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거대한 짐승을 관통하는 날카로운 참격.
겉으로 보기엔 단순한 관통상으로 보일 지 모르겠지만, 그 안은 이미 걸레조각처럼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상태였다.
“카아아악, 카아악!”
고통에 찬 짐승의 울음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진다.
전장을 찾아 헤매던, 위대한 싸움을 갈망하던 야수의 모습 따위는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져있는 모습.
[아파, 너무 아파!]
전쟁의 쾌락과 희열은 알았지만, 그에 수반되는 고통은 단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었던 벨제부브다.
[설마… 죽는 거야?]
죽음. 한 생명의 끝.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그 개념에, 벨제부브의 머릿속이 온통 공포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그동안 만나왔던 버러지들처럼.
전장에 널부러진 저 수많은 시체들처럼.
그저 자신에게 희열을 주기 위해 태어났을 뿐인, 저 왜소하고 하찮은 존재들처럼.
자기도 죽는 건가?
거기까지 생각이 이어지는 순간.
벨제부브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비명을 내질렀고.
하늘에서 갑작스레 나타난 메피스토가,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그의 두개골을 단숨에 관통했다.
“…?!”
이미 마무리를 지었다고 생각하고 있던 순간.
그렇기에 모두가 방심하고 있었고, 그렇기에 아무도 반응하지 못했다. 아니, 애초에 상황 자체를 파악할 수 없었다.
“하하. 이건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아무리 당신이라 해도 그렇지, 상또라이 중의 상또라이인 이 녀석을 공포에 떨게 만들다니요.”
그리고 뇌수와 피에 절어있던 메피스토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으깨진 머리통에서 천천히 걸어나왔다.
손에 묻은 피를 살짝 핥아내는 메피스토.
달콤한 향신료의 맛이라도 본 듯, 그의 얼굴에는 행복에 겨운 환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메피스토였던가.”
“그렇죠, 아크. 우리 구면이죠?”
정체를 확인하는 짤막한 대화.
대화는 길게 필요하지 않았다.
조원호는 그대로 칼에 마력을 실어 달려들었고, 메피스토 또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검을 휘둘렀다.
카아아아앙!
큰 소리로 울려 퍼지는 마찰음과, 주변 대기를 강타하는 강렬한 충격파.
“큭,”
하지만 여기서 밀려난 것은 조원호였다.
메피스토는 광기어린 웃음을 내뱉으며 박수를 쳤다.
“하하! 사실은 숨어서 지켜보기만 할 생각이었습니다. 마왕 살해자 아크, 굳이 당신 앞에 설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으니까요.”
“…그거 참,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상황은 달라지죠. 이 정도 힘이 눈앞에 있는데, 먹지 않는다면 그게 더 멍청한 짓 아니겠습니까?”
메피스토의 힘의 원천은, 공포.
더 많은 영혼이 공포에 떨수록, 그리고 그 영혼의 격이 높을수록 그의 힘은 더더욱 강대해진다.
영겁의 세월을 살아온, 그리고 그동안 쉴 새 없이 다른 영혼을 흡수해왔던 벨제부브의 공포는, 그야말로 무한한 힘의 원천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으리라.
그리고 공포가 극한에 달한 순간.
숨통을 끊고, 그 영혼을 고스란히 흡수한다.
지금의 메피스토는 벨제부브의 힘을, 아니, 그 몇 배는 되는 힘을 흡수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처음엔 몸이나 사리기 위해 숨어있던 거지만, 이렇게 되면 이야기가 다르죠. 하하… 이 정도면, 바알 녀석의 숨통을 끊는 것도 문제가 없어.”
“…그 부분에선 이해관계가 맞는 모양인데?”
“바알의 숨통을 끊는 것 말입니까? 그건 또 그렇군요. 흐음… 아크 정도 되는 우군이 생긴다면야, 저 또한 든든할 테지요.”
입가를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이는 메피스토.
하지만 그러면서도 반대 손은 조원호에게로 향했고.
“…!!”
다음 순간, 손끝 하나 움직이기 힘들 정도의 막대한 중압감이 조원호의 신체를 찍어 눌렀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방금 전의 저한테 해당되는 이야깁니다. 지금의 저한텐, 당신이나 바알이나 귀찮은 짚더미 같은 존재일 뿐.”
“원호!”
그 순간, 곁에 있던 이태현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위협조차 되지 않는다.
메피스토는 조원호에게 뻗었던 손을 크게 횡으로 휘둘렀고, 달려들던 이태현은 충격파에 망치처럼 치인 꼴이 되어 구석에 널부러졌다.
“말하자면, 지금의 저에게 당신은 버러지 같은 존재라는 겁니다. 아니, 버러지랑은 조금 다르군요. 개인적인 원한 관계가 조금 있으니 말이죠.”
목을 조르듯 허공을 꽉 쥐어내는 메피스토.
그러자 조원호의 몸이 허공에 떠오르고, 그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갔다.
“저, 메피스토님.”
“…!”
그리고 그 순간.
뒤쪽에서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메피스토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뭐… 뭐냐, 오로바스냐?”
“네. 드릴 말씀이 있어서.”
…인기척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메피스토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순간적으로 등골이 쭈뼛 서버릴 정도.
“지금 바쁜 거 안 보이냐? 다음으로 해.”
그 당황을 감추기 위함일까.
메피스토는 일부러 짜증 섞인 목소리를 내뱉으며 다시 조원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 안 들으시면 후회하실 텐데.”
그럼에도 오로바스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이번에는 그의 바로 귀 옆에서, 속삭이듯이.
그리고 그 다음 순간.
푹.
“…어?”
짤막한 침음성과 함께, 메피스토는 자신의 가슴팍을 뚫고 나온 검 끝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왜냐면, 자기가 죽는 이유 정도는 알아야 덜 억울하지 않겠는가.”
“어… 커헉.”
갑자기 등 뒤를 잡혔고.
갑자기 복부를 관통 당했다.
상황은 알겠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왜인지는 알 필요 없었다.
마족들끼리 뒤통수치는 일이야 잦았으니까.
하지만, 어떻게?
설령 바알이라 하더라도, 이 정도로 조용히 자신의 뒤를 잡을 수는 없다.
그 의문을 머릿속에 담은 채.
메피스토는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고, 곧이어 오로바스의 칼이 그의 목을 베어냈다.
툭, 데구르르.
초라하게 바닥에 나뒹구는 메피스토의 목.
그 때까지도 그의 얼굴엔 의문이 맺혀있었고.
그 얼굴은 서서히 검은색 먼지로 흩어지더니, 허공을 맴돌다 오로바스의 몸 안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많이들 놀랐겠지.”
그리고 오로바스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인사하지. 바알이라고 한다네.”
* * *
“이게… 갑자기 어떻게 된…….”
이 상황을 모두 지켜보고 있던 리리스.
아공간에서 수백 개의 탐색망을 펼치고 있던 그녀의 얼굴엔, 메피스토 이상의 당혹감과 의문이 나타나 있었다.
곳곳을 비추는 수백 개의 탐색망, 거기에 있는 모든 것에 오로바스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었으니까.
환영인가?
아니, 그렇다고 하기엔 하나하나의 마력이 너무나도 강대했다. 실제로 갑자기 나타난 오로바스들에 의해 전선이 붕괴되고 있었으니까.
[크아아악!]
[지원 바란다! 이쪽 A-2 전선, 붕괴 직전…]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곳곳에서 비명 소리들이 울려 퍼진다.
고통에 찬 비명, 지원을 바라는 요청, 절박하게 목숨을 애걸하는 탄원.
각각 말은 다르나, 내용과 결과는 같다.
살고 싶다는 것.
그리고 그들의 목숨은 하나같이 무의미하게 사라져간다.
[소연아! 이쪽으로 빨리, 급해!]
[크리스라도 와줘, 전선이 무너진다!]
그나마 전선에 배치되었던 S급 헌터들이 지원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벌어보려 하긴 하지만.
지원 같은 게 있을 리가 없다.
오로바스가 나타난 건 지원본부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이는 레비아탄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서울 한복판을 단숨에 빙하지대로 만들었던 레비아탄이지만, 그는 수십 기의 오로바스들 사이에서 힘겹게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바알이 오로바스라니, 설마… 아니 잠깐만. 그러면 말이 안 되는 부분이 한둘이 아닌…….”
“뭐가 말이 안 된다는 건가?”
이 상황을 그나마 수습할 수 있는 건 자신 뿐이다.
당혹스레 이리저리 탐색망을 살피던 리리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그녀의 등 뒤에서 오로바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흣!”
허나 그보다 빨리, 리리스의 손에 워프 블레이드가 쥐어진다.
이미 예상을 하고 있었던 걸까, 그녀의 반응은 빨랐고, 등 뒤에 서있던 오로바스는 대처도 하기 전에 두 조각이 되어 땅바닥에 스러졌다.
“후우, 후우…….”
“너무한 걸.”
“!!”
하지만 하나의 오로바스가 쓰러지자, 또 다른 오로바스가 그녀의 등 뒤에 나타났다.
그녀는 다시 워프 블레이드를 휘둘렀으나.
이번에는 방심이 없다는 듯, 오로바스의 검이 먼저 그녀의 복부를 꿰뚫었다.
“크…헉.”
“이야기라도 좀 나누려고 했는데, 내 성의를 깔끔하게 무시할 줄이야.”
오로바스는 복부를 꿰뚫은 단도를 비틀어 상처를 찢어내고, 마력을 불어넣어 안쪽을 헤집어놓았다.
“쿠흡.”
고개를 숙인 리리스의 입에서 핏물이 쏟아져 나온다.
꽂아넣었던 단도를 뽑아내는 오로바스.
그러자, 힘을 잃은 리리스의 신체는 그대로 바닥에 허물어졌다.
“뭐, 이야기라 해봤자 작별인사 정도겠지만 말이야.”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