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길쭉하게 뻗어 나온 짐승의 주둥이와, 주둥이 안쪽으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는 거대하고 날카로운 송곳니들.
흙먼지를 가르고 나타난 짐승의 대가리는 거대한 늑대가 떠오르는 그런 모습이었지만, 그 피부를 덮고 있는 것은 포유류의 털과 가죽이 아니라, 드래곤의 것과 비견해도 좋을 만큼 단단하고 두터운 비늘이었다.
하지만 주변의 헌터들이 할 말을 잊은 것은, 그런 세세한 것들보다 더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곳에서 나타난 짐승의 대가리는, 그 자체만으로도 그들의 시야를 전부 가릴 정도로 거대한 것이었다.
“…하하. 아무리 괴물이라고 해도 그렇지, 이건 너무 크지 않아? 질량의 법칙이라든가, 중력이라든가 이런 거 아예 무시하고 있지 않아?”
“빌딩만한 새대가리가 날아다니는 것도 숱하게 봤을 텐데 뭘 새삼. 몬스터가 언제부터 상식을 지켰다고 그래?”
“그래, 난 예전부터 그게 참 불만이었어.”
레이크와 고은소가 서로 말장난 하듯이 가벼운 말투로 이야기를 주고받았지만, 그들의 시선은 멍하니 정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들의 눈앞에 있는 광경은, 어느 정도 상식을 벗어났다고 여겨지는 헌터들에게도 받아들여지기 힘든 광경인 것이다.
“…너, 이 시발. 괜히 불길한 소리는 지껄여가지고.”
“아니, 그게 무슨 내 탓이야? 그냥 저 새끼 명줄이 미치도록 질긴 탓이지. 같은 동료끼리 그렇게 정치질하면 못써요.”
유선이 불만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하자, 이태현이 억울하다는 듯이 반박했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둘은 신중하게 에테르를 가다듬고 전투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마치 몸에 밴 듯한 신속한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마치 사전에 합의라도 해뒀다는 듯이, 로이드와 그 뒤에 뭉쳐있던 헌터들은 동시에 사방으로 흩어졌다. 사전에 각자 지정해뒀었던 방향이었다.
그리고 그 직후, 방금 전까지 그들이 모여 있던 곳은 거대한 짐승의 팔에 내리 찍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하하하하하!! 같이 놀아볼만하잖아!!]
행복에 겨워하는 듯한 벨제부브의 광기어린 목소리는, 모두의 머릿속에 직접 새겨지는 듯한 느낌으로 전달되었다.
[지금부터 폭식의 군주, 벨제부브와 본격적인 전투에 돌입하겠습니다. 앞으로 전투에 관련된 정보 전달은 사전에 이야기를 나눴던 대로 전음으로 행해주시길 바랍니다.]
[[오케이.]]
리리스의 곁에 남아 각지의 통신을 통솔하는 이소연의 전음에 전원이 대답했다. 벨제부브의 방해로 인하여 네트워크는 마비가 되었으므로, 이소연의 능력을 통해 구성된 전음망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쿠워어어어어어!!”
이젠 완전히 구덩이에서 기어 올라와 대지 위에 네 발을 디딘 거대한 짐승은, 사방으로 흩어진 헌터들을 뒤쫓기 시작했다.
“…정말로 그냥 짐승새끼나 다름없네.”
사냥감을 쫓아 맹렬하게 질주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광기의 맹견이라는 그의 또다른 이명을 곧바로 떠올렸다.
마치 사냥개가 풀어진 사냥감을 뒤쫓는 듯한 모습.
하지만 사냥개는 사냥감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발을 묶어두는 역할을 맡을 뿐이지만, 저 광기의 맹견은 발을 묶어두기는커녕 모가지를 끊어놓을 것이다.
일도양단(一刀兩斷)?
아니, 그건 안된다.
일도양단은 물론이고 자신의 기아스를 활용하는 기술들은 전부 봉인해둬야 한다.
‘자칫 기아스를 남발했다가는, 오히려 상황이 꼬여버릴 수 있어.’
기아스를 활용하는 기술들은, 당연히 내 자신에게 기아스라는 부담을 남기게 된다.
물론 단발성으로 이뤄지는 일회성 기아스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실패시의 리스크는 여전히 존재했다. 그리고 자신은 상태가 호전되기는 했지만 결코 멀쩡한 몸뚱이는 아니었다.
“…생각만 너무 길어졌네.”
벨제부브는 도시의 빌딩들을 마치 수수깡처럼 바스러트리며 거침없이 종횡무진하고 있었고, 나는 그런 녀석을 내려다보며 수십 개의 빛의 창들을 만들어 냈다.
“카아아아아아!!”
수십 개의 빛의 창들은 나의 손짓과 함께 비처럼 땅으로 쏟아져 내렸고, 그것들은 그대로 저 거대한 짐승을 속박하는 말뚝이 되었다.
다만, 비록 신성계 최상위의 마법 궁니르라고 하더라도 저 짐승을 묶어두기에는 지나치게 빈약했고, 벨제부브는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튀어오를 것처럼 몸을 흔들어댔다.
[전원, 공격!!]
로이드의 전음은 전음망을 통해 모두에게 퍼져나갔고, 그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 전음이 끝나자마자 사방에 퍼져있던 헌터들이 동시에 공격을 날렸다.
이 공격찬스는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동안만 허락된 짧디짧은 것이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최선의 공격을 쏟아냄으로써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좋아, 좋아, 좋아좋아좋아좋아!!!]
“쿠워어어어어어!!”
하지만 벨제부브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 집중포화가 계속되는 와중에 말뚝을 뽑아내고서 포효를 내질렀다. 녀석의 모습에서는 고통의 흔적은커녕 제대로 된 생채기조차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잠시나마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던 헌터들은, 다시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고, 다시 벨제부브의 추격전이 시작됐다.
‘아직까지는 괜찮아. 괜찮지만…….’
원래 나의 전투방식은, 그딴 것 상관없이 일단은 적이 눈에 보이면 닥치고 달려들고 보는 것이었다.
내가 책임질 것은 오로지 내 목숨뿐이었고, 그 책임을 다하지 못했을 때 피해를 입는 것 또한 오롯이 나뿐이었으니까.
그게 아크의 방식이었고, 마왕 살해자의 방식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등에 짊어지고 있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나를 의지하고, 믿고 따르는 동료들이 있었고, 여태동안 내가 살아왔으며, 내가 살아갈 세계가 있었다. 지키고 싶은 소중한 사람과 일상이 있었다.
그것은 자신을 이 자리에 서게 만든 원동력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자신을 함부로 움직일 수 없게 만드는 공포이기도 했다.
저 벨제부브와의 전투가 마지막 전투라면, 기아스를 남발해서라도 저 괴물을 쓰러트리겠지. 수백의 기아스가 깨져나가더라도 마지막 하나의 기아스로 목적을 달성하면, 부작용은 남더라도 몸은 회복되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벨제부브라는 녀석은 어디까지나 다섯 명의 군주들 중에 한 명일 뿐이었다.
‘아크, 죄송하지만… 벨제부브와의 전투에는 참여하지 말아줬으면 해요.’
리리스는 다른 군주들과 1:1로 대적할 수 있는 것은 여기서 나뿐이라며, 만약의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힘을 아껴둬야 한다고 말했다.
이 자리에 내가 서있는 것은, 순전히 자신의 고집 때문이다. 나는 그 만약의 상황이 벨제부브와의 전투에서 터지면 어떻게 할 거냐고 우겨서 겨우 그녀의 생각을 돌려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이 틀린 건 아니지.'
그녀의 말은 옳았다.
다른 군주들을, 특히 바알을 막아낼 수 있는 것은 나 뿐이었으니까.
그건 왜곡된 자부심에서 비롯된 생각이 아니었고, 자만심에서 돋아난 생각도 아니었다.
단지 객관적인 사실일 뿐이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자리에서 간간히 저 괴물 녀석을 견제해, 적당한 찬스를 만들어주는 것뿐이었다.
* * *
“하하, 벨제부브 녀석. 기대 이상이잖아.”
허공에 몸을 띄운 채 지상을 바라보고 있던 메피스토는, 만족스러워하는 미소를 지었다. 그의 입 꼬리가 위로 치켜 올려졌다.
그는 박수라도 쳐주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는 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과 주변 일대를 침식하고 있는 자신의 영역에 최상위 은신 마법을 다시 한 번 펼쳐냈다.
누군가 자신의 이런 모습을 본다면 쓸 데 없는 노파심이라며 겁쟁이 취급할 지도 몰랐지만, 지금 상황에서 자신의 기척을 노출시킨다면 얄짤 없이 저 아크와 전투를 벌이게 될 터였다.
지금 아크는 육안으로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상공에 떠올라 있었다.
전장의 한복판에 떠올라있으면서도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 이유는, 다른 군주가 나타났을 때를 대비하기 위한 것이겠지.
이런 상황에서 모습을 드러낼 만큼 메피스토는 멍청하지 않았고, 의리라는 건 당연히 그에게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었다.
물론 안전만을 도모하기 위해서라면 이 위험한 전장의 상공에 몸을 띄우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차라리 어디 조용한 시골구석에서 아공간을 펼쳐두는 것이 훨씬 안전하리라.
그런 그가 굳이 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상공에서 은신 마법과 공간 침식까지 활용하며 숨어있는 것은, 이 전투를 관찰하기 위해서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 전투를 통해서 꼭두각시로 적당한 녀석을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자신의 목적을 대신 수행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고, 나중에 상황이 꼬였을 때도 간단하게 처분할 수 있을, 그런 적당한 꼭두각시를.
그를 위해 메피스토는 저 밑에서 뛰어다니고 있는 헌터들의 움직임은 물론, 그 정신 상태와 심리까지도 하나하나씩 살펴보고 있었다. 전투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말이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