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메피스토는 아랫입술을 잘근 깨문 채로 바알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바알은 시치미를 때는 듯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생각해보니, 애초에 선봉으로 군주 한 명만을 보내는 건 조금 위험할 것 같군. 물론 우리가 인간들 따위에게 죽지는 않겠지만, 만약이라는 게 있지 않겠나?”
“음… 자칫 잘못하면 각개격파 당하는 식으로, 인간들의 얄팍한 수작에 당할 가능성도 있겠군요. 좋은 생각이십니다.”
바알이 나긋한 목소리로 읊조리자, 그 옆에 서있던 오로바스가 냉큼 그의 말에 사족을 덧붙였다.
그 꼬라지가 그렇게 얄밉게 보일 수가 없었다.
메피스토는 지금 당장에라도 저 얄팍한 모가지를 쥐어 비틀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랬다가는 바알에게 빼도 박도 못하는 명분을 내주는 꼴이 되었다.
아마 지금 이 자리에서 바알과 적대하게 되고, 당장에 모가지가 뽑혀나가게 되겠지.
메피스토는 분노를 애써 참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지. 이토록 명예로운 자리를 나에게 선사해준다니, 바알의 배려에 몸 둘 바를 모르겠는걸.”
“무얼. 그대에게는 그 정도 영예를 거머쥘 자격이 있네. 다 자네의 은덕인 것이지.”
같잖지도 않은 소리를.
자기도 모르게 살기가 뿜어져 나오려는 것을 애써 차단하며, 메피스토는 회의장의 출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 가는가?”
“선봉대로 나서려면, 아무래도 준비가 필요할 것 같아서 말이야. 미안하지만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도록 하지.”
메피스토의 목소리는 담담한 것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분노는 조금만 눈치가 있어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선명했다.
“쿡쿡, 그런가. 하긴 그럴 만도 하겠지. 그대에게 마신님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바라겠네.”
“…그럼.”
태연한 바알의 모습에, 메피스토의 얼굴은 결국 잔뜩 구겨져버렸다.
그는 바알의 같잖지도 않은 인사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대응한 후, 회의장 밖으로 나섰다.
* * *
“뭐가 마신님의 축복이야, 빌어먹을 자식!!”
콰자작!!
메피스토는 화를 참지 못하고 다시 한 번 주먹을 휘둘렀고, 결국 남아있던 그의 집무용 테이블까지도 부서져버리고 말았다.
“…후우.”
테이블을 박살내고서, 머리카락을 한 차례 쓸어내린 메피스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박살난 가구들의 파편이 가득한 집무실을 한 차례 둘러보았다.
‘…애송이들이나 할 법한 화풀이를 해버렸군.’
이런 때일수록 판단은 냉정하게.
분노는 복수의 순간까지 미뤄둬도 충분하다.
오히려 감정을 앞세울수록, 복수는 점점 멀어지기 마련이다. 메피스토는 일단은 진정하기로 했다.
“…집무실 꼴이 말이 아니군.”
딱.
메피스토는 마나를 담아 손가락을 튕겨냈다. 그러자 산산조각이 난 가구의 파편들이 서서히 공중으로 떠올랐다.
공중에 떠오른 파편들은 이윽고 자신들의 자리를 찾아 원래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본래라면 수행원들에게 시켜도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이런 감정적인 모습을 부하들에게 보여서는 군주의 체면도 말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딱.
벌컥.
“어, 어어?”
다시 한 번 메피스토가 손가락을 튕기자, 그의 집무실의 문이 거세게 열렸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누군가가 당황한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멍청히 서있었다.
메피스토는 그 자의 몸을 그대로 속박시켜, 자신의 앞으로 끌어와 무릎을 꿇렸다.
“네놈은… 흠.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군.”
잘은 몰라도 자신을 수행하는 수행원들 중에 한 명이었다. 얼마나 일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요즘 들어 자주 눈에 들어오던 녀석이었다.
“그래서, 누가 보냈지? 아니. 멍청한 질문이군. 바알 말고 이런 대가리를 굴릴 수 있는 녀석은 없을 테니까.”
그가 신경질적인 모습을 보일 때, 그의 수행원들은 집무실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 괜한 불똥이 튈까봐 두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건, 이 녀석이 쓸 데 없이 충성심이 높던가,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킥킥, 마족에게 충섬심이라니.
자신의 생각이었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며 메피스토는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마족은 마족끼리도 믿지 않는 법이니까.
“메, 메피스토님. 바알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닥쳐라. 판단은 네놈이 하는 게 아니니까.”
그 순간, 해당 수행원의 시점이 몽롱해지고, 그는 제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마치 망가진 꼭두각시 인형과 같은 모습이었다.
“그래서, 거기 서있던 목적은?”
“바알님에게… 명령을… 받아서…….”
그는 멍청한 표정을 지은 상태로, 절대로 말해서는 안 될 사항까지 전부 털어놓고 있었다. 메피스토의 정신 지배였다.
수행원이라고 해도, 군주급의 마왕을 직접 모시는 위치다. 나름대로 작위를 갖고 있는 마족이고, 더군다나 바알 진영에서 첩자로 선발된, 나름 실력을 갖고 있는 인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일곱 군주들 중에서도 정신 지배 능력에 특화되어있는 메피스토에게 그 정도는 무의미한 수준에 불과했다.
“그만. 이제 전부 잊고서 사라져라.”
“예. 알겠습니다.”
수행원은 멍한 상태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닫고서 밖으로 나섰다.
살려둘 생각은 없었지만, 지금 당장 처리하면 바알의 의심을 살 수도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다음을 기약해야하는 상황이다.
“…후우. 처리할 일만 늘어가는 군.”
메피스토는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집무실은 어느새 복원이 끝나 원래대로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래도… 맨 처음 상황보다는 훨씬 나아진 상태지.”
처음에는 지구에 선봉으로 단독 출진을 해야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벨제부브라는 든든한 총알받이가 추가된 상황이었다. 그것도 아주 멍청한 총알받이가.
벨제부브는 그 순수한 전투력에 있어서, 레바아탄은 물론이고 그 바알과도 비견될만한 녀석이다.
녀석이 인간들의 시선과 시간을 잔뜩 끌어준다면, 어쩌면 자신은 손가락 까딱하지 않은 채 본대가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씨발. 바알 녀석만 아니었어도…….”
하지만 그래봤자 바알 녀석이 뭔가 꿍꿍이를 꾸민다면, 시간을 끌어 본대를 기다려봤자 뒷통수에 비수나 맞겠지.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하려해도 상황은 좋지 못했다. 메피스토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 * *
[크리스. 한국의 대전 주변에 카오스 게이트의 반응이 있어요. 피난 행렬을 노리는 것 같아요.]
[알았어요. 리리스.]
[뭘요. 크리스에게 포탈은 필요 없겠죠?]
[그럼요. 저도 가끔은 직접 움직여야죠. 항상 고마워요, 리리스. 그럼.]
그 미소가 전달될 리는 없겠지만, 크리스의 전음에 리리스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전음 회선을 마무리했다.
인간에게 감사를 듣는 것은 언제나 어색했지만, 그다지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아크도 아닌 다른 인간에게도 이런 기분이 들게 될 줄이야.
자신도 몰랐던 모습에, 리리스는 요즘 들어 묘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아직 그녀를 받아들이는 인간들은 소수에 불과한 것이 사실이다. 대부분은 아직 그녀를 꺼림직 하게 여기고,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렇기에 리리스는 별도의 아공간을 만들어 낸 후, 스스로 그곳에 들어가 생활하며 그곳에서 지구의 마나변동과 차원 에너지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그녀에게 불쾌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애초에 여기서 자신은 종족도 다를 뿐더러, 동족을 배신하고 온 배신자에 불과하다. 불청객에 불과한 주제에 후한 대접을 바란다면 그게 이상한 것이다.
그렇기에 처음에는 그저 아크의 칭찬을 듣기 위해, 그와 더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에 움직였을 뿐이다.
인간들이 수련을 쌓을 수 있는 아공간을 제공하고, 게이트 반응을 살펴 경고를 알렸다. 필요한 때에는 직접 포탈까지도 열어주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를 움직이는 것은 아크에 대한 마음만이 아니었다. 정말 스스로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녀는 인간들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제가 그동안 얼마나 관심이 없었는지, 그리고 무지했는지… 알게 됐다고나 할까요.”
인간들은 나약하기는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흥미롭고 아름다운 종족이었다. 결코 자신이 가볍게 다루고 이용해도 좋은 종족이 아니었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그들을 관찰하고, 직접 소통을 나누고 나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마음은 무거워지는군요.”
그동안 자신의 손으로 직접 베어냈던 인간들의 목숨.
자신의 명령 하나만으로 수없이 많은 인간들이 죽어나갔던 그 학살의 현장들.
그리고 자신의 목적 때문에 낯선 차원으로 떨어져, 좋을 대로 이용만 당하고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던 인간들의 목숨.
인간들에 대한 호감이 커져갈 수록, 그녀의 죄책감은 커져만 갔다.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이었기에, 그 죄책감은 지울 방법도 없는 것들이었다.
‘…아니, 단순한 위선일지도.’
리리스는 쓴 웃음을 지으며 생각했다.
애초에 자신은 아크에게조차도 모든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아직 비밀을 남겨둔 상태였다.
그에게 말해야 한다고.
모든 걸 털어놓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거기서 부터가 속죄의 시작이라고.
하루에도 몇 번이나 반복하는 생각이다.
하지만 그 비밀을 말할 용기가, 그 비밀을 듣고 난 후의 그 시선과 마주칠 용기가 그녀에게는 없었다.
결국 자신의 마음은, 자신의 결의는 그 정도에 불과한 것일까.
착잡한 심정으로 기분이 가라앉은 리리스는,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린 채 다시 감지망을 펼쳐냈다.
비밀을 털어놓을 용기조차 없는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속죄는, 이것뿐이었으니까.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