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편
<-- Chapter 2 : 호수의 기사 -->
유하의 단호한 목소리에 저항해보려던 넬 역시 꼬리를 슥 내렸다. 고양이 꼬리 같은 게 정말로 눈앞에서 축 내려간 모습을 본 나는 다시금 이쪽을 바라보는 유하와 눈이 마주쳤다.
“그럼, 오늘 당장 등록하세요.”
“어, 어느 학교를?!”
“바로 여기!”
내가 당황해 되묻자 유하는 기다렸다는 듯 데이터 조각을 휙 집어던졌다. 어쩐지 보호자라는 역할에 몰입해 성격이 바뀐 것 같다고 생각하며, 나는 그 조각을 받아 가볍게 튕겼다.
데이터 조각은 짓눌리듯 펴지며 종이처럼 눈앞에서 활짝 펼쳐졌다. 신촌에 있는 한 대학교의 청강생 입학 원서로…. 내 동의만 구하면 시험일자가 나오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즉, 미리 만들어두었다는 말이다.
“유하.”
“자, 빨리 서명하도록 하세요.”
“애초에 이런 마음이었….”
“하. 세. 요.”
시험 시간은 정확히 3일 후.
나는 한숨을 내쉬며 거기에 서명을 했다.
◇
유하는 그렇게 말했지만,
“시험, 보실 거예요?”
“집중이나 해.”
나는 그렇게 이야기하며 빌딩숲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경복궁 근방에 얼마 전 개발이 완료된 숲은 얼핏 고요하게 보였지만,
“…. 네크로맨서 재킷. 기동.”
- 네크로맨서 재킷, 활성화.
- 환영합니다. 의인화된 죽음이자 기사의 절망, 망자들의 희망이시여.
재킷의 힘을 받아들이자, 뒤바뀌었다.
효과음의 일환인지 철커덕하는 소리와 함께 재킷의 형태가 바뀌어 등 뒤쪽으로 솟은 칼라가 조여들었다. 나는 품안에서 슥 빠져나오는 마스크를 써 입에 걸쳤다. 나사가 조여드는 소리와 함께 얼굴 하관이 가려졌다.
디멘션 커넥터가 눈앞에 있는 홀로 렌즈의 풍경을 조작해 그로서 현실을 변화시켰다. 발밑이 쩌적 갈라지며 얼음이 맺혔다. 동시에 나는 슬쩍 스산한 기온을 느꼈다.
- 에어리어 특징 : 추위.
물론 그것은 현실과 구별이 가지 않을 만큼 정교한 ‘증가된’ 현실이었다. 처음에는 어쩐지 오래 보고 있으면 뇌가 이상해질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지금은 익숙해졌다. 하지만 공기 중에 떠돈다는 정보량 송신 합금에 대해서는 여전히 알 수 없는 부분이 많아 타르마냥 폐에 축적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넬.”
“네넬! 지금 하고 있어요.”
내가 가볍게 이름을 부르자 넬은 눈앞에 떠오른 인터페이스를 조작해 주변의 CCTV를 해킹하기 시작했다. 오랜 회의 끝에 우리가 내놓은 최적의 레벨 업 루트였다.
약간 걸릴 것이 분명했으므로 나는 스테이터스창을 불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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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S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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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 타나토스
Lv : 34
Knightage : -
JACKET : Necromancer
Exp : 4,800/2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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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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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력 : 80
방어력 : 50
민첩성 : 110
정신력 : 60
연산 속도 :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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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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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불신 : F
망령 신체 : F
의식 조종 : 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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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간, 각종 실험 끝에 내놓은 최적의 스테이터스 수치였다. 네크로맨서 재킷을 얻으면서 스킬을 시험할만한 시간이 필요했기에, 레벨이 올라도 섣불리 스탯을 찍지 않고 놔두었는데 그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간단하게 말해 내 스테이터스는 두 스킬인 의식 조종과 망령 신체를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찍은 것이었다. 30초 정도 물리적인 공격을 무효화시키는 망령 신체는, 발동 속도 역시 빨라 갑작스러운 타격에도 미리 사용하기에 편했다. 따라서 일단 방어력은 최하로.
다음으로 의식 조종을 사용할 때는 정신력 수치를 필요로 한다. 사용하는 양은 초당 1정도. 그래서 적당히 1분 정도를 조종할 수 있는 60까지.
다음으로 민첩성과 연산 속도 역시 뇌와 신체의 균형을 생각해서 그만큼 잡은 것이었다. 적당히 설명하자면 전투에 돌입했을 때 풀 스로틀로 달리고 있는 오토바이에 탄 기분으로, 어쨌든 레벨이 오르면 연산 속도에 좀 더 투자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고 나머지는 공격력, 깔끔한 수치였다.
“아, 찾았어요.”
바로 그때 넬이 생각보다 빨리 펼쳐진 지상 위에 마커를 표시했다. 그다지 멀지는 않은 장소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빌딩 위로 올라섰다.
“조심하죠.”
“….”
“주인님이♡ 게임에서♡ 탈락하게♡ 되면♡ 저도♡ 엘레노어로♡ 돌아가야♡ 하니까요♡”
과도한 하트 표시는 좀 그만두었으면 좋겠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옆에서 방긋방긋 웃고 있는 넬을 한 번 노려보았다. 하지만 역시 거기에 대해 뭐라고 해도 듣지 않는 녀석이라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
가볍게 아래로 점프.
다가오는 지상을 밀어내듯, 나는 유리로 된 벽을 박차며 앞으로 뛰어올랐다.
“그런데, 넬.”
나는 대로변을 훌쩍 뛰어넘으며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슬쩍 밑을 내려다보니 한낮의 광화문 거리에는 다니는 차와 사람들이 없지는 않았다.
“네넬?”
“이렇게 대로변을 막힘없이 다니는데도…. 지금껏 할 킬러즈가 잡으러 오는 일은 없었어. 왜지?”
“그, 글쎄요?”
모르는 건가.
나는 눈을 깜빡거리는 넬의 모습에 가볍게 볼을 긁적거렸다. 그러고 보니 딱히 검문 장소 등을 다니지만 않으면 할 킬러즈와 마주칠 일은 없었다. 녀석들과 에스콰이어 간에 전투가 벌어지는 것도 기껏해야 에픽 퀘스트가 진행될 때 정도. 그마저도 얼마 전 라이오넬의 선정이 끝난 이후에는 딱히 벌어지지 않았다.
“….”
나는 상념을 지워버리듯 빌딩 사이를 타고 오르며 좀 더 속도를 높였다. 이제는 이 재킷을 사용하는 일에도 완전히 익숙해져 나는 가속된 뇌를 능숙하게 받아들여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현실을 기만하는 일에 능숙해졌다는 기분이었다.
“이쪽이에요.”
“나도 눈에 보이거든.”
어쩐지 아프리카 오지의 여행 가이드 같은 느낌으로 옷을 갈아입은 넬을 향해 나는 가볍게 핀잔을 주었다. 그리고 나는, 녀석이 지정한 마커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옥상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존재감이 느껴지기는 했다.
정보량 송신 합금으로 이루어진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몇 번이고 들려왔다. 나는 들키지 않도록 몸을 숙인 상태에서 천천히 난간 쪽으로 향했다.
“보여?”
“네넬! 싸우고 있네요오. 호오, 호오.”
“…. 유리한 쪽은?”
“채찍을 들고 계시는 분이요.”
“채찍?”
나는 그 말에 슬쩍 고개를 들어 싸움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두 에스콰이어가 전투를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한쪽은 여자, 다른 쪽은 남자.
“하아아앗!”
고함을 내지른 남자가 여자를 향해 두터운 채찍을 휘둘렀다. 하지만 여자는 검을 아래로 향해 휘감기는 채찍을 튕겨내고는 달려들었다.
에스콰이어 간의 전투는, 상대를 쓰러뜨리면 얻는 경험치가 많아 자주 벌어지는 일이었다. 단순한 원한이라던가, 아니면 같은 퀘스트를 진행 중에 방해가 된다는 둥, 이것저것 다양한 이유가 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나에게는 무척이나 좋은 일이었다.
“….”
검에 맞아 튕겨져 날아간 남자가 벽에 처박혔고 여자가 다가가 의식을 확인했다. 하지만 이미 상처투성이가 된 남자는 전투 능력을 상실한 것 같았다. 나는 여자의 몸에 오라 같은 것이 휘감기는 걸 목격했다. 경험치의 상승을 뜻하는 이펙트였다.
“넬.”
“네넬….”
하고 스윽 넬이 남자의 반대편으로 돌아들어갔다. 그 광경을 가만히 보던 나는 이내 건물 아래로 훅 뛰어내렸다. 가벼운 착지음에 여자가 날 돌아보았다.
“?! 너는…?”
흰색의 가벼운 점퍼 차림에 얼굴에는 감기 마스크, 날 돌아본 여자가 가볍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약간 거리를 둔 채 섰다.
“….”
“넌 누구지? 어느 기사단 소속이냐.”
“….”
“대답하지 않는다면 적대하는 걸로 간주하겠어.”
그리고 여자가 나에게 검을 겨누었다. 가벼운 카타나는 여자의 폭주족스러운 인상을 더해주었다. 나는 재킷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있다가 가볍게 손을 들었다.
“의식 조종.”
여자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
그리고 뻗는다.
- 에픽 아이템 : 스파다를 생성합니다.
“?!”
여자가 놀라서 검을 들어 손에서 뻗어나간 스파다를 튕겨냈다. 그리고는 검을 쥔 채 적개심이 어린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 적대 상태의 플레이어를 감지했습니다.
- 전투 상태로 돌입했습니다.
“너, 어디서 뭘 하는 놈인지는 몰라도…!”
“….”
“갑작스러운 공격은 기사도에 어긋나지이!”
너 폭주족이잖아.
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나는 꾸욱 참아내며 여자가 달려드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여자의 검이 내 어깻죽지를 가를 기세로 휘둘러졌다.
“망령 신체.”
까앙! 하는 소리와 함께 여자의 검이 내 어깨 부분에 닿고는 튕겨졌다. 물론 아무런 상해도 없었다.
“뭐, 뭐지?!”
공격이 통하지 않자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나는 여자를 도발하기 위해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으아아아아앗!!”
다시금 검이 휘둘러졌지만 내 몸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충격을 받아낸 수치가 시선 아래쪽에서 떠올라 나는 그걸 내려다보며 망령 신체의 시간제한을 확인했다.
“제기랄, 이렇게 된 이상…! 용이 내가 된다!”
뒤로 물러선 여자의 검이 녹색의 빛으로 번뜩였다. 나는 슬슬 다해가는 시간제한을 보고는 슬쩍 재촉하듯이 그 뒤를 넘겨다보았다.
“타아아아아…. 크헉?!”
공격을 하려던 여자가 뒤쪽에서 이어진 기습에 풀썩 무너져 내렸다. 나는 참았던 숨을 뱉어내며 그 뒤에 쇠파이프를 든 채 서있는 남자를 보았다.
“좀 아슬아슬했어.”
“그래도 다행이네요! 한방이어서!”
“애초에 레벨이 다른 상대랑 싸우진 않을 테니까.”
그래서 불시의 기습을 당하면 맥없이 당한다는 거다.
- 경험치가 10,000 상승하였습니다.
꿈틀대던 여자가 완전히 정신을 놓자 경험치가 들어왔다. 나는 넬에게 신호를 보내 남자를 다시 기절시키고는 두 사람에게서 몸을 돌려 멀리 바닥에 꽂혀 있는 스파다를 주워들었다.
그러니까 이런 방식이었다.
레벨이 높은 녀석들의 싸움에 끼어들어, 한 놈이 쓰러지길 기다렸다가 본체가 어그로를 끄는 사이에 의식 조종으로 기습한다는. 뭐 어쨌든 깨어난 녀석도 적이 두 명이었던 거라고 생각할 테고 얼굴이 팔린다는 것만 제외하면 나쁘지 않은 작전이었다.
그렇게 일주일 간 하루에 많게는 5명, 적게는 2명씩 쓰러뜨려 어느덧 레벨은 34. 거기에 이 일을 병행하면서 진행 중인 ‘다른 작전’도 하나 있기는 했지만.
“그럼 다른 장소로 향해볼까.”
미리 정해두었던 대로, 나는 아서리안을 종료시키고 다시 거리로 나왔다. 독특한 디자인의 마스크였기에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 우려가 있었으나 다행히 인적이 드문 거리였다.
“빠른 이동을 위해 택시를 타죠!”
“그럴 돈이 있겠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