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돌아오셨습니까, 바알님.”
자신의 마왕성으로 돌아온 바알이 집무실의 문을 열자, 그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마족이 그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
마치 여태동안 그것만을 위해서 여기에 대기하고 있었다는 듯, 칼 같은 타이밍의 절도있는 인사였다.
카이론. 바알의 측근 중에 한 명으로, 바알의 비서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는 자였다.
“으음.”
바알은 자신에게 극상의 예를 갖추는 부하에게 적당히 손짓으로 반응을 해준 후, 창가로 걸어가 적당한 곳에 서서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곳에는 의자는커녕 얄팍한 방석 하나 조차 없었기에, 그의 몸이 곧 땅바닥에 나뒹굴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적당한 높이까지 내려왔을 때, 그곳에는 지극히 당연하다는 듯 쇼파가 나타났다. 대충 보기만 해도 부드러움과 푹신함이 느껴지는 고급 쇼파였다.
그의 몸은 땅바닥에 부딪히는 대신 부드러운 쿠션에 휘감겨 받쳐 올려졌다.
“카이론.”
“예, 듣고 있습니다.”
쇼파에 앉은 채로 꽤 오랫동안 멍하니 창가를 바라보던 바알은, 자신의 뒤편에 서있던 부하를 불렀다. 그는 이번에도 칼 같이 곧바로 대답을 해왔다.
“마실 것 좀 가져다주게.”
바알의 말이 끝나는 순간, 그의 앞에는 고급스러운 물병과 물잔이 올려져있는 테이블이 나타났다. 카이론의 마법이었다.
하지만 바알은 고개를 저었다.
“물보다는, 조금 독한 게 마시고 싶군. 그래, 예를 들자면… 푸르니우스 217년산이라든가 말이야.”
“…푸르니우스 217년산 말씀이십니까.”
그는 바알의 말을 듣고 다시 되물었다. 확인이라도 하려는 것 같은 어조였다.
악마대공급은 물론이고, 마왕들도 특별한 때가 아니라면 쉽게 접할 수가 없다는 마계의 명주, 푸르니우스.
물론 아무리 귀하다고 해봤자 술은 술이다. 명실상부 마계의 최강자로 꼽히는 바알의 권세를 빌린다면 생각보다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못 구할 것도 없는 술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200년 이상 가는 물건은 그 숫자 자체가 한정되어 있는 것이고, 그 중에서도 217년이라는 정확한 년 수의 물건을 구하기는 더더욱 힘들 것이다.
“그래, 푸르니우스. 217년산으로 말이야.”
바알은 다시 한 번 강조하듯이 말했다.
카이론이 섬기는 군주, 바알은 말 하나를 내뱉더라도 철저한 계산을 마치고서 내뱉는 자였다. 카이론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 괴팍한 주문은 숨겨진 의도가 따로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진짜 의도는, 자리를 비워달라는 것.
“알겠습니다. 잠시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바알의 의도를 파악해낸 카이론은 공손하게 인사를 남기고, 조금 급한 걸음으로 집무실 밖으로 나섰다.
잠시 후, 집무실에는 완전한 침묵만이 맴돌았다.
“…….”
그리고 그곳에 홀로 남은 바알은, 카이론이 만들어낸 잔에 물을 따라 한 모금 입에 적셨다.
“…큭.”
그리고는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 하하하하하하!!”
터져 나온 웃음은 한동안 멈추려하지를 않았다. 그가 웃음을 멈춘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하하하하, 하하, 후우… 이것 참, 우스운 일이란 말이지.”
그는 방금 전 마왕 회의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회의에 들어가기 전, 그는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계획은 그 회의에서 성패가 갈릴 예정이었다.
그리고 그건 너무 쉬운 일이었다.
명색이 마족의 일곱 군주라고 추앙받는 녀석들이었지만, 속이는 게 너무 쉬웠다. 자기가 생각했었던 대로 움직이는 꼴이, 솔직히 말해 우습기 짝이 없었다.
눈칫밥 먹기 바쁜 놈 하나에,
멍청한 개새끼가 하나.
그리고 할로우 나이트 답게 머리통도 비어있을 것이 분명한 갑옷 덩어리가 하나.
메피스토는 자기 실수를 어떻게든 묻어보려고 애써서 머리를 굴리는 게 고작이었고, 벨제부브와 레비아탄은 그야말로 단순하게 움직였다.
덕분에 회의의 결론은 자연스럽게 인간들과의 전면전으로 결정되었다. 이쪽의 총력을 쏟아 붓는 총력전. 그야말로 마지막 전쟁이다.
전쟁이 시작되면, 벨제부브와 레비아탄은 가만히 냅둬도 좋다고 자기 발로 싸우러 뛰쳐나갈 것이다.
메피스토 또한 전장에 나서야 할 것이다. 애초에 그가 말했던 계획이기에 뒤로 빠질 명분이 없는 것이다.
‘나를 아크와 맞붙게 할 생각이었던 것 같지만.’
메피스토는 회의에서 아크가 자신을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장담을 했었다.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메피스토는 진심으로 아크가 나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다만, 내가 아크와 싸워서 큰 부상을 입을 것을 기대하고 있었겠지.
하지만 아크와 직접 맞붙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 역할은 오히려 메피스토가 맡게 될 것이다. 바알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오로바스 녀석은… 생각해둘 필요도 없겠고.’
오로바스는 리리스처럼 차원마법을 비롯한 잡다한 능력에 특화된 녀석일 뿐, 전투력은 하위 마왕들 정도에나 비교될 정도로 별 볼일 없는 녀석이다.
그야말로 손가락 부러뜨리는 것보다 더 쉽게 처리할 수 있는 녀석에 불과했다.
벨제부브와 레비아탄은 멋대로 달려들었다가 멋대로 자멸할 것이다. 적당히 용사 둘 셋 정도는 데리고 가겠지. 둘이서 아크의 힘을 빼준다면 최고의 그림이다.
메피스토 녀석은 적당히 잔꾀를 부리겠지만, 그래봤자 한계가 명확한 녀석이다. 도망치다가 아크에게 뒤통수에 칼이나 맞겠지.
그동안 자신은 인간들을 학살하고, 마신의 힘을 깨울 준비를 마치고 있으면 그만이다. 이미 필요한 영혼의 숫자는 거진 채워져있는 상태였다.
물론 마신 그 자체를 부활시키기에는 아직 한참 멀었지만, ‘마신의 힘’만을 깨우기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마신’이 아니라 ‘마신의 힘’뿐이었다.
그리고 자신을 제외한 모든 마왕이 쓰러졌을 때, 마신의 힘을 깨운다. 그러면 갈 곳을 잃은 그 힘은 마신과 가장 비슷한 육체를 찾아 헤맬 것이고, 그 힘은 오롯이 자신의 것이 되리라.
바알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물잔을 기울였다.
* * *
“자아, 그럼, 우리들의 성공적인 귀환과 승리를 위하여!!!”
“건배!!”
“껀배애애애!!”
이태현이 잔을 들어 올리며 기세 좋게 건배사를 외치자, 모두가 건배를 외치며 잔을 부딪쳤다.
“크하아아아아아!! 역시, 뭐니 뭐니 해도 일 끝내고 마시는 시원한 생맥주가 최고란 말이지!!”
이태현은 단숨에 잔을 비워냈고, 안주도 먹지 않은 채로 김세율에게 빈 잔을 내밀었다.
“…무슨 500cc를 한 번에 비워내는가?”
“에이, 이런 날은 이렇게 마셔 줘야지. 안 그래?”
피쳐 앞에 앉아있던 김세율은 나무라는 것처럼 그에게 툴툴거렸지만, 그러면서도 그의 잔을 채워주었다.
“거, 누가 보면 저쪽 세계에서는 맥주는 입에도 안 댄 줄 알겠네.”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저쪽 맥주는 이런 맛이 안 난단 말이지. 지나치게 투박하다고나 할까, 너무 거칠다고나 할까.”
내 비아냥에 이태현은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다가, 다시 한 번 기세 좋게 잔을 들어올렸다.
“그런 의미에서!! 자아, 건배 건배!!”
“무슨 건배를 1분 간격으로 해요?”
내 옆에 앉아있던 소연이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지만, 그녀 역시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얼굴은 짐짓 찌푸리고 있는 상태였지만, 전체적으로 밝은 기운이 맴돌고 있었다.
‘…뭐, 말마따나 승리한 이후의 건배니까 말이야.’
세계 곳곳에 대규모로 카오스 게이트가 열리고, 마왕들이 나타난 지 하루가 지났다.
당장에라도 인류가 멸망할 것 같았던 상황은 빠르게 정리되었고, 정리를 마친 각 인원들은 각자의 원래 국가로 흩어졌다.
각자 휴식을 취하고, 느긋하게 재정비를 마치라는 로이드의 지시였다.
물론, 아직까지 바쁘게 일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런 썅!! 이제 로이드도 왔는데 난 그냥 짬 때리면 끝나는 거 아니냐??’
‘이 세상에는 인수인계라는 말이 있잖습니까, 어디가십니까 스노우 화이트님.’
나는 마지막으로 헌터 협회에 들렀을 때, 회장 집무실에서 들려왔던 대화소리를 떠올리며 묵념의 의미로 고개를 숙였다.
“무슨 생각해요, 오빠?”
지금 이 시간에도 집무실에서 미간을 찌푸리며 연신 줄담배나 태우고 있을 유선에게 잠시 묵념을 보내고 있을 때에, 옆에 앉아있던 소연이가 말을 걸었다.
“그냥. 이 시간에도 고생하고 있을 누군가에 대해서?”
“흐음, 쉽게 말해 쓸 데 없는 생각이네요.”
그렇게 말하며 소연이는 내 비어있는 잔에 맥주를 따랐다.
“근데 오빠, 그 이야기들 전부 사실이에요?”
“이야기들? 어떤 걸 말하는 거야?”
“그냥 전부요. 아스트레아라든가, 용사라든가, 마왕이라든가.”
소연이는 옆자리에서 나를 살짝 올려다보면서 물었다. 그녀의 표정은 사뭇 진지한 것이었다.
“…맞아. 전부 사실이야.”
전 날, 상황을 대충 마무리 지은 후에 S급 헌터들은 다시 헌터 협회 본부(임시)에 모였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김세율도 동행했었고(애던은 집으로 돌려보냈다), 우리들은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를 모두에게 간략하게나마 설명했다.
처음에는 다들 긴 가 민 가하는 분위기였지만, 그들 중 몇몇은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마왕이라는 녀석들과 마주했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여태동안 그들이 믿고 따라왔었던 협회의 협회장, 로이드였다.
그들은 곧 우리들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경청하기 시작했고, 주의 깊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하루아침에 이런 허무맹랑한 말을 그대로 믿기는 힘든 것이다. 아마 소연이도 받아들이기에는 조금 벅찼던 것이겠지.
“…흐음.”
하지만 내 대답을 들은 소연이는, 시선을 아래로 향한 채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혼자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오빠가 그렇게 강했던 거군요? 관련 기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도 없었으면서.”
“…뭐, 그런 셈이지.”
“납득했어요. 오히려 오랜 궁금증이 하나 풀렸네요.”
내 말에 이소연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와아, 그러고 보니 오빠는 용사님이신 거네요? 세상을 구한 용사!!!”
“아니, 그런 것까지는 아닌… 아니, 맞나.”
소연이의 말을 부정하려다, 카를라의 앞에서 했었던 다짐을 떠올리고 말을 바꿨다.
“그럼 저는 지금 용사님이랑 술 마시고 있는 거네요?? 헤헤헤.”
“야! 소연아!! 오빠도 용사거든?”
“오빠는 무슨 오빠에요, 아저씨지.”
“…내가 용사라는 것보다 오빠라는 게 더 이상한 일인건가?”
급격히 분위기가 가라앉는 이태현을 바라보며, 나는 기분 좋게 술잔을 기울였다. 떠들썩한 분위기가 싫지만은 않았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