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산산이 부서진 검의 파편이 허공에 흩날렸다.
그 모습을, 동그랗게 뜬 두 눈으로 지켜본다.
믿을 수 없는 그 광경을.
사실 상대가 되기 힘들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상대의 힘을 가늠하는 것 정도는 기본 중의 기본.
설령 눈앞의 상대를 쓰러트린다고 하더라도, 이건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수많은 분신들 중에 하나일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차이가 날 줄은 몰랐다.
기습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다.
무력감.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중요한 순간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느낌.
…이제는 다시 느낄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흠.”
한편, 바알은 그런 조원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이미 흥미가 사라졌다는 듯, 흘깃 시선을 주더라도 그저 방 안에 들어온 벌레 한 마리를 바라보는 정도의 가벼운 느낌일 뿐이다.
그 미세한 관심마저 이내 사라지고.
그의 시선은 곧, 검의 파편이 쏟아져 내린 땅 위로 향했다.
“아르트, 약속의 때가 왔다네.”
나지막하게 울리는 그의 목소리.
잔잔한 목소리였으나, 왜일까, 마치 그 목소리에 주변 일대가 공명하듯 고요한 진동이 울렸다.
그 순간, 검의 파편에선 빛이 뿜어져 나왔고.
빛은 곧 형태를 이루어, 이내 사람의 모습을 취했다.
“오랜만일세, 아르트.”
[…바알.]
“예정보다 늦어서 미안하군. 하지만, 계획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고.”
고대의 황제이자, 한 세계의 위대한 영웅 아르트.
그와 마주한 바알은, 악마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순수한 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 * *
태초의 세계는 단 하나뿐이었다.
엘리시움이라 불리웠던 세상.
모든 것이 풍족했고, 증오와 다툼이라는 것은 그 개념조차 잡히지 않았을 정도로 평화로웠다.
허나, 어느 날 마나라는 것이 발견되었다.
그것은 거대한 힘이었고, 그 힘을 사용할 수 있도록 마법이란 것이 개발되기까진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본래 마나는 대기처럼 온 천지에 널려있던 것.
허나 그것을 인지하고 활용하기 시작한 순간, 마나는 빠른 속도로 소모되었으며, 점차 이를 독차지하고 싶어하는 욕심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동족들 간에 파벌이 만들어졌고.
함께 지내던 이들이 서로를 배척하기 시작했으며.
전쟁으로 인해 분열된 이들처럼 하나였던 세계 또한 갈갈이 찢겨져나가기 시작했다.
가장 처음 갈라선 세계이자 가장 치열하게 전쟁을 벌여왔던 천계와 마계.
이 둘 간의 전쟁이 끝나면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 생각했으나, 이후에도 곳곳에서 수도 없이 많은 전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전쟁 속에서.
천계와 마계의 두 존재가.
문득 어떤 생각을 떠올리게 된다.
마나를 다시 한 세계로 끌어 모은다면.
그리고 한 사람이 모든 마나를 끌어안고서 침묵에 들어간다면.
세계는 다시 하나로 합쳐지고, 다툼도 멎지 않을까, 라고.
한 존재는 당시 천계의 대리인이었던 아르트.
그 나머지는, 당시 마계의 말단 귀족이었던 바알.
둘은 우연한 기회로 서로의 목적을 확인했고, 이를 위한 계획을 도모하기 시작했다.
천계의 대리인이었던 아르트는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으로 천계의 힘을 찬탈하여, 자신과 함께 검에 봉인해 자신의 왕묘에 가둬두었고.
바알은 각 세계로 나아가는 전장의 최전선에 나서며 온 세계의 에너지들을 마계로 끌어 모았다.
“이제 곧 끝이네, 아르트.”
그 결과.
마계에 쌓여있던 수많은 마나들은 바알 한 사람에게 모여들고 있었고, 아르트가 찬탈했던 막대한 천계의 힘 또한 이곳에 개방되었다.
본래 세계의 9할.
아니, 그 이상의 마력이 이곳에 모여 있었다.
그 때문에 마력을 잃은 세계들이 서서히 붕괴되어가고 있었지만, 그 또한 둘이 당초 떠올렸던 계획의 일부.
이제 곧 마나는 한 곳으로 집중되고, 나머지 세계가 모두 붕괴되어 본래 세계였던 엘리시움만 남게 될 터였다.
오랜 기다림의 결실을 맺는 이 순간.
바알의 입가엔 흐뭇한 미소만이 드리워져 있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러나 그 순간.
그 때까지 둘을 지켜보고 있던 조원호가 불쾌감이 담긴 목소리로 넌지시 말을 건넸다.
“나를 잊어선 곤란하지.”
그의 손에 쥐어진 것은 마나로 이루어진 새하얀 순백의 검. 그는 그 검을 바알에게 겨눴다.
“…굳이 명을 재촉하는가?”
“아쉽게도, 포기라는 건 잘 몰라서 말이야.”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절망적일 정도의 무력감.
이런 상황이라면, 차라리 바닥에 주저앉아 멍하니 끝을 맞이하는 쪽이 현명하리라.
허나 조원호는 현명치 못한 인간이었다.
끝까지 발버둥치고, 불가능한 일임을 알아도 기어코 발버둥을 치고야마는, 그런 멍청한 인간.
“죽어야 정신을 차릴 모양이지?”
“아직 죽어본 적이 없어서, 그건 잘 모르겠네.”
다음 순간.
조원호의 몸이 다시 한 번 더 앞으로 달려들었다.
거칠게 앞으로 쇄도하는 검기.
그와 동시에 달려드는 일신의 참격.
“쓸모없는 짓을.”
투우웅!
허나 결과에는 변함이 없었다.
바알은 굳이 막을 필요도 없다는 듯 검기를 맨몸으로 받아냈고, 달려드는 조원호를 충격파만으로 가볍게 내팽개쳐냈다.
“…크흡.”
바알의 몸에는 생채기 하나 없었다.
반면, 구석에 처박힌 조원호의 모습은 단 일격만으로도 형편없는 몰골이 되어 있었다.
허나 그럼에도.
조원호는 다시 한 번 달려들었다.
충격파를 받아내기 위한 장막과 함께.
그 다음에는 수십 개의 칼날과.
그 다음에는 엇박자로 들어서면서.
횟수가 거듭될수록 그의 공격은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는 방향으로 움직였지만. 그와 동시에, 그의 모습 또한 참담한 꼴이 되어가고 있었다.
일곱 차례가 되었을 때에는 이미 장비가 넝마조각이 되다못해 바스러졌을 정도. 허나 그럼에도 바알의 몸엔 아직 생채기 하나 박혀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조원호는 다시 일어선다.
다시 한 발자국 앞으로 내민다.
“리리스도 보는 눈이 없군. 이딴 녀석에게 희망을 품었다니 말이야.”
그 모습에 바알은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내뱉었다.
[…바알. 오랜만에 만나 할 말은 아니다만.]
그 때, 곁에 있던 아르트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나는 그동안 인간들을 지켜보았다네.]
[그것도, 아주 긴 세월 동안 말이야.]
“그야 당연한 이야기 아니겠는가. 나 또한 마찬가지라네.”
다소 뜬금없는 당연한 이야기.
바알의 가벼운 대꾸에 아르트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나의 제국이 멸망하는 순간도, 그 자리에 또다른 왕국이 들어서는 순간도, 그리고 그 왕국이 다시 분열하는 순간도… 우리의 염려대로 전쟁은 끊이질 않았네.]
[하지만, 그 전쟁들은, 그 싸움은 결코 무의미한 것들은 아니었지.]
누군가는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누군가는 후손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선사하기 위해.
누구도 확신할 수 없는 그 가능성을 위해, 설령 넘어지더라도 다시 검을 들고 일어선다. 설령 새롭게 개척한 미래가, 자신이 아니라 후대들의 것일지라도.
비록 전쟁이란 것은 언제나 참담한 것이지만.
그 안에 담겨있는 희망은, 거기에 내재되어있는 의지는 분명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렇기에 조금씩이나마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가.”
[물론 무의미한 다툼도 있었어. 단순한 학살일 때도 있었지. 한 명의 증오로 수천 명이 피를 흘릴 때도 있었고 말이야. 하지만…]
그렇게 먼 길을 돌아갈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결국에는 다시 한 걸음 내딛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인간이다.
그 가능성을.
그 의지를.
[나는, 다시 한 번 믿고 싶어졌다네.]
그 순간.
선명했던 아르트의 윤곽이 다시 흐려지기 시작했다.
“아르트,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건가!”
그와 동시에 터져 나오는 강렬한 광채.
그 광채는 마치 그대로 이 세상을 삼켜버릴 것처럼, 그 자체로 거대한 마나의 덩어리였다.
“어…?”
그 빛의 광채는 그대로 조원호의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걸레조각처럼 짓뭉개졌던 조원호의 몸이 단숨에 회복되기 시작했다.
몸을 감싸는 따뜻한 온기.
이윽고, 그의 몸은 언제 상처를 입었냐는 듯 생채기 하나 없이 회복되어 있었다.
“아르트… 네 놈!”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하니 서있다, 뒤늦게 격분에 찬 고함을 내지르는 바알. 조원호는 신기하다는 듯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다, 한 차례 씨익 미소를 지었다.
* * *
“…아크.”
땅바닥에 고인 피웅덩이 위에 널부러져 있던 리리스.
그녀는 그나마 남아있던 힘으로 유지하고 있는 화면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음을 지었다.
“다행이에요.”
아르트. 스스로 천계에서 내려와 인간들을 이끌었던 고대의 대천사. 그는 천계의 힘을 찬탈하여 인간들에게 나눠주었고, 최후에는 스스로 그 힘을 자신과 함께 왕묘에 봉인시켰다.
지금 그 힘이 고스란히 아크에게로 건네진 것.
새롭게 힘을 얻고 다시 일어선 그의 모습.
지금의 바알과 대등한 수준이라 말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이제는 충분히 승산이 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아크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다만 이대로라면 안 된다.
수많은 세계들을 아우르던 막대한 마력이 한 세계로, 그것도 단 두 명에게로 집중되어 있는 상황이다.
본래는 아르트와 바알이 힘을 안정화시키고 있었기에 그 영향력이 나타나지 않고 있었지만, 그 힘이 서로 맞부딪친다면 그 충격만으로도 수십 개의 세계를 파멸시키기에 충분하다. 그 중심이 되는 이곳은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그래선 안 된다.
본인은 아니라고 하지만, 아크는 이런 부분에서 과감하지 못한 사람이었으니까. 다른 동료가 다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홀로 마왕을 쓰러트렸던 남자다.
아마 전력을 다하지 못하겠지.
한 세계가, 그것도 자신이 살아가던 세계가 무너질 지도 모르는 상황이라면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그러니까…….”
그러니까, 다른 도움이 필요하다.
아크가 마음껏 힘을 다할 수 있도록.
“당신이 도와주세요…….”
자신은 도울 수 없다.
이대로 이곳에서 최후를 기다리는 것이 고작.
그렇다면, 그를 도울 수 있는 다른 이가 필요하다.
리리스는 다른 화면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마치 기도를 올리는 것처럼, 간절한 목소리로.
화면에 있는 것은 금발의 소녀. 미카엘라.
며칠 만에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난 것처럼 그녀에게선 예전과 사뭇 다른 기운이 느껴졌으나, 어딘가를 향해 온 힘을 다해 달려가고 있는 그녀의 얼굴엔 초조해하는 기색이 역력해보였다.
화면을 바라보던 천천히 눈을 감으며 손을 뻗어냈고.
마지막 힘을 짜내어, 두 공간을 잇는 게이트를 열어냈다.
* * *
“아르트! 아직 있는 것 다 알고 있네! 아직 늦지 않았어, 의식을 되찾고 원래대로 돌이킬 수 있어!”
절박한 목소리로 외치는 바알.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불쾌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바알은, 깊은 한숨을 내뱉고선 아드득 이를 갈았다.
“…그래, 결국은 위선자 짓을 하시겠다.”
바알은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며 헛웃음을 내뱉었다.
아직 끝이 난 건 아니었다.
영겁의 세월을 기다린 마지막에 계획이 조금 뒤틀린 상황이었지만, 아직 결과가 뒤집힌 건 아니었으니까.
“아무래도 상황이 바뀐 모양인데.”
“웃기지 마라. 네놈이 아직 살아있는 건, 굳이 네 녀석을 처리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조금 돌아가는 것뿐이다.
여기서 눈앞에 있는 인간의 목을 비틀어내면 그만이니까. 생각을 마친 바알은 조원호에게 서서히 다가서다, 이윽고 거대한 빛의 칼날을 뿜어내어 그에게 휘둘렀다.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거대한 빛의 칼날.
아니, 이걸 칼날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마치 거대한 몽둥이를, 아니 거대한 빌딩을 휘두르는 듯한 느낌이다.
“…큭!”
옆으로 몸을 내빼려던 조원호.
아무리 강한 공격이라도 닿지 않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는 옆으로 내밀던 발을 멈추고 제자리에서 공격을 받아냈다.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이대로 몸이 증발해버렸을 정도로 강대한 마력이었다.
“큭큭, 왜 그러나? 한 번 피해보시게!”
“닥쳐!”
피하는 선택지는 봉인되어 있었다.
저 정도로 강대한 마력이 닿는다면 이 주변 일대는 그대로 초토화 되리라. 조원호는 앞으로 쇄도했다. 시간을 줘서는 안 됐다. 바알에게 다가간 조원호는 그대로 난타전을 시작했다.
“하하하하! 너무 가볍지 않은가!”
어마어마한 속도로 휘둘러지는 난참.
하지만 효과적이라고 하긴 힘들었다.
대부분의 공격을 바알이 쳐냈을 뿐더러, 설령 몸에 닿더라도 기껏해야 생채기가 나는 정도가 고작이었으니까.
조원호의 힘이 부족한 건 아니었다.
단지, 두 힘이 서로 맞부딪혔을 때의 그 여파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을 뿐이다.
자신의 몸 안에 들어와 있는 거대한 힘.
직접 사용하면서도 그 양을 가늠하기가 힘들 정도로 막대한 힘이다. 다음 순간 자신의 몸이 갑자기 터져버린다 하더라도 이상하게 없을 정도.
이 정도 규모의 마력이 서로 제대로 맞부딪친다면, 서울은 물론이거니와 한반도 자체가 날아갈 지도 몰랐다. 그것은 결코 과언이 아니었다.
“결의조차 되어있지 않단 말인가.”
다음 순간, 바알은 갑작스레 공세로 들어서며 하단을 베어냈다. 공중으로 살짝 뛰어오르며 공격을 피하는 조원호. 그는 동시에 바알의 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바로 끝을 내주마.”
“읏?!”
허나 바알은 그 찰나의 순간에 자세를 낮췄다.
그리고, 동시에 틈이 드러난 복부에 강대한 마력이 실린 주먹을 꽂아넣었다.
투우우웅!
거칠게 울려 퍼지는 타격음.
그와 동시에 조원호의 신체가 공중으로 떠오른다.
그리고 그보다도 높이 뛰어올라, 위에서 아래로 방금 전보다도 훨씬 강력한 마력을 실어 빛의 줄기를 쏘아낸다.
“젠장…!”
지금이라도 피할 순 있다.
공중에 발판을 만들어 몸을 쏘아내면 된다.
다만, 그렇게 될 경우 저 강대한 마력이 대지에 그대로 직격하게 된다. 아마 이 주변에 남아있는 생존자는 그대로 전멸하게 되겠지.
막을 수 있을까.
막을 순 있다. 다만 향후의 전투에 지장이 될 정도로 큰 무리가 될 뿐이다. 자신도 알고 있다. 결국 이 전투에서 이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까드드득.
이빨이 갈릴 정도로 굳게 입을 다무는 조원호.
그는 결심을 마친 듯 정면으로 방벽을 펼쳐냈다.
[생사가 갈릴 때까지, 이 심판은 끝나지 않을지니.]
하지만 다음 순간.
둘의 시야는 갑작스레 터져 나온 황금빛으로 휩싸였고, 주변 일대가 통째로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심판의 결계.]
그리고 일대를 메운 황금빛이 사라졌을 때.
조원호와 바알의 모습은 사라지고, 그곳엔 오직 황금빛을 발하는 결계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을 뿐이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