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편
<-- Chapter 2 : 호수의 기사 -->
유하의 단호한 말에 넬이 꼬리를 추욱 내리며 수긍하는 태도를 보였다. 뒤이어 유하는 이내 단호하지만 약간 부드러운 표정으로 내 쪽을 돌아보았다.
“준, 믿고 있어요.”
“….”
뭐, 뭘 말인가요.
“넬에게 이상한 짓을 시키지 않을 거라고.”
“구체적으로 어떤 거요?”
“(삐이-)라던가. 아니면 (삐이이이-)라던가…. 아, 아니! 이건 단순히 예시일 뿐이고요!”
넬의 물음에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던 유하가 얼굴을 붉히며 반박했다. 디멘션 커넥터의 필터링 기능이 작동할 정도로 심각한 말이 거기에서 새어나온 것 같았다.
“어, 어쨌든 그도 그럴 것이….”
잠깐 상황을 환기시키려는 듯 헛기침을 한 유하는,
“넬도 이제 우리의 가족이잖아요?”
부드럽게 웃으며 그런 이야기를 했다.
“유, 유하니임….”
감동한 넬이 유하에게 풀쩍 안겨 유하 역시 그것을 웃으며 받아들였다. 그걸 가만히 바라보며 서있던 나는 이내 머쓱해져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역시나 좋은 사람이다.
….
참으로 어려운 대답이었지만, 유하는 넬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물론 그 가족이라는 말에 동의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넬을 ‘그런 식으로 대하는’ 유하의 방식이 마음에 드는 것을 느꼈다.
희미하게 나와 같다는 생각을 했다.
역시 여기에 있는 그녀는 현실이었다.
“자, 어쨌든 어서 저녁을 먹도록 하죠. 혹시 모르니 준은 카운터를 봐줄래요?”
유하의 시원시원한 대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로 돌아섰다. 그리고 넬 역시 나를 따라 나오려던 순간, 뒤쪽에서 다시금 유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후, 넬은 제 말상대 좀 해줄래요?”
“아, 그럴까요?!”
하고 명랑하게 대답한 넬이 허락을 구하듯 나를 돌아보았다. 뭐 어떠랴 싶어 고개를 끄덕인 나는 터벅터벅 걸어 카운터 뒤쪽의 의자에 앉았다.
물론 당연히 손님이 올 리는 없었으므로, 나는 주방 쪽에서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넬과 유하를 바라보다 프로그램을 하나 실행시켰다.
물론 아서리안.
재킷의 기동하겠냐는 질문을 거절하자 눈앞에 아서리안의 로고가 표시되었고 눈앞에 증강된 현실이 표시되기 시작했다. 촤르륵 떠오른 양피지 중 하나를 펼치기 전 손에 꾹 쥔 나는, 간단한 팝업창으로 표시되는 커뮤니티 사이트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일단은 디멘션 커넥터라는 검색어로 검색. 약어인 ‘디커’나 ‘멘션이’, 혹시 모르니 ‘차원이’까지.
그리고 그 뒤에 해제.
아니면 강제.
아니면 종료.
이 네 가지의 검색어를 조합해 나오는 자료는,
딱히 없었다.
“흐음….”
나는 인상을 찌푸린 채 헛소리들로 가득한 글들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하나하나 읽어보기 시작했다. 강제로 뭘 한다는 더러운 잡담이나, 재킷을 해제할 때 뭐 어쩌고저쩌고 하는, 쓸데없는 글들뿐이었다.
분명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
자, 다시 생각해보자.
디멘션 커넥터는, 기본적으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필수품이다. 그것은 일상에 밀접한 개인용 컴퓨터로서 인간들의 삶에 무척이나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의 디멘션 커넥터를 강제로 종료시키는 일은 엄격하게 금지되어있다. 하지만 나는 방금 전까지 법률 따윈 엿이나 먹으라는 게임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아서리안 내에서도 금기인 모양이군.
….
그렇다면 어떻게 된 거지.
나는 앞머리를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녀석들은 외부에서 불법 프로그램을 가져와 사용하고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왜 그럴 필요가 있지?
그리고 거기에 대해 검색해도 아무런 결과도 없고…. 라쿠스 기사단의 내부에서 아직 뭔가를 계획 중인 걸까. 나는 앞머리를 매만지며 한동안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준, 주운.”
어깨가 흔들리는 감각과 달콤한 목소리, 슬쩍 눈을 뜬 나는 부드럽게 웃고 있는 유하와 눈이 마주쳤다. 긴 머리가 어깨선을 따라 흘러내리는 모습에 나는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안.”
“괜찮아요. 많이 피곤했나 봐요?”
“….”
뭘 하느라 피곤한 건지는 대답할 수가 없었으므로, 나는 침묵을 지킨 채 저녁 식사가 담긴 쟁반을 들었다. 뭘 그리도 담았는지 묵직했다.
“주, 준! 그냥 올라가요. 제가….”
“됐어.”
무뚝뚝하게 대답하자 유하는 이내 침묵했다. 슬쩍 뒤를 돌아본 나는 그녀의 얼굴이 붉어져 있는 걸 발견했다.
이런 부분은 좀 맡겨줬으면 하는데.
◇
그리고 다음 날,
“이쪽이야.”
나는 린슬렛의 안내를 받아 좁은 하수구 내부로 훌쩍 뛰어내렸다. 좁은 길을 사이에 둔 오염수가 흐르는 하수구 바닥에 착지해, 좁은 길목의 옆으로 비켜서자 린슬렛 역시 안으로 타고 내려왔다.
긴 금발을 정리하며 몸을 일으켜 세운 그녀가 눈앞에 떠오른 패널을 조작했고, 그러자 녀석이 쓰고 있던 가면에 한 차례 전류가 흐르는 이펙트가 생겨났다.
“필터를 켜두는 게 좋을 거야.”
“그게 뭔데?”
“? 너 설마 없어? 필터 아이템.”
“없는데.”
그렇게 대답하자 살짝 의구심이 어린 눈초리. 나는 묵묵히 그것과, 시궁창의 불쾌한 냄새를 견뎌내며 린슬렛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데이터 덩어리가 날아들었다. 그걸 휙 던진 린슬렛은 이쪽을 힐끗 노려보고는 반대편으로 돌아 걷기 시작했다. 나는 데이터를 움켜쥐어 받아들였고 눈앞에 팝업창이 떠올랐다.
- 일반 아이템 : 정화 필터가 추가되었습니다.
설명을 읽어보니 실제로 맡을 수 있는 냄새를 정화하는 기능에 더불어, 게임 상에서의 독 공격을 막아내는 아이템인 것 같았다.
장착.
얼굴에 쓰고 있던 마스크의 내부 형태가 뒤바뀌며, 다음 순간 나는 시궁창의 불쾌한 냄새가 싹 사라지는 걸 느꼈다. 숨을 쉬는데도 별다른 무리는 없었다.
대단한걸.
잠시 숨을 크게 들이마시거나 하며 성능을 시험해보던 나는 이내 앞장서 걷던 린슬렛이 힐끔 뒤를 돌아보는 걸 느꼈다. 녀석은 약간 미심쩍은 눈초리였다.
“너 정말 몰랐던 거야?”
고개를 끄덕끄덕.
“이거 굉장히 초반에 구할 수 있는 아이템이거든? 너 레벨이 대체…. 아니, 됐다.”
애초에 대답할 마음도 없었다.
“네 역할이나 잘 해내라고.”
“어디 가는 건데?”
“협상.”
그렇게 말한 린슬렛은 이내 자리에 멈춰서 눈앞에 떠오른 패널을 여기저기 조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도를 띄우는가 싶더니 내게 슥 던져서 보여주었다.
미로처럼 얽힌, 좁은 길.
마커가 찍힌 장소에 ‘Juvenile Porno’라는 글자가 적혀져 빛나는 것이 보였다. 약간 멍해져 있던 나는 이내 고개를 갸웃거리며 린슬렛을 돌아보았다.
“쥬브나일 포르노…?”
“정보상이야. 이 근방의 에스콰이어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는 녀석들이지. 기본적으로는 정보를 사고파는 놈들이지만, 술과 담배, 거기에….”
혹시 재즈 좋아해?
라는 물음에 나는 침묵을 지켰고 피식 웃은 린슬렛은 다시금 지도를 훌쩍 가져가버렸다.
“그런 놈들하고 무슨 협상을?”
“에픽 퀘스트. 정보상인 만큼 녀석들이 먼저 알아챌 텐데, 딴 놈들에게 공개하지 말라는 거지.”
“…?”
“뒤를 박으로 바꿔도 돼.”
이른 바 협박이라는 건가.
“굳이 그래야 할 필요가…?”
“너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외국에서만 플레이해봤으니.”
“아 하긴, 에픽 퀘스트는 아직 테스트 단계라 한국에서 플레이 중인 유저 한정으로만 제공된다고 했던가?”
“…. 그래?”
“사실 나도 잘 몰라. 그런데 지금까지의 에픽 퀘스트는 국내에서만 진행 되서 그런가 싶은 거지.”
하고 나를 돌아본 린슬렛이 마스크를 툭툭 때렸다. 슬쩍 인상을 찌푸린 내가 빤히 바라보자 녀석은 그 ‘쥬브나일 포르노’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게임이 무척이나 불친절하다는 건 너도 알지?”
나는 무척이나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 게임은 게임이라기보다 무척이나 현실에 가까울 때가 있어서…. 그것이 사람을 불쾌하게 만들 정도였으니까.
“그래서, 정보를 많이 가진 녀석들일수록 유리해. 기본적으로는 스킬이나 재킷의 활용 같은 것부터 시작해서…. 조사 스킬이나 색적 스킬 같은 걸 가지고 있는 녀석들은 전투 능력이 약하더라도 높게 쳐주지. 그리고 보통 그런 녀석들은 따로 무리를 이루어 정보상이 되는 거고.”
하지만 쥬브나일 포르노라는 이 정보상은, 비교적 적은 대가로 여기저기에 거리낌 없이 정보를 제공한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게 라쿠스 기사단의 눈에 보기에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어중이떠중이들이 다 모여드니까.”
“….”
“그래서 우리 라쿠스 기사단에서는, 중요한 에픽 퀘스트가 뜰 것 같은 시기가 오면 그 전에 이런 식으로 사절을 보내서 우리에게만 정보를 달라고 협상을 하고 있어. 규모가 커지면 더욱이 할 킬러즈의 주목을 살 테니까.”
그렇게 해서, 어쨌든 에픽 퀘스트의 규모가 커지는 후반부까지 최대한 조용히 진행한다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가웨인을 비교적 쉽게 기사 서임을 받았다고.
“돈은 정확히 얼마 정도 버는데? 에픽 퀘스트를 하면.”
“…. 너, 정말로 외국에서 게임 오래해본 거 맞아?”
“맞아.”
“주인님 거짓말 하면 얼굴에 다 드러나세요.”
지금은 얼굴이 가려져 있잖아.
넬의 지적에 그렇게 생각한 나는 힐끔 시선을 보내고는 다시 린슬렛을 바라보았다. 가면을 쓴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던 녀석이 이내 말을 이었다.
“기사의 명예로 구할 수 있는 돈이 얼만 줄은 알지?”
========== 작품 후기 ==========
좀 더 열심히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