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편
<-- Chapter 1 : ‘에스콰이어’로서의 시작 -->
나는 개찰구를 통과하며 다시금 양피지를 하나 펼쳤다. 그리고는 닉네임으로 보이는 글자들과 함께 쭉 떠오른 순위를 확인했다.
1위 유저가 레벨이 200.
“…. 갈 길이 멀었군.”
“음, 걱정 마세요. 전투 관련 퀘스트는 그만큼 경험치를 더 많이 제공하니까. 따라갈 수 있어요.”
그런 넬의 위로(?)에 나는 고개를 돌려 빤히 그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아니 어쨌든, 이것도 게임이라고 치부한다면 그런 문제가 발생하는데.
그러니까 일종의 형평성이라고 해야 할까.
저 1위 유저는 명확히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나보다 분명히 게임을 오랫동안…. 미루어 짐작해보자면 출시된 당시부터 플레이를 했을 터였다. 그런데 지금 시작한 내가 같은 시간을 투자해서 쉽사리 따라갈 수 있다면 그건 그거대로 우스운 일이겠지.
“헤헤, 게임이지만 게임이 아니라고요?”
“그런가….”
노이로제에 걸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 어쨌든, 현실의 요소가 반영이 되어 있다는 건가?”
“물론이죠. 이 게임은 공정하지 않아요! 인간의 삶처럼! 어쨌든 그건 나중에 차근차근♡”
“기분 나쁜 요소로군.”
나는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어요! 애초에 공정한 경쟁과 보상이라니, 그건 실제 게임에서도 이루어지지 않잖아요?”
“그렇지.”
“그걸 오랜 옛날에는 운빨(삐이-)망겜이라고 불렀다는군요! 운빨(삐이-)망겜!”
“그건 또 어디서….”
아니 그보다 그 삐이- 하는 소리는 뭔데.
“히히, 넬의 두뇌를 무시하지 마시죠!”
나는 어이가 없어 살짝 웃으며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슬쩍 잠기는 해에 그림자가 잦아드는 골목을 걸어, 나는 가게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내, 멀찍이 가게의 앞을 빗자루로 쓸고 있는 유하의 모습에 나는 미소를 지었다.
“아, 준!”
조금 거리가 가까워지자, 내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아챈 유하가 달려와 손을 잡았다. 반짝반짝, 반갑다는 듯이 빛나는 눈에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뭐 언제까지고 어린애 취급을.
“저녁은 먹었어요? 어디 다녀와요?”
“잠깐 주변 좀 둘러보고 왔어.”
“그대로죠?”
미소를 짓는 유하의 모습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가볍게 몸을 돌린 그녀는 여전히 쥔 손을 놓지 않은 채 나를 가게로 인도했다.
긴 치마에 니트, 앞치마.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가장 그대로인 건 그녀인데.
그때 이후로 시간이 멈춘 것처럼.
◇
‘오빠, 오빠아!’
불에 타 무너지고 있는 가게.
그 기둥에 깔린 소녀.
나는 그녀의 이름을 힘껏 불렀지만,
‘준아, 나가야 해! 빨리!’
잡아 이끄는 남자의 억센 손길에 나는 다리가 반쯤 풀린 채 이끌려 바깥으로 나왔다. 가게가 토해내는 것처럼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눈앞이 매웠다. 얼굴이 화끈거려 바닥에 무너진 나는 크게 기침을 하고는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서있는 한 에스콰이어의 모습을 보았다.
구경꾼들의 사이에 서있는, 검을 든 채 얼굴을 투구로 가린 기사. 그가 삐걱거리며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갤러해드.
“빌어먹을….”
나는 식은땀이 범벅인 채 몸을 일으켜 세웠다.
늦은 밤, 차갑게 식은 몸에 끈적거리는 이불 시트. 더러운 기분에 박차를 가하는 그것에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침대 스프링이 삐그덕 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디멘션 커넥터가 눈앞에 시간과 기타 정보들을 표시해주었다. 심장 박동수가 꽤나 상승한 것을 본 나는 이를 악 문 채 방안을 빠져나갔다.
나쁜 꿈을 꾸지 않을 거라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아직은 버거운 모양이었다.
내가 갤러해드와 처음 만난 날의 기억은.
화장실로 옷을 벗고 들어간 나는 곧바로 몸을 씻기 시작했다. 땀과 함께 기분 나쁜 기억을 날려버리기 위해 나는 몇 번이고 차가운 물속에 기대어 그곳에 잠겨버리려고 했다.
아무것도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
“주인님! 왜 벌써 일어나셨어요?”
“….”
바로 그때 넬이 옆에서 슬쩍 모습을 드러냈다.
아서리안을 켜두었던가.
“헤헤, 아서리안을 꺼도 제가 도와드릴 수 있도록 주인님의 디멘션 커넥터 안에 따로 인스톨을 해두었죠!”
“….”
확인해보니 정말이었다. 넬이 브이자를 하면서 씨익 웃고 있는 아이콘, 그 밑에는 NELL이라는 이름이.
“나가.”
“넬?”
“나가라고, 씻고 있잖아.”
“넬….”
나는 정말로 분노를 하면 오히려 침착해지는 기색이 있다. 그걸 느낀 채 중얼거리자 넬은 시무룩해져서는 뒤로 천천히 물러서 벽 건너편으로 사라졌다.
나는 다시금 기억을 지워내는 일에 집중하려 벽에 몸을 기댔다. 툭 튀어나오듯이 걸린 샤워기에서 뿜어져 나온 물에 세수를 하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수증기가 피어올라, 자그마한 창을 통과해 사라져갔다. 나는 그것조차 기억처럼 느껴져 벅벅 지우다 이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디멘션 커넥터가 가리키는 시간은 새벽 2시.
“….”
하지만 창밖의 가로등 아래에는 분명히 유하의 모습이 보였다. 쓰레기로 가득 찬 봉투를 양손에 든 그녀가 낑낑거리며 그것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길게 한숨.
명백히 지쳐 보이는 얼굴.
나는 한동안 멍하니 그걸 바라보다 눈앞에 인터페이스를 띄우고 조작하기 시작했다. 내부에 설치된 계좌로, 얼마 전까지 꾸준히 돈을 넣어주던 계좌로 재입금.
3년 간 모아두었던 ‘유학비’였다.
까먹고 있었군.
“…. 이런 순간에 떠올리다니.”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찬장에 개켜져 있던 수건으로 몸을 닦은 뒤 속옷만 입고 바깥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주섬주섬 벗어둔 옷들을 집어 들어 다시 방안으로 돌아가려고 했….
“준?! 준?!”
는데.
새벽에도 아랑곳 않고 크게 내 이름을 부른 유하가 쿵쿵거리며 계단을 타고 올라왔다. 그리고는 나를 향해 팝업창을 휙 집어던졌다. 물론 전송하는 것이었지만.
거기에는 내가 보낸 금액이.
“….”
“이, 이 큰 돈은 다 뭐예요?!”
“….”
“주, 준! 설마 마약 거래라던가…!”
“그, 그럴 리가 없잖아?”
“상상력이 풍부하시네요. 유하님.”
어느덧 내 뒤에 나타난 넬이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했다. 나는 무슨 아들이 밤마다 뭔 짓을 하고 다니는지 걱정하는 걸 보는 엄마처럼 이쪽을 보고 있는 유하를 향해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냥, 유학비 모아뒀던 거야.”
“?! 이, 이게 전부요?!”
“응, 처음에도 몇 번이나 돌려줬었잖아?”
“하, 하지만 제가 다시 보냈을 텐데 이걸 안 쓰고…?!”
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유하는 몹시도 복잡한 얼굴이 되었다. 애초에 손님도 그다지 많지 않은 교외의 한적한 카페니, 이런 부분에 있어서 고민이 없지는 않았겠지. 돈을 모아둔 것이 정답이라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다지 많지는 않지만….”
“아니에요! 으…. 하지만!”
“난 괜찮으니까. 음 근데.”
“네?”
“좀…. 들어가도 될까? 슬슬 추워져서.”
“?!”
그리고 유하는 문득 깨달은 것처럼 내 몸을 위아래로 천천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검정색 드로우즈 하나 차림인 나를. 그리고 그 훑어보는 부분에 따라 아래서부터 천천히 얼굴이 새빨개지더니 이내 펑 터져버렸다.
“미, 미안해요!”
유하는 그렇게 소리치며 손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이내 손가락 사이가 벌어져 내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기색이 느껴졌다. 당황해 서있던 나는 이내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이 상처….”
뜨겁게 얼어붙은 손길이 느껴졌다. 나는 순간적으로 뇌가 새하얗게 물드는 걸 느껴 굳어지고 말았다.
부드럽게 등에 닿은 얼음은, 불꽃처럼 휘감겨 화상이라도 입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이내, 깊은 흉터에 애처롭게 머무는 유하의 손길을 느꼈다.
“그때의 흉터죠?”
“…. 응.”
세로로 길게 돋아난 등의 흉터는,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나에게 있어 그 악몽의 상징과도 같은 물건이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들키지 않으려 무뚝뚝하게 대답한 나는 이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
유하는 약간 멍한 눈으로 내 등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일을 하느라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붉어진 얼굴, 입술을 핥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침을 삼켰다.
“근육이, 많아졌네요?”
“그, 그래?”
“네…. 잘은, 모르겠지만. 어쩐지….”
“유, 유하!”
“꺄악?!”
참지 못한 나는 등을 휙 돌려 유하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서로의 가슴이 닿으며 나는 유하의 심장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세차게 뛰는 걸 느꼈다.
“주, 준…?!”
아니, 으. 하지만!
“….”
놀라 크게 뜬 눈동자, 그 밑의 눈물점은 새하얀 피부에 대비되어 색기가 느껴졌다. 평소에는 약간 헐렁하게 머리를 묶느라 아무도 보지 못하는 점이었다.
나만 아는 그녀.
나만 아는 유하.
“저…. 저는, 각오해뒀으니까….”
얼굴이 새빨갛게 물든 그녀의 입술 사이로 아련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170이 약간 안 되는 키는, 내가 고개를 숙이면 바로 입술이 닿을 터였다.
이마를 대자, 유하의 머리가 흐트러졌다.
나는….
“미, 미안! 잘 자!”
유하를 남겨둔 채 방으로 들어와 쿵! 문을 닿았다. 그대로 미끄러지듯 바닥에 털썩 주저앉자 빳빳해진 드로워즈의 끝이 눈에 들어왔다. 아까 분명히 살짝 쾌감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유하의 다리에 닿았단 말인가!
“제, 젠장….”
나는 무슨 짓을…!
얼굴이 빨개진 사실을 자각하며 나는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질 못했다.
========== 작품 후기 ==========
전작과는 다르게 주인공의 외모는 배우 정우성 씨를...
기본적인 신체는 포루토칼의 축구선수 호날-도정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