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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범하게 살고 싶다-115화 (115/135)

115화

“하하하하하…….”

어두운 공간에 홀로 서있는 바알은, 눈앞에 보이는 영상을 바라보다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기분이 좋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런 바알의 주변에는 다른 군주들이 앉아있었고, 메피스토는 바알의 뒤에 서있었다. 마치 큰 죄라도 지은 죄인 같은 모습으로 말이다.

“…….”

메피스토는 살짝 고개를 숙여 시선을 밑으로 향한 채, 바알이 웃는 모습을 흘깃흘깃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 미친놈처럼 행동할 때가 많아 광기의 군주라는 이명까지도 가진 그였지만, 미친 척을 잘하는 것일 뿐 진짜 미친놈은 아니었기에, 메피스토는 필사적으로 바알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이것 참, 원래부터 아크에게 막힐 거라고 생각하고서 보낸 병력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거 너무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이군.”

한참동안 웃음을 터트렸던 바알은, 곤란하다는 듯이 좌우로 고개를 흔들며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의도로 그 말을 꺼냈는 지는 몰라도, 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바알은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그 미간이 찌푸려져 있다는 사실을 메피스토는 놓치지 않았다.

“원래는 저 세계를 초토화 시킨 다음, 아무것도 남지 않은 폐허에서 아크를 맞이할 생각이었는데… 허허, 아무래도 내가 그대를 너무 과대평가한 모양이야. 안 그런가? 메피스토펠레스.”

바알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순간적으로 메피스토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 한방울이 흘러내렸다.

“…바, 바알. 그게 아니라.”

‘아스트레아의 시간축이 뒤틀려 있었어. 그것 떄문에 생각보다 아크가 빨리 왔다고.’

‘리리스가 생각보다 너무 오래 버텼어. 죽이는 게 목적이었다면 모를까, 생포하는 건 너무 힘든 일이었다구.’

‘애초에 네가 리리스를 생포해오라는 말만 하지 않았더라도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거 아니야?’

수많은 변명들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메피스터는 어떤 것도 입에 담지 못했다.

변명이라는 것은 대체로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뿐이다. 특히 눈앞에 있는 녀석처럼 상대가 압도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을 때는 더더욱 말이다.

“리리스 하나 잡아오는 것이, 그렇게 힘든 일이었나? 저길 보게. 자네 한 명의 실패 때문에 저 많은 마족들과 마왕들이 학살을 당하고 있어.”

바알은 실로 안타깝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하며 허공에 떠올라있는 화면들을 가리켰다.

바알의 말에 메피스토는 마지못해 고개를 들었다. 화면들에는 게이트를 열어뒀던 곳들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었다.

바알의 말과 달리, 화면에 보이는 영상은 한참 학살을 당하고 있는 현장이 아니라 학살 후에 남은 광경에 가까웠다.

아직까지 전투를 벌이고 있는 곳은 거의 없었고, 사실상 제압이 끝나고 뒷정리가 진행되는 중이었다.

몬스터들의 시체가 즐비하게 쌓여있었고, 틈틈이 마족의 시체들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 서서히 마나로 변환되는 중이었다.

‘…쯧, 훌륭히 목표달성을 해냈구만, 뭘.’

애초에 이번 침공의 목적은, 바알을 비롯한 다른 군주들이 이동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차원 에너지를 지구에 축적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어쨌거나 군단 단위로 침공해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게 되면 이쪽의 피해도 발생하기 마련일 것이고, 그 피해만큼 지구에는 마나가 풀려, 곧 고스란히 차원에너지로 바뀔 것이기 때문이다.

바알이 자신의 계획을 따로 말한 적은 없었지만, 그 내용을 이미 파악해내고 있었던 메피스토는 그 광경을 바라보면서 남몰래 혀를 찼다.

“저들이 저렇게 무의미하게 죽어갈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대체 어디에!!”

그렇지만 바알은 비탄에 가득 찬 목소리로 외쳤다. 메피스토는 그것을 보고 뻔뻔하기 그지없는 모습이라 생각했지만, 잠자코 듣는 것 말고 별 수는 없었다.

“듣기로는 리리스의 뿔 한 쪽도 없던 상황이라고 들었다만, 그거 하나 처리 못해서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드는가?”

‘…썅. 오로바스 녀석이 쓸데없는 말을 한 모양이군.’

아공간에 있던 리리스를 본 것은 자신을 제외하면 차원의 틈을 열었던 오로바스밖에 없었다.

메피스토는 눈을 돌려 자신의 왼쪽 편에 서있는 오로바스를 바라봤다. 메피스토와 눈을 마주친 오로바스는 시선을 피하면서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메피스토는 일단 녀석에 대한 보복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급한 불부터 끄기로 했다.

“바, 바알… 그러니까… 그래! 오히려 잘 된 일일지도 몰라.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이 이제 지구 하나만 끝장내면 그걸로 끝이니까. 안 그래?”

자기가 생각해도 같잖은 소리였지만, 지금은 이런 생각밖에 떠오르지를 않았다. 메피스토는 입술이라도 깨물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그거 좋네!! 난 복잡하게 꼬여있는 건 싫어. 단순하게 부수고, 죽이는 게 좋지.”

여태동안 바닥에 주저앉아 메피스토를 바라보던 벨제부브가 손을 들어 올리면서 말했다. 그의 말에 흥미가 동했는지 귀를 쫑긋거리고 있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만, 어차피 아스트레아까지 쫓아가서 처리해야했을 녀석들이다. 오히려 이참에 한 번에 쓸어버리는 것도 괜찮은 생각이겠지.”

과묵하게 말을 아끼고 있던 레비아탄도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골칫거리였던 아크도 죽여 버리고, 지구에 남아있던 헌터인가 뭔가 하는 벌레들도 함께 쓸어버린다. 그러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레비아탄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간단히 말했다.

그는 손이 근질거리는지 오른손을 들어 올려 주물럭거렸다. 그것만으로도 육중한 금속음이 주위에 울려 퍼졌다.

‘…됐다. 전쟁광들 덕분에 살았군.’

벨제부브는 어쨌거나 싸우는 거라면 무조건 좋아하는 녀석이고, 레비아탄도 복잡하게 돌아가는 것보다는 직진으로 돌파하는 계획을 좋아하는 녀석이다.

덕분에 메피스토는 그들의 지지를 받아낼 수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니로군. 귀찮았던 녀석들을 일망타진해낼 수 있는 기회라…….”

세 명이 같이 비슷한 소리를 내뱉자, 바알도 어쩔 수 없는지 한걸음 물러서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메피스토는 내심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저희가 녀석들을 이길 수 있을까요?”

그 때,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오로바스가 입을 열었다.

“…허어?”

“응?”

“그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그러자 모두가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레비아탄 같은 경우에는 분노의 기색까지 담긴 목소리였다.

“조용.”

바알은 살며시 손을 들어 올려 분위기를 진정시킨 다음, 오로바스에게 말을 걸었다.

“오로바스, 자네의 말이 무슨 의미지? 설마 우리의 승리를 의심하고 있는 것인가?”

바알의 말이 끝나고, 오로바스는 조심스럽게 주위의 반응을 살폈다. 그다지 그에게 우호적인 반응들은 아니었다.

평소였다면 겁에 질린 모습으로 한 발 뒤로 뺐을 테지만, 그는 당당한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다들 아크의 모습을 보셨잖습니까. 메피스토님이 말씀하셨던 대로, 아르트의 유적을 돌파하고 해방시킨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반면 우리는 두 명의 군주를 잃었고, 이번에 네 명의 마왕을 추가로 잃기까지 한 상황입니다. 그다지 바람직한 상황은 아니지요.”

그리고 두 명의 군주 중에 한 명인 리리스는 자신들을 배신하고 인간 측에 붙었다. 하지만 오로바스는 굳이 그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게다가 이번 침공에 투입됐었던 군단 역시 괴멸당한 상태입니다. 반면 적들은 충분히 회복할 수 있는 정도의 피해만 입었고요.”

“흐음, 자네다운 조심스러운 의견이로군. 필요한 의견이야. 음. 하지만 말일세.”

조용히 오로바스의 말을 끝까지 들은 바알이 말했다.

“아르트의 유적을 해방시켰다고 하더라도, 아크를 제외하면 다른 녀석들이 그렇게 위협적인 것 같지는 않더군. 그래, 예를 들자면… 저기 있는 소녀는, 제파르를 상대로도 고전을 면치 못했지.”

바알이 가리킨 화면에는 김세율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녀는 온몸에 상처를 입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고, 그 앞에는 가슴 팍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제파르가 쓰러져 있었다.

“다른 녀석들은 저 소녀보다 더 강력한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봐야 비슷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해. 결국 아크 말고는 별 볼일 없는 녀석들이라는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는 말일세.”

그리고 바알은 메피스토에게 질문을 던졌다.

“자네는 아크를 직접 눈앞에서 봤지. 어떤가. 자네가 봤을 때, 아크는 얼마나 강해졌는가?”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메피스토는 그 당시를 돌이켜보면서, 조금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그는 몸은 물론이고 마나까지 완전히 회복된 상태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상태로 그를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은 없었다.

“나를 이길 수 있을 정도로?”

바알은 메피스토에게 바짝 다가가, 다시 한 번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 음흉하게 보이기까지 하는 미소였다.

그 목소리는 궁금한 것을 묻는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것에 불과한 어조였다.

“…….”

메피스토는 고개를 들어, 조용히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 안 그래도 조용했던 공간에 완전한 침묵이 흘렀다.

“하.”

이윽고, 메피스토는 어이가 없다는 듯 작게 웃음을 내뱉고서 입을 열었다.

“아니, 그럴 리가 있나. 아무리 아크라고 해도, 네 앞에서는 한낱 인간에 불과하겠지.”

씨익.

그 대답에 만족했다는 듯, 바알은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그의 미소는 더욱 짙어져있었다.

“그래, 이기고 지는 것은 이미 정해져있네. 다만 쉽게 처리할 것인지, 아니면 좀 더 귀찮게 돌아갈 것인지가 문제일 뿐이지.”

원래 자리로 돌아온 바알은, 오로바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것이 마치 당연한 사실이라는 것처럼.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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