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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크로맨서 재킷-22화 (22/321)

22편

<-- Chapter 2 : 호수의 기사 -->

넬의 제안에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지하철역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전투 지역 바깥으로 벗어나자 곧장 아서리안을 종료시키고 탄피처럼 튕겨져 나오는 마스크를 붙잡아 품속에 넣었다.

다시금 현실로 돌아와, 나는 가상 세계에 무척이나 몰입해있던 여자의 말을 기억해내고는 피식 웃었다. 그 말에 훌쩍 내 뒤쪽을 날던 넬이 입을 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주인님.”

나는 슬쩍 시선을 주었다. 넬은 씨익 웃으며 호주머니를 뒤적뒤적 하는 시늉을 하더니 뭔가를 꺼냈다.

“….”

아침에 유하가 사인을 하게 만들었던 종이였다.

“이건 어떻게 하실래요?”

“안 가.”

“에엑? 정말요?”

단호하게 이야기하자 넬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더니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서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입을 열었다.

“그, 그 유하님이 무척 화내실 거라고요?”

“…. 어쩔 수 없어. 적당히 얘기해두자.”

나는 가슴이 당기는 걸 느끼며 무뚝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계속 고민을 해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대학에 가봤자 유학 시절과 같은 결과가 나오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오히려, 아서리안의 유저가 된다는 첫 번째 목표를 이룬 만큼 더 심해지겠지.

“저, 저는 거짓말을 해야 하는 건가요….”

“부탁해.”

“후후, 주인님 너무 좋아요♡”

“?”

“아 거짓말이었는데 통했나요?”

“….”

기가 차서 나는 말을 관두고 지하철 역사로 들어섰다. 디멘션 커넥터가 자동으로 열차의 도착 시간을 가르쳐주었기에, 나는 슬쩍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거짓말 또 해볼게요! 저는 사실 주인님하고 야한 게 해보고 싶어요오~♡”

진짜 사람이 적당히 미쳐야지.

나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반응을 해줘봤자 더 날뛸 뿐이라는 생각에 무시하고 개찰구를 통과했다. 시야 위쪽에 떠오르는 통장 잔고를 확인하고는 계속 걸었다.

“설마 등록금 문제 때문에 그러세요?! 그거라면 아서리안에서 해결을 할 수가….”

“아니거든.”

애초에 대학 등록금이 무료가 된지 몇 년이 지났는데.

음, 잠깐.

“돈?”

“네넬! 흥미가 좀 생기시나요오?”

“설명해봐.”

그리고 이어진 설명을 정리하자면 대략 이러했다.

난이도가 높은 퀘스트에서 얻을 수 있는 특수 화폐인 ‘기사의 명예’로는, 현금부터 시작해 선을 넘어서지 않는 선에서 엘레노어에게 소원을 빌 수 있다고 한다. 시험의 당락을 바꿔달라든지, 아니면 기록 삭제 같은 네트워크의 영역에서 해낼 수 있는 것들을.

“그래서 그걸 위해서 플레이하시는 분들도 많아요.”

“플레이어수가 대략 1만 명이라고 했던가?”

“네넬, 국내에 한정된 숫자지만요!”

“전 세계 추산은?”

“정확히 10만 명입니다!”

“…?”

플랫폼 앞에 선 내가 의아하게 돌아보자 넬은 설명을 덧붙였다. 에스콰이어의 숫자는 전 세계적으로 변동이 없이 고정이 된다고,

그 말인즉슨…. 누군가 한 사람 게임에서 탈락하면, 새로운 게이머가 탄생하는 시스템이라는 거군.

갤러해드 역시, 게임에서 탈락한 이후에 새로운 에스콰이어가 탄생했다는 걸까. 그리고 고그와 모그도.

그 두 사람에 대해서 떠올린 나는 가볍게 앞머리를 매만지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 기사의 명예로 벌 수 있다는 돈은 어떻게?”

“저어언부, 현금으로 드리지요.”

“아니 그러니까 그 돈이 어디서 나는 건데.”

나는 머지않아 도착한 지하철에 올라타며 되물었다. 사실 ‘현금으로 준다.’는 말 때문에 더욱이 궁금해졌다. 녀석들이 어떤 식으로 돈을 공급할 수 있는 건지.

“정보량 송신 합금을 보시면 아시잖아요?”

“뭐?”

“커다란 흐름을 보셔야죠. 주인님.”

가끔 녀석은 알 수 없는 소리를 할 때가 있다.

“….”

“어쨌든, 기사의 명예는 주로 업적 퀘스트 쪽에 많이 분포가 되어 있으니 한 번 찾아볼까요?”

“그 업적 퀘스트란 건 뭐야?”

그러자 눈앞에 팝업창이 떠올랐다.

좀 더 두껍고, 보석으로 치장이 많이 된 커다란 양피지. 거기에 나는 거기에 적혀진 글자들을 하나하나 천천히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기사 서임 관련〉

- 기사 : 갤러해드로 각성하세요.

- 기사 : 랜슬롯으로 각성하세요.

- 기사 : 퍼시벌로 각성하세요. (달성불가)

- 기사 : 보호드로 각성하세요. (달성불가)

- 기사 : 라이오넬로 각성하세요. (달성불가)

- 기사 : 가웨인으로 각성하세요. (달성불가)

- 기사 : 모드레드로 각성하세요. (달성불가)

- 기사 : 케이로 각성하세요. (달성불가)

- 기사 : 헥터로 각성하세요. (달성불가)

- 기사 : 베디비어로 각성하세요.

- 기사 : 트리스탄으로 각성하세요.

- 기사 : 캐러독으로 각성하세요. (달성불가)

“….”

불가능이라는 표시가 되어있는 기사는 이미 서임이 완료되었다는 말인가. 나는 인상을 찌푸린 채 양피지를 다음 장으로 넘겼다. 넘긴다는 표현은 좀 이상했지만.

그리고 대부분이….

거대한 몬스터를 잡는다거나.

적대 세력(으로 설정 상 치부되는)인 할 킬러즈의 간부급 요원을 쓰러뜨리거나.

아니면 특정 아이템을 모두 수집하거나,

에어리어의 비밀 구역을 탐사하거나.

“….”

“뭐 흥미로운 것이라도?”

“갤러해드겠지. 역시나.”

나는 적당히 중얼거리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쨌든 현재의 내가 달성하기에는 불가능한 일들이었다. 대부분 다량의 정보나 인원이 필요한 시스템들뿐….

젠장, 어서 ‘괜찮은 녀석’들이 나와야 하는데.

머릿속이 복잡해 나는 가볍게 혀를 차며 빈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쨌든 필요한 것은 정보였고, 그걸 위해서는 ‘두 번째 작전’이 원활하게 진행되어야만 했다.

“….”

“헤에, 주인님. 저 애기 좀 보세요. 귀엽네요오.”

바로 그때, 내 옆에 슬며시 앉은 넬이 주의를 끌었다. 뭔가 싶어 고개를 든 나는 텅 빈 차량 내의 반대편 의자에 앉은 한 여성과 아이를 발견했다.

“와아, 엄마! 한강! 한강 지나가요!”

“한솔아. 엄마가 내려오라고 했니. 안했니?”

“우우웅….”

여성은 순간적으로 눈이 동그랗게 떠질 정도로 미인이었다. 나이는 30대 중반 정도 되었을까. 검푸른색의 긴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여인이 이내 내 시선을 눈치 채고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머, 미안해요. 많이 시끄럽죠?”

“….”

딱히 그렇지는 않았는데.

“솔아야. 지하철에서는 조용히 하는 거란다.”

“우음, 왜요?”

“왜일까? 네 생각은 어떠니?”

그리고 두 모녀는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여자는 영화 대본으로 보이는 책을 덮고서는 능숙하게 아이의 흥미를 끌어냈다. 행복해 보이는 모습, 거기에서 나는 어쩐지 옛날의 기억이 떠오르는 걸 느꼈다.

나도 저랬었지.

그러다가 혼쭐이 나고.

….

“저기, 아저씨.”

약간 상념에 잠겨 있던 중, 가까이 다가온 꼬마가 나를 향해 뭔가를 내밀었다. 사탕이었다.

“먹어, 솔아가 줄게.”

“….”

“휴휴, 주인님 역시 잘생기고 볼 일이네요!”

넬은 그렇게 말했지만 아무래도 어머니 쪽에서 권유한 모양이었다. 힐끗 그쪽을 바라보니 속눈썹이 긴 눈동자로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부인.

“고마워.”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얌전히 사탕을 받아 입속에 쑤셔 넣었다. 아이는 다시 어머니의 곁으로 돌아가 디멘션 커넥터를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학생, 이에요?”

“…. 네.”

“후후, 좋을 때네요. 나도 남편을 학생 때 만나서…. 어머머, 미안해요. 아줌마가 또 한 소리하려고 했네.”

“아니, 음. 괜찮습니다.”

나는 당황해서 대답했다.

그로부터 부인은 남편과 만나서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한동안 늘어놓았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적당히 흘려 넘겼지만, 나는 그런 이야기를 더없이 행복하게 이야기하는 부인의 모습만은 어쩐지 눈에 들어오는 걸 느꼈다.

“어쨌든 학생이 참 부러워요. 저도 그 나이 대에는 정말로 하루하루가 새롭고 즐거웠거든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모르던 것을 알게 되는 시기였죠.”

“그렇습니까.”

“뭐어, 저는 10년이 지난 지금도 신혼이지만. 후후.”

부인이 얼굴을 붉힌 채 보란 듯이 왼손 약지의 반지를 내게 보여주었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이내 희미한 미소를 입에 머금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지하철이 역에 도착하자 부인과 아이가 인사를 하고는 내렸다. 문이 닫힌 후에도 한동안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아이를 지켜보던 나는 유하에 대한 상념이 머릿속을 떠도는 걸 느꼈다.

많은 사람을 만남으로서 모르는 것을 알게 된다니.

“후우.”

어쩔 수 없나.

“넬.”

“네넬!”

“학교를 다녀봐야겠어.”

“저, 정말요?! 왜 마음이…?”

“저 분이 그러셨잖아.”

모르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넬을 바라보았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솔직하게 말해 유하도 별다른 또래 친구는 없었고 넬은 말할 것도 없었다. 거기에 솔직히 말하자면 유하에게만큼은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나는 청강생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 작품 후기 ==========

아침에 다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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