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오셨습니까, 메피스토님.”
“인사는 됐고, 다 꺼져. 혼자 있을 거니까.”
자신의 마왕성으로 돌아오자마자 집무실로 들어선 메피스토가 신경질적으로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또 지랄인 것인가.
요즘 들어 자신들의 군주가 스트레스성 발작을 일으키는 빈도가 잦아졌다고, 방 안에 있던 수행원들은 생각했지만 그다지 내색하지는 않았다.
내색이라도 했다가는 당장 목이 날아갈 터였으니까.
수행원들은 말없이 공손히 고개를 숙인 채로, 메피스토만을 남겨둔 채 천천히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이런 젠장 할!!”
콰자자작!!
그리고 수행원들이 나가자마자, 메피스토는 눈앞에 놓여있던 테이블을 걷어찼다.
애꿎은 테이블은 단숨에 산산조각이 나 버렸고, 그 조각들은 카페트 위에 산산조각으로 흩어져 청소하기 꽤나 곤란해 보이는 광경만이 남아있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바알 놈!!”
하지만 그 정도로는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 메피스토는 계속해서 주변 물건들을 박살내기 시작했다. 그저 순수하게 화풀이만을 위한 물리적 폭력이었다.
마침내 방 안에 제대로 된 물건이라고는 집무용 탁자와 그가 앉는 의자만 남게 되었고, 메피스토는 그제야 파괴행동을 멈추고 자리에 앉았다.
치솟아 오르는 분노를 겨우 잠재운 메피스토는, 의자에 등을 한껏 기댄 채로 방금 전 회의에서 언급되었던 내용들을 떠올려보았다.
* * *
회의 자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마왕 회의라고 해봤자, 제대로 된 내용이 오고갈 리가 없었다. 어차피 그런 중요한 내용들은 밑에 마족들이 알아서 할 문제다.
그건 다른 군주들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모두 어영부영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애초에 벨제부브나 레비아탄 같은 경우에는 머릿속에 싸움밖에 없는 녀석들이었으니까.
그런 것보다 메피스토에게 중요한 것은 군주들이 나서는 출진 순서였다.
모든 군주들이 한번에 이동을 한다면 가장 좋겠지. 하지만 지구에 차원 에너지가 넉넉해진 상황이라고 해도 그런 대규모 이동은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높았다.
때문에 군주들은 차례를 정해 순서대로 지구로 이동해야 했고, 당연한 소리지만 그 순서가 앞에 있을수록 위험했다.
아무리 지구가 제대로 된 마나 능력자도 갖춰지지 않은 황무지 같은 곳이라고 해도, 아크를 비롯한 몇몇 인원들처럼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전력들도 있었다.
마왕급이라고 하더라도 안전하지 못하다는 것은, 저번 침공에 참여했었던 마왕들의 최후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리고 군주급이라 하더라도 자칫하면 목숨이 위험할 것이라고 메피스토는 판단을 내렸다.
‘…특히 선봉은 말할 필요도 없지.’
다른 건 몰라도 선봉으로 나서는 군주는 아크와 교전을 벌일 확률이 매우 높았다.
전투력이 낮은 오로바스를 제외하면 루시퍼 때처럼 의미 없이 죽어나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시간 끌기에 불과한 역할임은 분명했다.
“선봉대는 메피스토가 맞는 것이 좋겠지.”
선봉에는 절대로 나서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회의를 진행하고 있던 바알이 말했다.
“…이야기가 대체 왜 그렇게 되는 거지?”
메피스토는 당황한 기색을 최대한 감추려했지만,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목소리에는 그의 당혹감이 대놓고 드러나고 있었다.
그런 메피스토의 심정을 눈치 챈 것인지 아직 모르는 것인지, 바알은 평소처럼 은근한 미소를 지은 채로 말했다.
“왜냐니. 이번에 총력전에 대한 이야기를 가장 먼저 언급하고, 밀어붙였던 것이 바로 자네가 아니었는가. 자네 말고 선봉의 영광에 어울리는 자가 딱히 떠오르지 않는군.”
“아니, 그런 영광스러운 역할은 나보다는 레비아탄이 더 어울릴 거라고 생각하는데.”
메피스토는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레비아탄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레비아탄은 인간들 중에 기사라는 녀석들처럼 이런 거에 목숨을 거는, 머릿속이 싸움만으로 가득 찬 녀석이었으니까.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그가 기대하고 있던 것과 전혀 달랐다.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메피스토.”
과연, 아무리 머릿속에 싸움만 가득 찬 녀석이라고 해도 죽을 곳과 살 곳을 가리는 것 정도는 가능한 것인가. 메피스토가 적잖게 당황하며 그에 대한 평가를 바꾸려할 때였다.
“내가 다른 이의 영광을 빼앗을 정도로 소인배로 보이는가. 나를 고작 그런 식으로 생각했다면 조금 불쾌하군. 걱정하지 않아도 그대에게 선봉의 자리를 양보할 것이다.”
아니, 그런 양보 필요 없는데.
하지만 이 자리에서 그런 노골적으로 약한 소리를 할 수는 없었다.
메피스토는 심리적으로 궁지에 몰린 상태였지만, 그런 기색을 보여서는 안됐다. 다른 녀석들한테는 몰라도 저 바알 녀석의 앞에서는 더더욱.
“다행이네요, 메피스토 님. 역시 마족들의 귀감이라고나 할까요.”
‘오로바스, 저 새끼가…….’
오로바스는 평소처럼 얼핏 순진하고 멍청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메피스토는 최근 그에 대한 평가를 바꾸고 있었다.
멍청해 보이지만, 결국 손해보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
순진해 보이지만, 정작 어지간한 수작들은 전부 꿰뚫고 있다.
자신의 오해일 수도 있고, 지나친 의심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벨제부브나 레비아탄처럼 무식하게 힘만 센 녀석들보다 경계 대상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지금만 하더라도 자신을 은근하게 궁지에 몰아넣고 있지 않은가.
평소와 같은 그 표정마저도 음흉하게 보이고 있었다.
“잘됐군. 모두가 그대를 신용하는 모양이야. 그럼 이대로 결정을 내리도록 하지.”
“기, 기다려!!”
결국 메피스토는 급한 목소리로 외치고 말았다. 그가 초조해하고 있다는 것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외침이었다.
‘빌어먹을…….’
이대로라면 영락없이 선봉대로 출진하게 생겼다는 생각에, 메피스토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자신과 아크가 싸운다고 하면, 과연 이길 수 있는가?
아니, 그건 불가능하다.
메피스토는 아공간에서 아크와 1:1로 대면했을 때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곧바로 단언을 내릴 수 있었다.
지구에 선봉대로 출진한다고 한다면,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 교전을 피할 수 있는가?
그것 또한 불가능하다.
지금 지구의 인간들 측에는 리리스가 붙어있는 상태였다. 다른 녀석들이라면 몰라도, 리리스를 상대로 완벽히 몸을 숨겨낼 자신은 없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대놓고 반대를 하는 것은, 바알에게 자신을 제거할 좋은 명분을 제공하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잘은 몰라도 바알 녀석은 자신을 비롯한 다른 마왕들을 제거하려들고 있었다.
아마 이번에 명분을 제공하면, 그것을 빌미로 어떻게든 나를 처리하려고 들겠지. 최악의 경우에는 바알과 직접적으로 적대하게 될 지도 몰랐다.
빠드득.
메피스토는 옆에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이를 살짝 갈았다. 초조함도 초조함이었지만, 바알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딱히 해답이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도 리리스처럼 뿔이라도 잘라서 투항해야하는 것인가. 그러면 목숨도 건지고 바알 녀석한테 엿도 먹일 수 있을 텐데.
그런 생각까지도 할 때쯤이었다.
“싫어. 선봉은 내 거야.”
“…지금 뭐라고 했는가, 벨제부브?”
“선봉은 내 거라고!!”
한참 회의가 진행 중일 때는 흥미가 조금도 없다는 듯 테이블에 쥐 죽은 듯이 엎어져있던 벨제부브였지만, 지금은 귀까지 빳빳이 세운 채로 고개를 들고 있었다.
“내가 가장 먼저 들어가서, 다 죽여 버릴 거야. 내가 가장 먼저 싸울 거야. 이건 바알이라고 해도 양보하기 싫어.”
벨제부브는 한껏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그의 눈동자 또한 섬뜩한 붉은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잔뜩 흥분하고 있는 상태라는 것을 의미했다.
“진정해라. 벨제부브. 너는 지금 메피스토의 명예를 모욕하려는 것이냐?”
“명예고, 모욕이고, 그런 거 몰라. 하지만 이건 양보 못해. 애초에 이럴 필요 없이 싸워보면 되는 거 아니야? 가장 강한 녀석이 선봉으로 나가자. 그래, 그게 좋아.”
그야말로 어거지로 밀어붙이는, 거의 땡깡 피우는 수준에 가까운 억지였지만, 메피스토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진정해, 벨제부브. 선봉 자리는 너에게 양보할 테니까.”
지금 이대로라면, 자연스럽게 선봉 자리를 그에게 떠넘길 수 있었으니까.
“정말이야? 메피스토?”
“본래는 모욕으로 받아들이겠지만… 너에게라면 믿고 맡길 수 있을 테지. 선봉의 자리는 너에게 양보하겠다.”
방금 전까지 초조해하던 기색은 온 데 간 데 없는 잔잔한 목소리로 메피스토가 벨제부브에게 말했다.
그러자 벨제부브의 안색이 환하게 펴졌고, 그 두 눈에서 새어나오던 붉은빛도 사라졌다.
“응!! 열심히 할게!!”
벨제부브는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고, 메피스토 역시 그런 그에게 미소로 대답했다. 서로가 만족하는 결과였다.
“훌륭하군. 감탄했다. 메피스토. 자신의 영광을 그렇게 순순히 양도하다니. 그대야말로 명예로운 인물이다.”
생각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멍청한 것인지 레비아탄이 지껄이는 소리를 들으며 메피스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서 감사를 표했다.
“…이런 형태로 결정을 내리는 건 바람직하지 않군. 명분적으로도, 그리고 메피스토의 명예를 위해서도 말이야.”
그 때, 중간쯤부터 표정을 굳힌 채로 주변을 바라보던 바알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선봉으로 군주 두 명을 보내는 것으로 하지.”
빠드드득.
메피스토가 이를 가는 소리는, 옆자리는 물론이고 회의장 안의 모두가 들을 정도로 크게 들렸다.
바알, 저 개 같은 녀석은 어떻게든 나를 사지에 몰아넣으려는 것이 분명하다.
그동안은 단순한 의심에 불과했지만, 지금 이 순간 메피스토는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