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거, 맷집 한 번 엄청나네.”
벨제부브는 수백에 달하는 궁그닐에 직격 당해 땅바닥에 처박히고 사지를 속박 당했다. 거기에 다른 헌터들의 공격까지도 그대로 받아냈다.
하지만 벨제부브는 곧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전부 뿌리쳐내고,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포효를 내뱉었다.
이미 서너 번은 반복된 일이었다. 조원호는 황당하다 못해 어이가 없는 심정이었다.
하늘에서 내리 꽂히는 빛의 창들은 하나하나가 필살의 위력을 가지고 있는, 말 그대로 필살기들이었다.
루시퍼와의 교전에서 비슷한 걸 직접 상대한 적이 있었기에, 그는 저것들을 전부 받아내는 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벨제부브는 등껍질이 조금 터져나가고, 얕은 상처들을 입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나마도 직격을 당한 부분이 그 정도였고, 막히거나 빗겨 맞은 부분들은 살짝 그슬리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우라아아아아!!”
그 때, 로이드가 벨제부브의 머리통을 향해서 높이 뛰어올랐다. 그의 손에는 한계까지 강화되어 눈이 부실정도로 선명하게 푸른빛을 뿜어내는 망치가 들려 있었다.
로이드의 몸은 하늘로 솟구쳤고, 이윽고 벨제부브의 대가리를 넘어선 위치에서 잠시 동안 머물렀다. 그리고 로이드는 허공을 박차 밑으로 내리꽂히며, 들고 있던 망치를 휘둘렀다.
“흐아아아앗!!”
투콰아아아앙―
“키에에에에에에엑!!”
사람 한 명이 낸 소리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커다란 굉음이 울려 퍼졌고, 벨제부브는 고개를 한껏 치켜세우며 비명을 내질렀다. 처음으로 보이는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런 기색을 내비친 것도 잠시, 짐승의 고개는 다시 빳빳하게 세워지며 정면의 로이드를 응시했고, 그 거대한 아가리를 벌려 급하게 펼친 방벽을 물어뜯었다.
“크으윽!!”
세 겹의 방벽 중에 한 장이 단숨에 찢겨져나가는 것을 보고, 로이드는 쓰게 신음을 삼켰다. 한 때 기사단의 선봉에서 마족 군단의 총공격을 막아내고도 남았던 방벽이었지만, 저 거대한 짐승의 앞에선 종잇장과도 같아보였다.
[신선한 충격인데!! 조금 얕았지만 말이야.]
벨제부브는 방금 전에 먹었던 일격에 대한 감평을 웃음기가 가득 담긴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로이드에게 그 목소리는 마치 비웃음과도 같게 들렸다.
“로이드!!”
로이드는 아직 공중에 머무르고 있었고, 그를 노리고 사방에서 핏빛 구체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핏빛 구체들이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려고할 무렵, 허공에서 나타난 크리스의 팔이 그를 끌어 잡아 당겼고, 다음 순간 그는 그곳에 없었다. 그를 노리고 솟구친 수백의 가시들은 허무하게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이번에도냐!!]
벨제부브는 그제야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를 내뱉었다.
[내놔!!]
마치 자기 장난감을 빼앗긴 어린아이의 칭얼거림과 같은 느낌이었지만, 그 파장은 장난이 아니었다. 그가 뿜어낸 마나의 충격파로 인해 사방의 건물이 무너져 내렸고, 방금 로이드를 빼내갔던 차원의 틈이 노출되었다.
벨제부브는 그 거대한 짐승의 팔을 우악스럽게 차원의 틈으로 집어넣어, 빼앗긴 놀잇감을 다시 빼내려 했다.
“흐아아아압!!”
하지만 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게 됐다.
이태현은 불길한 핏빛의 기운을 잔뜩 몰고서 목표를 향해 뛰어올랐고, 몰려든 핏빛의 기운으로 거대한 혈검(血劍)을 만들어내 그대로 내리찍었다.
“카아앗!!”
벨제부브는 불길한 직감을 느끼고 곧바로 팔을 뽑았지만, 이미 반 이상이 절단되어 힘없이 덜렁거리고 있었다.
[아파, 아파, 아파아아앗!!]
벨제부브의 비명이 머릿속을 통해 직접적으로 전해졌고, 이태현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후방으로 빠져나갔다.
벨제부브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분노를 담아 반대쪽 팔을 휘둘렀지만, 애꿎은 빌딩들만을 깨부쉈다.
자신의 생명력을 쥐어짜내, 최후의 일격을 완성시키는 기술, 혈검.
그 위력은 조원호가 기아스로 강화한 일도양단의 참격을 조금 앞지를 정도였지만, 그만큼 사용자의 막대한 생명력과 에테르를 소비하는 최후의 수단이었다.
사용자는 동귀어진(同歸於盡)을 각오했을 때나 그 기술을 휘둘러야하며, 그렇기에 이태현도 이 기술을 써본 것은 이번이 세 번째에 불과했다.
그만큼 이태현은 급격하게 에테르가 빠져나가며 탈진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사항이었다.
푸콱, 푸콰칵,
이태현은 벨제부브와 거리를 벌리는 와중에도 자신을 덮쳐오는 핏빛 구체들을 베어냈고, 하나하나를 베어낼 때마다 자신의 마나가 급격한 속도로 채워지는 것을 느꼈다.
잘은 몰라도, 다른 것들과 비교했을 때 벨제부브의 핏빛 구체들은 그 회복량과 회복속도가 압도적으로 높고 빨랐다. 마치 자신의 혈관으로 직접적으로 주입되는 것처럼.
그리고 그 핏빛 구체들은 사방에 널려있었다. 이태현에게는 최적의 전장 환경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순식간에 원래대로의 컨디션을 되찾을 수 있었다.
[나와, 당장 나와!!]
그러나 회복된 것은 이태현뿐만이 아니었다.
벨제부브의 재생력은 무지막지한 것이었으며, 뼈까지 잘려나가 덜렁거리던 그의 왼 팔은 순식간에 회복되어 상처조차도 남아있지 않았고 등 뒤에 입었었던 상처 따위는 진즉에 회복되어있었다.
‘…아무래도 엄청난 장기전이 될 것 같은데.’
리리스는 각개격파를 위해 벨제부브에게 총전력을 기울이게 되면, 오히려 우리 측의 전력이 발을 묶이는 꼴이 될 확률이 높다며 전력을 아껴두자고 주장했었다.
그녀의 말을 되새기며 조원호는 그녀가 옳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그렇고 이태현 저 녀석, 아주 물 만났네.’
지금 도시 속을 자유롭게 누비는 이태현의 모습은, 물 만난 고기라는 표현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그는 무너져 내린 빌딩의 폐허 사이사이를 자유롭게 누비며, 끝도 없이 이어진 핏빛 구체들을 모조리 파괴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마력은 더욱 강해졌으며 그 속도 또한 엄청난 기세로 빨라지고 있었다.
[…원호. 이동해야 해요.]
이소연의 전음망을 통해서 들어온 것이 아닌, 직접적으로 전해지는 리리스의 전음.
그것이 뭘 의미하는 지 조원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전음에 응답했다.
[누구야?]
[레비아탄입니다. 제 4석의 분노의 군주에요.]
레비아탄.
그의 손길에 닿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얼어붙는다는 이야기가 맴도는, 만년설원의 지배자.
조원호는 아스트레아에서 어렴풋이 주워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위치는?]
[서울이요. 지금 류환 님을 비롯한 서울 측 담당부대와 세율 씨가 교전을 벌이고 있지만, 급한 상황입니다.]
서울. 하필이면 서울인가.
아니, 오히려 잘됐다.
서울은 자신에게 익숙한 도시이며, 지리적 정보에 대한 우위라는 것은 전투에서 생각보다 많은 이점을 가져다준다.
문제는 지금 저 괴물 같은 놈이다.
과연 자신이 이 자리를 비웠을 때, 남은 사람들로 저 벨제부브를 상대할 수 있을까?
‘…아니, 생각해봤자 바뀌는 건 없지.’
어차피 레비아탄이 나타났다는 것은 이미 벌어진 사실이고, 자신은 레비아탄을 상대하기 위해 자리를 옮겨야만 했다. 시간이 더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마지막 선물 정도는 남기고 가야겠지.
조원호는 처음으로 미스틸테인을 꺼내들고, 마나를 집중시키기 시작했다. 마나가 깃들며 미스틸테인의 문장이 하나둘씩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태현아, 녀석의 등에다가 크게 한 방 먹여줘.]
그리고 그는 이태현에게 전음을 따로 보냈다. 최대의 일격을 가하려면, 사전 준비가 필요했으니까.
때마침 그는 벨제부브의 공격을 피해 뛰어올라, 그 위를 넘어가고 있던 참이었다.
[등에다가? 지금 당장?]
[그래. 상처만 내도 충분하니까.]
준비 시간도 주어지지 않은 무리한 요구였지만, 이태현은 억지로 허리를 비틀어 세우고, 마나를 갈무리하여 검에 집중시켰다.
“하아아아!!”
한 점에 집중되어 파고드는 예리한 참격.
방금 전의 혈검과 비교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얄팍한 참격이었지만, 그래도 작은 상처를 내기에는 충분한 일격이었다.
“나의 검은, 그 무엇이라도 꿰뚫을 것이니.”
그리고 그것을 확인하자마자, 조원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일격에 저 괴물을 죽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기아스를 건다면 그만큼 위력이 강화되겠지만, 그건 지금 상황에서 실패할 게 뻔한 기아스였고, 실패하게 되면 그만큼의 부작용이 돌아온다.
하지만 그래도, 저 괴물을 꿰뚫는 것 정도는 가능하다. 조원호는 그 생각에 확신을 담으며, 한계치까지 미스틸테인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그리고 그 검이 가장 찬란한 불빛을 내뿜는 그 순간, 그는 거대한 짐승의 등 위에 난 작은 상처를 향해 검을 내찔렀다.
있는 힘껏 내질러진 검의 잔상에는 눈이 부실정도의 빛만이 남아있었고,
그 검이 끝에 도달했을 때, 조원호는 검끝을 예리하게 꺾으며 날카로운 예각을 그려냈다.
“파죽지세(破竹之勢)!!!”
날카롭게 파고드는 쐐기꼴의 참격은 거친 파공음을 울리며 대기를 갈랐고,
그 참격은 그 자그마한 상처를 정확하게 꿰뚫어, 그 반대편으로 빠져나왔다.
“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악!!]
짐승의 거대한 몸뚱아리에 비해 그 참격은 자그마한 것에 불과했지만, 그것이 꿰뚫고나간 흔적은 강렬한 것이었다.
표면의 상처는 분명 미세한 것에 불과했지만, 그 참격의 충격파가 내부를 온통 헤집어 놓은 것이다.
벨제부브는 온몸이 뒤틀리는 감각을 느끼며, 진심으로 고통에 찬 비명을 육체와 정신으로 동시에 내뱉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