 날아간 나는 막힘없이 배 위에 착지하는 것에 성공했다. 충격이 잦아들며 먼저 도착해 서있던 린슬렛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가볍게 한 바퀴 둘러보았지만 갑판에는 아무도 없었다. 마찬가지로 익숙한 듯 몸을 돌린 린슬렛이 근처에 있던 다락문을 열고서는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나 역시 넬과 함께 그 뒤를 따랐다.
“….”
그리고 안에서는,
재즈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호오, 호오, 꽤 좋은 분위긴데요?”
넬의 그런 말에 나 역시 귀에 감기는 듯한 피아노 소리에 슬쩍 심장의 동요를 느꼈다. 괜찮은 음악이다 싶은…. 정도가 아니라 일류의 솜씨라는 생각이 들었다.
“….”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린슬렛은 뚜벅뚜벅 걸어 그 안을 거닐었다. 몽환적인 조명, 에스콰이어나 NPC들이 담배와 술을 즐기며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보여, 나는 어쩐지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분위기일 줄은 몰랐군.”
살짝 당황해 입을 열자 린슬렛은 내 쪽을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내가 약간 당황한 채 서있자니 린슬렛은 음악이 흘러나오는 진원지라고 할 수 있는 커다란 피아노 쪽으로 향했다. 스스로 움직이는 피아노 건반,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있자니 녀석은 순식간에 방패를 소환해 피아노를 내리쳤다
“뭣?!”
끼익, 하며 음악이 멎었다. 박살난 피아노가 데이터 조각으로 변해 사라지는 광경을 보며 나는 어이가 없어 소리쳤다. 음악이 순식간에 멎자 술집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무척이나 화가 난 것이 느껴졌다.
“나와. 발렌타인.”
“린슬렛…. 너 매번 이런 식으로 해야겠니?”
그리고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린슬렛의 부름에 응하듯 등장한 것은 가슴이 푹 파인데다가 허리까지 옆구리가 트인 드레스를 입은 여자였다. 끈으로 된 팬티 라인이 드러날 정도라 나는 시선을 피했고, 힐이 또각 울리며 나를 사이에 둔 채 두 사람이 대치해 섰다.
염색이 아니라면 나올 수 없는 분홍색의 머리를 기른 여자, 발렌타인은 어깨에는 쇼걸이나 쓸 법한 장식을 두른 채였다. 거기에 손에는 긴 장죽 같은 것이.
비비안과 같은 방식인 걸까. 코 위쪽으로는 표정이나 그런 게 전혀 보이질 않았다.
“음악 장사는 그만하시고, 협상을 하러 왔는데.”
린슬렛은 날카롭게 대답하며 카운터 쪽에 쌓여져 있는 다수의 음악 CD를 손으로 가리켰다. 요즘 같은 시대에 CD를 판매하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그러면 신분이 드러나지 않나.
“나 거기 멤버 아니거든.”
“네가 피아노잖아. 블랙이 색소폰에 화이트가 드럼, 베이스가 빼빼로면서.”
“…?”
뭐 닉네임들이 다 그딴 식이야.
“얼굴이 없는 재즈 아티스트인 발렌타인을 동경해서 게임 상에서 똑같이 쓰고 있는 것뿐인데. 너야말로 린슬렛이 뭐니?”
“내, 내 닉네임이 뭐 어때서.”
“의도가 뻔히 보이는데에에에.”
발렌타인이 중얼거리고 다음 순간, 훅 하는 소리와 함께 눈앞으로 방패가 날아갔다.
젠장, 협상(박)을 하러 온 거라면서!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지만 발렌타인은 쇠로 된 장죽을 들어 방패를 가볍게 튕겨냈다. 방패가 주인의 손으로 돌아가는 걸 보며 나는 상황이 급격하게 돌아가는 걸 느꼈다.
“네고시에이션을 하러 온 거 아니었어?”
담배를 물고 한 모금 빨아들인 발렌타인이 웃으며 말을 꺼냈다. 그러자 린슬렛은 방패를 가볍게 들어 데이터 조각으로 되돌리며 입을 열었다.
“맞아.”
“그렇다면 이야기는 빨리 진행하는 것이?”
“그러자고.”
…. 뭐야. 이 녀석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앞머리를 매만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깨에 누군가 매달리는 것을 느꼈다. 발렌타인이 다가와 팔짱을 낀 것이었다. 부드러운 감촉에 놀라 저도 모르게 뿌리치려던 나는, 무슨 바윗돌처럼 무겁게 팔이 붙잡혀 꼼짝도 할 수 없는 것을 느꼈다.
“이 분은?”
“안타깝게도 내 ‘파트너’야.”
“어머나, 저희 CD 사주지 않을래요?”
“…? 방금 저희라고?”
“아, 아니 그…. 쥬브나일 포르노의 CD를.”
“재즈면서…?”
“어떤 멋진 남자의 말에 의하면, 애송이들을 위한 포르노기 때문이죠. 재즈란.”
대체 어디서부터 뭐라고 해야 하는 거지.
나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며 팔에서 떨어지는 발렌타인의 모습에 어이가 없어지는 걸 느꼈다. 용병 집단의 이름이기도 하거니와 밴드의 이름이기도 하단 말인가.
바로 그 순간, 나는 코를 얻어맞았다.
“윽?!”
“기분 좋았나봐? 쟤는 가슴 커서.”
내 앞을 지나며 볼멘소리로 중얼거린 린슬렛이 코를 튕겼던 중지를 치켜든 채 그대로 발렌타인을 따라갔다. 찔끔 눈물을 흘린 나는 억울함을 느꼈지만, 레벨이 낮은 사실을 들킬까봐 변명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 어쨌든…. 가져와봐.”
가게 중간의 테이블. 거기에 걸터앉은 린슬렛이 그렇게 말했다. 반대편의 발렌타인이 가볍게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고, 나는 가게 안쪽의 주방에서 덩치 큰 사내가 뭘 굴려서 가져오는 걸 발견했다.
“…?”
술통이었다.
“인사해. 자기. 이쪽은 우리 멤버인 빼빼로.”
“안녕하십니까. 빼빼로입니다.”
술통을 린슬렛의 옆에 세운 남자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했다. 베스트와 멜빵을 찬, 큰 체구였지만 젠틀한 말투였다.
“방금 멤버라고 했지?”
“용병단 멤버라는 뜻으로 한 말이거든?”
아니 여태 인정하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인데.
나는 다시금 으르렁거리는 린슬렛과 발렌타인을 보며 어이가 없어지는 걸 느꼈다. 하지만 그 뒤로 조그마한 소녀 두 명이 똑같은 술통을 하나 더 들고 나왔다. 그걸 이번에는 발렌타인의 옆에 세웠다.
“잠깐, 협상한다며?”
“응, 협상이야.”
도무지 참을 수 없어져 물어보자 린슬렛이 팔을 붕붕 돌리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서로를 가볍게 노려본 두 사람이 술통을 열고 큰 잔에 맥주를 담아냈다.
“그럼 저 뒤의 사람이?”
“응. 말했다시피 내 파트너.”
“자, 잠깐? 무슨 상황인데?”
“그냥 경쟁 퀘스트야.”
그리고 눈앞에 팝업창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